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2장 12-26절: 하루 치의 수고와 하루 치의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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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전도자는 왕으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과거의 왕들이 하던 일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지혜를 추구했다(12절). 지혜를 얻으면 인생 살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혜의 용도는 잠시뿐이고, 결국 어리석은 자들과 같은 운명을 만난다(13-14절). 결국은 모두가 죽음을 당하고, 죽은 후에는 모두가 잊혀진다(15-16절). 그러니 지혜를 얻는다는 것도 바람을 잡는 일처럼 허망하다(17절).

전도자는 자신이 이루어 놓은 모든 일을 후손에게 물려 주어야 한다는 사실에 억울함을 느낀다(18절). 히브리어 ‘세네’는 “미워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평생 땀 흘려 이룬 모든 것을 후손에게 남겨주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오한다는 뜻이다. 자신의 것을 물려받는 사람이 슬기로울지 어리석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19절). 일생 동안 수고하여 얻은 결실을 수고도 하지 않은 사람이 누리게 되니, 이 또한 혐오스러운 일이다(20-22절). 밤 잠도 줄여가면서 수고했는데, 결과가 이렇다니, 헛되다 하지 않을 수 없다(23절).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큰 일을 바라고 도모할 것이 아니라, 매일 주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하루치의 기쁨과 보람을 맛보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24절). 알고 보면, 먹고 마시는 것조차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가능한 일이다(25절).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26절)이라는 번역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하나님께서 좋게 보시는 사람에게는……”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신다. 반면, 죄인들은 “모아서 쌓는 수고”를 하게 하신다. 그들은 대단한 것을 이뤘다고 자부하지만, 결국은 헛된 일이 되어 버린다.  

묵상:

오늘 본문의 키워드는 “수고”입니다. 새번역으로 따지면, 2장 전체에서 10번 나옵니다(10절, 11절, 18절, 19절, 20절,  21절, 22절, 23절, 24절, 26절). 히브리어로는 ‘아말’인데, 이것은 창세기 3장 17절에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은,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수고”는  죄로 인해 인간이 짊어지게 된 보응입니다. 타락 이전에도 “일”은 있었습니다. “일”은 히브리어로 ‘멜라카’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과 같은 거룩한 노동을 가리킵니다. 타락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멜라카’로서 일을 즐겼는데, 타락 이후에는 ‘멜라카’가 ‘아말’이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망가졌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만족과 기쁨을 얻기 위해 행한 모든 일이 결국 수고가 되었다고 탄식합니다. 어떤 것도 항구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고, 죽음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루어 놓은 모든 일을 알지도 못하는 후손에게 남겨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도자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탄식에 이릅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대안은, 큰 것을 기대하고 도모할 것이 아니라, 매일 일상에 주어지는 소소한 기쁨과 의미를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모아서 쌓는 수고”(26절)에서 마음을 떼고 그날 그날의 기쁨에 만족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지혜입니다.

26절의 말씀은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알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마 6:34)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여기서 “괴로움”은 전도자가 말한 “수고”와 같은 뜻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까지 “수고와 괴로움”은 운명적으로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따라서 수고와 괴로움을 없애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당연한 몫으로 짊어져야 합니다. 그럴 때, 하루치의 기쁨과 보람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고,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기고,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위해 살아갈 때 가능한 일입니다. 

기도:

오늘도 주님의 다스림과 섭리를 믿고 하루치의 고생과 수고를 감당하겠습니다. 하루치의 기쁨과 보람을 허락하셔서 이 하루의 삶이 복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3 responses to “전도서 2장 12-26절: 하루 치의 수고와 하루 치의 보람”

  1. gachi049 Avatar
    gachi049

    원죄로 인하여 수고와 그에따른 괴로움은 피할 수 없는 스스로 불러들인 댓가입니다. 따라서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하루하루를 자족하며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 어서속히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주시옵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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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illkim9707 Avatar

    지금까지 재물과 명예와 세상의 인정 받을려고 헛된 수고와 시간을 허비한 어리석은 자인것을 고백합니다, 자녀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가 신자로서의 role model 이 아니였기 때문 입니다.

