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애가>에 대해

2–4 minutes

음성듣기 (예레미야 애가에 대해)

예레미야서에 이어 다섯 편의 애가(애통하는 노래)가 이어집니다. 이 다섯 편의 애가가 예레미야의 것이라고 여긴 것은 히브리어 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칠십인역'(LXX)이라고 부르는데, 주전 3세기 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당시 공용어로 쓰였던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 때 편집자들이 이 다섯 편의 애가를 예레미야의 것으로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성서 ‘타낙’에서는 이 다섯 편의 애가를 작자 미상의 노래로 간주합니다. 영어 성경은 이 책을 <The Book of Lamentations>라고 이름 지어 놓았습니다. 우리 성경 번역자들은 헬라어 구약성경을 따라 <예레미야 애가>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 노래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슬퍼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네 편의 애가는 히브리어 알파벳을 따라 지어졌습니다. 순서대로 알파벳의 첫 글자를 따라 시를 짓는 것을 ‘답관체 시’ 혹은 ‘이합체 시’(acrostic poem)라고 부르는데, 시편에도 자주 나오는 히브리인들의 문학적 기법 중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작가로 하여금 감정을 절제하도록 도와 주고 독자에게는 암송하기 좋게 해 줍니다. 

이 다섯 편의 애가를 성경 안에 포함 시킨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교훈 삼아 같은 운명을 반복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선택 받고 축복 받은 예루살렘이 그분의 뜻을 저버리고 타락 했을 때 냉혹한 심판을 당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으로부터 영영 버림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의 징계와 심판은 그분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분은 끝내 다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1장: 외로움의 고통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시인은 예루살렘이 당한 재앙에 대해 노래한다. 이 노래는 히브리어로 ‘어쩌다가!’라는 말로 시작한다. 예루살렘이 당한 재앙에 대한 탄식이다. 

시인은 과거에 예루살렘이 누렸던 영화를 회상한다. 그 도성은 마치 여왕과 같았다. 지금은 여종처럼 낮아졌다(1절). 예루살렘은 마치 버려진 여인이 밤새워 통곡하는 것과 같은데, 그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2절). 예루살렘 주민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항상 북적 거리던 시온으로 가는 길에는 인적이 끊겼다(3-4절). 이제 예루살렘은 대적들의 손에 넘어가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모두 사라졌다(5-6절). 

시인은 과거에 예루살렘이 누렸던 영화를 생각한다. 그 모든 것이 깨어진 것은 그가 지은 죄 때문이다. 지금은 그 영화가 수치로 변하고, 뭇 민족이 그 모습을 보고 조롱한다. 대적들은 예루살렘을 약탈했고, 유다 백성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매인다. 예루살렘의 이 비천한 신세를 살펴달라고, 시인은 주님께 호소한다(7-11절).

그가 당하고 있는 일은 모두 그의 죄로 인해 받은 하나님의 심판이다(12-15절). 그로 인해 시인은 통곡한다. 그는 주님의 심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한다(16-19절). 그럼에도 그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멸망시킨 대적들의 죄도 잊지 말고 심판해 달라고 간구한다(20-22절).

묵상:

큰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위로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홀로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한 슬픔을 견딜 만한 내면적인 힘이 기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통해 마음 깊은 위로를 받으면 슬픔으로 인해 찢겨 있던 마음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다시 일어날 힘을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위로해 줄 사람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혹은 누군가가 위로한다고 던진 말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혀서 슬픔을 더 가중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를 경험하는 일도 드문 일이고, 누군가에게 진실된 위로를 해 주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이 당한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여기고 슬퍼합니다. 첫 번째 시편에서 그는 거듭하여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고 토로합니다(2절, 9절, 16절, 17절, 21절). 어떤 사람들은 유다 백성이 당한 일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냉담하게 등을 돌리고, 어떤 사람들은 고소해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당한 일이 자신들에게 일어날까 두려워 피합니다. 당한 불행 보다 모두에게 버려졌다는 것이 더 큰 아픔입니다. 모두에게 버렸다는 감정만큼 절망적인 것이 따로 없습니다. 

그 철저한 고독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합니다. 비록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았지만 지금 그들 곁에 있어서 호소를 들어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

위로자로 오신 주님, 저희의 참된 위로가 주님께 있습니다. 저희를 향한 주님의 사랑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더 깊이 머물게 하시고, 주님께로부터 얻은 위로의 능력으로 이웃에게 작은 위로자로 다가가게 해주십시오. 아멘. 

7 responses to “<예레미야 애가>에 대해”

