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전도자는 계속하여 자신이 관찰한 헛된 일들에 대해 서술한다. “억압”(1절)은 불의한 사회 구조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이 당하는 현실을 가리킨다. “위로”(메나헴)는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억압의 상황을 풀어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부조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약자들이 속절 없이 희생 당하는데, 그 상황을 바로잡아 줄 사람이 없다. 이러한 현실 인식로 인해 전도자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는 죽은 사람이 낫고, 죽은 사람보다는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더 낫다는 극단적인 염세주의에 빠진다(2-3절).
세상에 불의와 부조리가 이토록 심해진 이유는 서로 더 많이 가지려는 경쟁심 때문이다(4절).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바람을 잡는 것이다(5절). 경쟁의 무한 질주에서 벗어나 자족하는 것이 더 낫다(6절). “편안한 것”은 히브리어 ‘나하트’의 번역으로서, 존재론적인 안정감을 의미한다.
전도자는 혼자 살면서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의 헛된 몸부림을 본다. 그 사람은 관계보다는 소유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사람보다 물질이 더 중요하다. 자신이 부자가 되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물질은 아무리 모아도 성에 차지 않는다(7-8절). 전도자는 물질에 집착하기보다는 사람에게 투자하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과 같이 일하면 성과도 좋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9-12절).
사회 문제에 대한 전도자의 관찰은 국가 지도자에 대한 관찰로 넘어간다. 그는 “나이가 많아도 어리석은 왕”과 “가난하지만 슬기로운 젊은이”를 대조한다(13절).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출신’이나 ‘관록’이 아니라 지도자로서의 ‘지혜’다. 백성은 지혜 있는 지도자를 존중하고 따르게 되어 있다(14-15절). 하지만 추앙받던 왕도 죽고 나면 잊혀지니, 그것도 헛되다(16절).
묵상:
전도자는 이 세상의 악한 현실을 보면서 살아서 고통 당하는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더 낫고, 죽은 사람보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청년기에 읽었던 염세주의 철학자의 말이 생각 납니다. 그 철학자는 인간의 생명은 한 남성과 여성의 하룻밤의 정사로 인해 아무 의미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고, 태어나서 겪어야 하는 것은 슬픔과 고통 뿐이니, 차라리 태어나지 않거나 태어나서 일찍 죽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주장에 현혹되어 수 많은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은 만수를 누렸습니다.
현실을 보면서 차리리 죽는 것이 더 낫고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한다면, 정신과 의사나 상담가를 찾아가야 할 지 모릅니다. 세상사와 인생사에는 부정적 현실과 긍정적 현실이 섞여 있습니다. 부정적 현실에 지나치게 함몰되면 ‘차라리 이렇게 살 바에는 죽는 것이 낫겠다’는 감정에 짓눌립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죽어야 할 이유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훨씬 더 많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는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을 보면,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살아야 할 의미와 이유를 찾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내고 살아남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자신처럼 억압 당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서로를 보듬어야 합니다. “둘이 누우면 따뜻하다”(11절)는 말처럼,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서로 보듬어 주면 감당하기가 훨씬 수월 해집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억압적인 사회적 구조를 고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이 힘을 합하면 조금이라도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12절)고 했습니다. 전도자가 찾으려 했던 “위로하는 사람”(1절)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생명”이라는 한자어는 ‘살라는 명령’이라고 풀 수 있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살 이유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살아 있는 것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세상을 더 살 맛 나게 만들기 위해 힘쓰다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에 죽음을 순명으로 받아 들이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망하는 일입니다.
기도:
이 한 번의 생명을 주신 것, 무한히 감사합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이 아름다운 사람들과 더불어 살게 하심을 또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저희만 누리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위를 돌아보고 위로자로서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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