전도서 4장: 위로자로 살기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전도자는 계속하여 자신이 관찰한 헛된 일들에 대해 서술한다. “억압”(1절)은 불의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당하는 현실을 가리킨다. “위로”(메나헴)는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억압의 상황을 풀어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부조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약자들이 속절 없이 희생 당하는데, 그 상황을 바로잡아 줄 사람이 없다. 이러한 현실 인식로 인해 전도자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이 낫고, 죽은 사람보다는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더 낫다는 극단적인 염세주의에 빠진다(2-3절). 

세상에 불의와 부조리가 이토록 심해진 이유는 서로 더 많이 가지려는 경쟁심 때문이다(4절).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바람을 잡는 것이다(5절). 경쟁의 무한 질주에서 벗어나 자족하는 것이 더 낫다(6절). “편안한 것”은 히브리어 ‘나하트’의 번역으로서, 존재론적인 안정감을 의미한다. 

전도자는 혼자 살면서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의 헛된 몸부림을 본다. 그 사람은 관계보다는 소유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사람보다 물질이 더 중요하다. 자신이 부자가 되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물질은 아무리 모아도 성에 차지 않는다(7-8절). 전도자는 물질에 집착하기보다는 사람에게 투자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과 같이 일하면 성과도 좋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9-12절).

사회 문제에 대한 전도자의 관찰은 국가 지도자에 대한 관찰로 넘어간다. 그는 “나이가 많아도 어리석은 왕”과 “가난하지만 슬기로운 젊은이”를 대조한다(13절).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출신’이나 ‘관록’이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지혜’다. 백성은 지혜 있는 지도자를 존중하고 따르게 되어 있다(14-15절). 하지만 추앙받던 왕도 죽고 나면 잊혀지니, 그것도 헛되다(16절). 

묵상:

전도자는 이 세상의 악한 현실을 보면서 살아서 고통 당하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낫고, 죽은 사람보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청년기에 읽었던 염세주의 철학자의 말이 생각 납니다. 그 철학자는 인간의 생명은 한 남성과 여성의 하룻밤의 정사로 인해 아무 의미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고, 태어나서 겪어야 하는 것은 슬픔과 고통 뿐이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거나 태어나서 일찍 죽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주장에 현혹되어 수 많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은 만수를 누렸습니다. 

현실을 보면서 차리리 죽는 것이 더 낫고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한다면,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를 찾아가야 할 지 모릅니다. 세상사와 인생사에는 부정적 현실과 긍정적 현실이 섞여 있습니다. 부정적 현실에 지나치게 함몰되면 ‘차라리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낫겠다’는 감정에 짓눌립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죽어야 할 이유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훨씬 더 많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살아야 할 의미와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내고 살아남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자신처럼 억압 당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서로를 보듬어야 합니다. “둘이 누우면 따뜻하다”(11절)는 말처럼,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서로 보듬어 주면 감당하기가 훨씬 수월 해집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억압적인 사회적 구조를 고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이 힘을 합하면 조금이라도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12절)고 했습니다. 전도자가 찾으려 했던 “위로하는 사람”(1절)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생명”이라는 한자어는 ‘살라는 명령’이라고 풀 수 있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살 이유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살아 있는 것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세상을 더 살 맛 나게 만들기 위해 힘쓰다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에 죽음을 순명으로 받아 들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망하는 일입니다. 

기도:

이 한 번의 생명을 주신 것, 무한히 감사합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이 아름다운 사람들과 더불어 살게 하심을 또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저희만 누리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위를 돌아보고 위로자로서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3 responses to “전도서 4장: 위로자로 살기”

  1. gachi049 Avatar
    gachi049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께서 지금 이순간에도 불꽃 같은 눈으로 지켜보시고 계심을 믿습니다. 점점 불평등한 세상으로 변해가는 각박한 세상에서 사이비 종교 집단들이 정권과 결탁하여 그들의 배를 채우고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삶의 고통으로 사이비 종교집단의 하수인이 되어가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주님의 백성, 믿음의 공동체에게 거듭남의 은혜를 주심을 통해 신실한 백성으로 삶의 본이 되어 약한자를 돕고 강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앞세워 그들을 변화시키는 투쟁만이 해결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 주신 하루 하루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남은 나그네 길이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Liked by 1 person

  2. billkim9707 Avatar

    폭정과 핖박과 전쟁으로 인한 살생과 탐욕 때문에 경쟁과 자연재해와 질병을 보고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가지고 계속해서 묵상하며 거기에 따르는 STRESS 로 낙심하며 살아온 어리석은 자입니다. 세상 넘어 하늘을 보고 사랑의 창조주, 은혜의 십자가, 부활의 영광, 금세와 내세의 약속,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확신하고 자족하며 허락하신 사랑과 은혜로 이웃을 섬기며 인생을 마감하기를 기도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멘.

    Like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고타마 싯다르타는 성 밖에 나갔다가 삶에 지쳐 고생하는 백성을 보고 인생에 대한 질문을 시작합니다. 답을 구하기 위해 안전하고 안정된 성에서 나와 수행의 길을 걷습니다. 왕족의 지위를 버리고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고생을 자초합니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지요. 그는 석가모니 (성자)로 세계사에 남았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 갇힌 중생들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모세도 성 밖에서 자신의 뿌리를 확인했습니다. 동족의식, 계급사회, 정의감, 약자 보호 등의 생경하면서도 자연스러운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는 싯다르타처럼 자발적으로 집을 떠난 것은 아니지만 광야의 낯선 땅에서 절대자와 만나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모세의 깨달음도 백성을 위로하는 데 쓰입니다.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와 함께 계신다 임마누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메시야, 우리를 죄에서 구하신다 예슈아, 조슈아, 예수, 사람의 아들 인자, 하나님의 어린 양, 기묘자, 카운슬러 상담자, 권능자, 영원하신 아버지, 평강의 왕…예수님은 이름만 불러도 위로가 되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것이 우리의 구원과 화평, 위로를 가리킵니다. 위로자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닮고 싶다는 기도는 위로가 필요한 곳에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살겠다는 결단은 타인의 평강과 안위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단입니다. 나만 알고 나만 위하던 삶에서 이웃의 평강에 관심을 기울이며 돌아보는 삶으로 발자욱을 떼기를 원합니다. 일주일 쯤 전에 남편과 안경을 새로 맞추러 안경원을 찾아갔습니다. 연말이 되니 가는 곳마다 사람이 많습니다. 일을 거의 다 마쳤는데 새로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한국인 안경원이어서 그런지 거의 다 한국인이었는데, 새 손님은 들어오자마자 큰 소리로 화부터 냅니다. 이 집에서 안경을 맞췄는데 전의 것보다 안보이고 잘 맞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는 겁니다. 자기가 안경테를 이리저리 움직여 봐도 맞지 않으니 안경을 잘못 만든거 아니냐고 화를 냅니다. 안 보인다고, 안경을 써도 안 보이니 답답하고 신경질이 안 나겠냐고 고함을 지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성경도 못 읽고 이게 뭐야! 모든 장사는 서비스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산업을 분류할 때는 제조업, 방산업, 농업… 나누지만 비지니스의 중심은 커스토머 서비스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커스토머 서비스의 핵심은 ‘위로’입니다. 경청, 해결, 반품, 보상…상업거래에도 위로의 자리가 있습니다. 위로 하면서 사는 삶이 아름답다고 지혜자가 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은 우리의 위로자이십니다.

    Liked by 1 person

Leave a reply to young mae kim Cancel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