  1. gachi049 Avatar
    gachi049

    점점 악하고 각자도생의 길을 가는, 사랑이 메마른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모양으로 슬픔과 고난의 늪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 위로자 주님을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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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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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illkim9707 Avatar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문제 보다 더 크시고 끝 없는 사랑의 하나님 이신것을 믿고 압니다.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려 올립니다.주님의 사랑을 세상의 어떠한 피조물(환란 시련 박해 굶주림과 헐벗음 위협과 칼날, 삶과 죽음 천사들과 권세자들 오늘과 내일 능력 높고 낮음) 로도 끊지 못한다는 말씀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심판의 목적이 멸망이 아니라 바른길로 인도 하실려는 사랑이신것을 믿습니다, 힘들고 어려운일을 당할때에도 그리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감내하는 믿음을 원합니다, 성도와 이웃이 고통 가운데 눈물을 흘리고 있을때에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와 도움이 되는 사귐의 소리 가족 모두가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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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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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아들이 초등학생 (3학년? 4학년?)이었을 때 친구의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사망했습니다. 학교와 보이스카웃에서 자주 보던 아버지였습니다. 아들 친구의 엄마는 변호사였고 아빠는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지만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4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골프를 치던 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집으로 조문을 갔더니 학부모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버지니아에 살고 있었는데 워싱턴 디씨에서 일하는 화이트컬러 부모들이 많은 동네였고, 중동지역의 이민자 가정도 제법 되었습니다. 초상이 난게 2001년 9.11 참사 이후로 기억을 합니다만, 학교나 동네의 분위기가 중동 사람들을 의심의 눈으로 보거나 크게 경계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상집에서 만난 중동인 (이집트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엄마와 한구석에 어색하게 서서 얘기를 하는데 자연스럽게 초상 문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과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남녀가 따로 모이는 것, ‘전문’으로 우는 사람이 있는 것, 며칠씩 밤을 새는 것 (박카스 같은 것을 마시면서 잠을 쫓는다는 것도 비슷했습니다), 검은 옷 (한국은 흰색 옷)을 입는 것 등등을 서로 이야기했습니다. 출생과 사망을 기리는 문화는 개인과 공동체의 접점을 보여주는 명확한 예입니다. 혼자 태어나고 혼자 죽지만 혼자 산 것은 아니라는걸 증명하는 예식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애도의 문학입니다.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는게 아니라 도시의 죽음, 나라의 멸망을 애도합니다. 나라가 죽었으니 그 나라의 백성도 죽은거고, 그러면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한 개인을 추모하며 떠나 보내는 것은 아닙니다. 히브리어에서 도시는 여성입니다. ‘딸 시온’이라는 6절에서 보듯 예루살렘의 몰락을 쓰러진 여인이나 과부가 된 처지에 비유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내가 읽는 쉬운성경은 애가를 시처럼 배열하지 않지만 소리내어 읽으면 시나 노래, 기도로 읽혀집니다. 시온의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은 갑작스럽게 떠나든 오래 앓다 사망하든, 죽는다는걸 받아들이는데 도시가 망하고 나라가 주저앉는 것을 더 큰 비극으로 여기는 이유가 뭘까요. 예루살렘은 멸망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예고되었고, 여러번 경고음이 났습니다. 애가가 전하는 슬픔은 망한데서 오는 슬픔보다 잘못 산 것, 잘못한 일에 대한 후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일년 반 동안 바빌로니아 군대에 포위되어 있다 함락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니 어떤 마술 같은 힘으로 기적 중의 기적 같은 것이 일어나 바빌론의 군대가 물러가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런 일은 끝내 안 일어났지요. 바빌론의 군대에 저항하는 마음은 결국 하나님의 예언에 저항하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선지자들의 경고에 귀를 닫는 고집은 성문을 굳게 닫고 항복하지 않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망하고 나니 다 후회가 됩니다.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후회와 회개가 밀려옵니다. 늦었지요. It’s too late. It’s done. It’s over.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초상짐에서 곡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초상집에서 곡이 그치면 안된다는 의식 즉 망자 (대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상가집의 규모 (명성)를 밖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허례허식처럼 느껴집니다만 현대인의 시각에서 평가하는 것이 다 옳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애도와 회개는 바빌론 포로들과 방법 면에서는 다르지만 내용에서는 상당 부분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시는 분도, 가져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사는 것.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왕국이 사라질 때 세워진다는 것. 나는 매일 죽고, 매일 새로 태어난다는 것…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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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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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추운 바람이 일고 구름이 많이 낀 아침, 월요일입니다. 월요일은 늘 힘들지만 오늘은 더 일어나기 힘들었어요. 그래도 힘을 내어 한 주를 시작해 봐야하겠지요?

    예레미야 애가를 한 주 더 묵상하게 되네요. 일종의 뒷풀이? 애가…슬픔의 노래. 무너진 성벽, 불타버린 성전, 끌려간 사람들.

    패망의 날에 많은 이들이 죽고 끌려가지만 목숨이 끈질긴지라 남은 이들이 있었겠죠? 그들이 직면한 The Day After의 현실은 굶주림과 트라우마, 절망, 그리고 멸시. 시인은 어찌하여 (how)라는 제목으로 애곡의 노래를 부릅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바꿔버린 레위의 자손.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는 주의 부탁을 잊고 압제와 불의의 아이콘이 된 다윗의 집안. 그것이 how라는 질문에 대한 시인 스스로의 답인 것이겠지요? 시간을 돌이킬 수만 있다면 다가올 절망의 엔딩을 고칠 수 있었을까요?

    12월 둘째 주가 시작됩니다. 지나가는 광음. 정말 시간이 살 같이 지나갔어요. 오늘도 눈을 뜨고 숨을 쉬고 있고 일 할 수 있어서 감사. 가족으로 인해 감사. 오늘이라는 이 시간이 주가 허락하신 기회의 때임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기를.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 되시고 주의 성령이 빛이 내 길을 비추시길. 길을 잃지 않도록. 혹 길을 잃을지라도 돌이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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