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애가 2장: 발칙한 기도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이 시편은 성경 안에 있는 모든 시편들 중 가장 강력한 언어로 하나님의 심판 행위에 대해 비판한다. 유다를 멸망시킨 것은 느부갓네살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악행을 그대로 두고 보셨기 때문에 그런 재앙이 닥쳤다. 그래서 시인은 그 모든 재앙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에게 돌린다(1-10절). 거의 모든 문장의 주어가 “주님께서는…”으로 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4절, 5절) 작심하고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 시키셨다고 원망한다. 그분의 이름을 두신 성전도, 그곳에서 그분을 위해 섬긴 제사장들도 모두 버림을 받았다. 그들이 하나님을 진노하게 한 것은 인정하지만, 이토록 잔인하게 짓밟으실 줄은 몰랐다는 뜻이다. 

11절부터 시인은 1인칭으로 화법을 바꾼다. 그 자신이 ‘처녀 시온’이 되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고통을 묘사한다. 이로써 유다 백성이 겪는 고통은 더욱 절절하게 느껴진다. 여기서 시인은 유아와 아이들이 겪는 고통에 집중한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자신들이 받은 참혹한 고통을 부각시키기 위함이다(11-12절). 이 모든 일들은 예언자들이 거짓 예언을 전했기 때문이다. 유다 백성의 자랑이던 예루살렘 성은 이제 지나가는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전락했다(13-17절).

시인은 유다 백성에게, 밤낮으로 울면서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라고 요청한다(18-22절). 이제 남은 희망은 자신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지를 주님께 알리는 것 뿐이다. 그분의 심판은 정당한 것이었지만, 그로 인해 그들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아시면 혹시 마음을 돌이키실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묵상:

우리는 시편에서 가끔 ‘저주 시편’을 만납니다. 시편 109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원수에게 앙갚음을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도 중에 사용된 언어와 표현들이 충격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기도를 드려도 되나?’라는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저주 시편이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악담을 퍼붓는 것이라면, 예레미야 애가 2장은 하나님에게 악담을 퍼붓는 기도입니다. 저주 시편보다 한 술 더 뜬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당한 모든 재앙에 대해 하나님께 책임을 묻습니다. 자신들이 벌 받을 죄를 저지른 것은 맞지만, 해도해도 너무 하셨다고 고발합니다. 아무리 진노하셨다고 해도 앞뒤 분간 못하는 유아들까지 고통을 당하게 해야 했느냐고 따집니다. 참으로 발칙한 기도입니다.

시편에 저주 시편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하나님을 향한 이런 발칙한 기도가 애가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고 보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도 때로 그런 상황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당한 것이 너무도 억울하고 분한데,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 억울한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무 하신다’ 혹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는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그럴 때 하나님에게 나아가 있는 그대로 자신의 마음을 쏟아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바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죽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진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분노나 서운함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그분 앞에 쏟아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받아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님은 엄한 아버지와 같지만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으로 저희를 대하십니다. 저희에게 높은 기준을 요구하시지만, 넘어지고 깨질 때, 일으켜 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때로 회초리를 드시기도 하지만, 매 맞아 생겨난 상처를 싸매시며 눈물 흘리십니다. 그래서 저희는 실패할 때도, 실족할 때도, 주님만을 의지합니다. 죽어도 주님 품 안에서 죽기를 원합니다. 아멘.

4 responses to “예레미야 애가 2장: 발칙한 기도”

  1. gachi049 Avatar
    gachi049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피조물, 인간이 어찌 알 수 있나요? 그러나 죄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말씀이 육신되어 주심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주님. 이제는 죽으나 사나 주님의 것임을 믿사오니 주님의 뜻대로 행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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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illkim9707 Avatar

    여호와 하나님만이 유일한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 이신것을 다시 한번 또 고백합니다, 비록 풀무불에 들어가 죽을 지라도 이방 우상에게 굴복하지 않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기에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온전히 의지하고 감내하는 믿음을 간절히 원합니다, 눈에보이는 현실을 보고 낙심하고 분수없는 기도와 불평을 주님께 드리는 어리석은 죄를 십자가밑에 다시 내려 놓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를 마지막 숨쉴때까지 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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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간밤에 여러번 잠이 깨더니 날씨가 추워 그랬나 봐요. 방한 복장을 최대치로 두르고 출근 길에 오릅니다.기온이 영하 8도로 낮아진 화요일. 길에서는 미국 특유의 애잔한 크리스마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네요.