    하루 하루의 일상이 믿는 모든이들의 구원이 되시는 은혜의 하나님을 후손과 세상에 알리는 거룩한 수고가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후손들에게 십자가 믿음의 유산을 남기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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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한 해를 돌아보는 계절을 맞이하니 오늘 지혜자의 탄식이 낯설지 않습니다. 허무합니다. 허무한걸 알면서도 그렇게 삽니다. 수고하고 애를 쓰는 자신이 가련해 보이기도 하고, 애쓰지 않아도 될 일에 목을 매는 오래된 나쁜 습관이 미워서 울 때도 있습니다. 전도서는 잘못 읽으면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릴 것 같은 책이네요.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 돌이켜주십시오. 우리가 돌아가겠습니다 Bring us back to you, GOD. We are ready to come back”라고 기도하는 선지자를 따라 묵상하던 마음에 어느새 허무가 스며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허무감은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 인생살이가 무의미하고 기계적인 무한반복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전도서를 묵상하면서 창세기를 떠올렸는데 일과 수고를 묵상하게 하는 오늘 본문도 창세기 -근원 Genesis-를 생각하게 합니다. 아담과 이브에게도 일이 있었습니다. 동산의 동물과 새, 식물을 돌보고 다스리고 양식으로 삼으라 명하셨습니다. 일이고 노동이었습니다. 사람이 사회를 이루고 생존과 적응에 필요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은 필요 이상의 수고를 요하는 노동이 되었습니다. 하루 사는데 필요한 하루치의 일 만 해서는 생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일을 할 수 없을 때를 예상해서 미리 준비해 두자는 ‘기특한’ 생각은 나를 위해 꿍쳐두는 ‘사특한’ 생각으로 발전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하면 일을 빨리 마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에서 인력 동원과 관리의 필요가 생겨났고, 분업의 진화도 일어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와 관리자의 분리도 생겼습니다. 일의 양이 얼마가 되든, 일의 종류가 어떠하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든 아니든, 일은 다 수고요 노동이요 의무가 되었습니다. 노래 만 부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사람도 노래해서 먹고 사는 사람이 되면 그건 노동이지 놀이가 아닙니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의 부작용은 노동의 종류를 구분한다는 데 있습니다. 개미의 일은 건설적이고 (집단을 위해서 하는 일, 겨울을 준비해 하는 일, 다같이 애쓰는 일) 베짱이의 일은 나태하고 비생산적인 일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 어렵지 않은 일, 손에 쥐는 결과물이 없는 일)로 분리시켜 보게 만듭니다. 베짱이의 처지를 자업자득으로 보게 만듭니다. 이솝의 원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삶과 오늘 만 살고 마는 듯이 흥청망청 사는 삶을 보여준다는 전통적인 이해 이상의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도자의 처방은 오늘은 오늘 만큼의 수고를 하자, 존재에 필요한 일 (먹고 마시고 만족하는 것) 이상의 좋은 일이란 없다, 의미나 보람, 앞날의 계획 같은 일은 매번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정도입니다. 그럴까요. 전도자의 말이 맞을까요. 창세기 초반부를 읽으면 하나님이 참 열심히 많은 일을 하셨다는 걸 알게 됩니다.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라는 엄청난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십니다. 그 사람에게 창조된 세상을 맡기십니다. 당신이 하신 엄청난 일의중요한 일부를 맡기십니다. 놀랍습니다. 사람을 어떻게 믿고! 사람이 뭐라고! 해 봐야 끝에 가서 허무함 만 남을 일을 주셨을 리 없습니다. 죄 때문에 놀이가 일이 되고, 일이 수고가 되는 뒤틀림이 생겼지만,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허무거나 아픔일 리 없습니다. 전도서의 지혜는 과정을 잘 보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하루의 과정을 관심 갖고 보라는 뜻인지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허무의 안개를 거두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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