    애가서 2장. 원망과 분노의 울음. 하나님께 득죄하고 징벌받는 민족. 남겨진 자들에게 찾어온 가장 절박한 고통은 기아(hunger)였겠죠? 모두가 죄를 지었다지만 어린아이들, 심지어 갓 태어난 아기들에게까지 무작위로 덮쳐오는 지옥 같은 고통을 누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사람들은 고통의 문제 앞에서 “그러니까 하나님은 없다”라고 선언하곤 하지요.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며 그 분 앞에 상하고 찢긴 마음을 다 토해냅니다. 착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다루고 있는 본문. 생각할수록 모르겠고 그래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주제인 것 같아요.

    메트로를 타고 출근합니다. 이렇게 추운 날 밥 먹고 편히 잘 안식처가 있어서 감사. 일터와 가족이 있어서 감사. 슬픔과 괴로움 많은 광야 같은 인생.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앞에서 쓰러져 낙심하고 원망할 때가 있겠지요? 그래도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살아계심을. 그 비밀을 , 그 고통의 신비를 알고 믿을 수 있다면. 키리에 엘레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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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애가 2장에 오니 ‘딸 시온’과 ‘딸 예루살렘’이 망가지고 무너지는 그림이 펼쳐집니다. 몇 주 전에 기예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 티비 화면으로 보기에 아깝다 생각이 들게 시각적으로 풍성하고 호소력이 짙은 영화였습니다. 감독의 비전과 의도가 잘 전달되는 영화였는데 저런 수준으로 작품을 만들려면 감독과 제작팀, 배우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대화가 있었어야 할까, 감독은 실로 소통의 달인이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원작은 매리 셸리가 18살쯤이었을 때 약혼자와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하던 중에 유령 이야기 내기 (누가 더 무서운 유령 이야기를 할 수 있나)를 하게 되었고 당시 사회적인 화제가 되었던 과학의 진보와 야망, 특히 생명창조에 대한 호기심을 소설로 쓰게 되었습니다. 2년쯤 뒤에 매리 셸리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인간에게 불을 전해 준)’라는 부제를 붙여 “프랑켄슈타인”을 출판했습니다. 겨우 20살인데 서구 현대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쓰는 천재성도 놀랍고, 단순한 귀신 이야기 – 비오는 날 모여 앉아 귀신 이야기를 하는건 동서고금을 넘는 인류문화사적 의미인가 봅니다- 안에 과학의 오만을 경고하고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는 내용을 담고, 구체적으로는 외모를 기준으로 타자화/괴물화 시키는 산업사회의 위선을 고발하는 고전으로 발전시킨 매리 셸리의 문학성에 감탄합니다. 어렸을 때 본 프랑켄슈타인은 머리가 사각형이고 바보 같은 말투를 쓰는 괴물이었는데 기예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처연하고 똘똘하고 사랑스럽기까지 합니다. 괴물이던 그를 ‘사람’으로 대해주는건 시골 마을의 눈 먼 노인인데 (눈이 멀어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을 못 보므로 경계심이 없다는 것 = 편견과 선입견이 더 큰 장애라는 섭텍스트) 그를 통해 프랑켄슈타인은 존중과 이해를 배웁니다. 원작이나 영화의 공통 주제는 ‘누가 괴물인가?’일 것입니다. 프랑켄슈타인을 창조한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그에게 이름을 주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작품’을 창조물 creature 그놈 wretch 괴물 monster 악마 fiend 그것 thing 등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의 괴물이 과학자 인간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를 만든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이름이 괴물의 이름이 되는 최고의 아이러니가 일어납니다. 시온이 폐허가 되는 본문을 읽는데 프랑켄슈타인이 전쟁이 지나간 어느 숲을 헤매는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거기서 외투를 집어 입습니다. 벌거벗은 자기 몸을 외투로 덮고 ‘아버지’ 프랑켄슈타인 박사를 찾아 나섭니다. 오늘 묵상의 제목이 ‘발칙한 기도’ 입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보면 괴물은 사람 같고 사람은 괴물 같은 착각 아닌 착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으로 산다는건 무슨 뜻일까 생각하게 만듭니다. 영화는 뜻밖에도 용서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줍니다. “창조자여 (프랑켄슈타인 박사) 단 하나의 은혜를 내게 주소서. 나를 사랑해주지 않으면 나는 분노를 쏟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죽을 수 없습니다…살 수도 없습니다, 혼자서는…” 프랑켄슈타인의 대사로도 인간의 꿈은 사랑인 것을 봅니다. 예언자는 오늘 폐허가 된 곳에서 하나님을 찾으라고 합니다. 백성에겐 하나님을 부르짖어 찾으라고 하고, 하나님껜 사랑을 회복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Look at us, GOD 눈물로 호소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사시려고 오십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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