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듣기 (예레미야 애가에 대해)
예레미야서에 이어 다섯 편의 애가(애통하는 노래)가 이어집니다. 이 다섯 편의 애가가 예레미야의 것이라고 여긴 것은 히브리어 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을 ‘칠십인역'(LXX)이라고 부르는데, 주전 3세기 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당시 공용어로 쓰였던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 때 편집자들이 이 다섯 편의 애가를 예레미야의 것으로 보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성서 ‘타낙’에서는 이 다섯 편의 애가를 작자 미상의 노래로 간주합니다. 영어 성경은 이 책을 <The Book of Lamentations>라고 이름 지어 놓았습니다. 우리 성경 번역자들은 헬라어 구약성경을 따라 <예레미야 애가>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 노래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슬퍼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네 편의 애가는 히브리어 알파벳을 따라 지어졌습니다. 순서대로 알파벳의 첫 글자를 따라 시를 짓는 것을 ‘답관체 시’ 혹은 ‘이합체 시’(acrostic poem)라고 부르는데, 시편에도 자주 나오는 히브리인들의 문학적 기법 중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작가로 하여금 감정을 절제하도록 도와 주고 독자에게는 암송하기 좋게 해 줍니다.
이 다섯 편의 애가를 성경 안에 포함 시킨 이유는 후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교훈 삼아 같은 운명을 반복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선택 받고 축복 받은 예루살렘이 그분의 뜻을 저버리고 타락 했을 때 냉혹한 심판을 당해야 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으로부터 영영 버림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분의 징계와 심판은 그분의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분은 끝내 다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예레미야 애가 1장: 외로움의 고통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시인은 예루살렘이 당한 재앙에 대해 노래한다. 이 노래는 히브리어로 ‘어쩌다가!’라는 말로 시작한다. 예루살렘이 당한 재앙에 대한 탄식이다.
시인은 과거에 예루살렘이 누렸던 영화를 회상한다. 그 도성은 마치 여왕과 같았다. 지금은 여종처럼 낮아졌다(1절). 예루살렘은 마치 버려진 여인이 밤새워 통곡하는 것과 같은데, 그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2절). 예루살렘 주민들은 포로로 잡혀가고, 항상 북적 거리던 시온으로 가는 길에는 인적이 끊겼다(3-4절). 이제 예루살렘은 대적들의 손에 넘어가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모두 사라졌다(5-6절).
시인은 과거에 예루살렘이 누렸던 영화를 생각한다. 그 모든 것이 깨어진 것은 그가 지은 죄 때문이다. 지금은 그 영화가 수치로 변하고, 뭇 민족이 그 모습을 보고 조롱한다. 대적들은 예루살렘을 약탈했고, 유다 백성은 먹을 것을 찾아 헤매인다. 예루살렘의 이 비천한 신세를 살펴달라고, 시인은 주님께 호소한다(7-11절).
그가 당하고 있는 일은 모두 그의 죄로 인해 받은 하나님의 심판이다(12-15절). 그로 인해 시인은 통곡한다. 그는 주님의 심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한다(16-19절). 그럼에도 그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멸망시킨 대적들의 죄도 잊지 말고 심판해 달라고 간구한다(20-22절).
묵상:
큰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위로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홀로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당한 슬픔을 견딜 만한 내면적인 힘이 기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통해 마음 깊은 위로를 받으면 슬픔으로 인해 찢겨 있던 마음에 치유가 일어납니다. 다시 일어날 힘을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은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위로해 줄 사람을 찾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혹은 누군가가 위로한다고 던진 말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혀서 슬픔을 더 가중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를 경험하는 일도 드문 일이고, 누군가에게 진실된 위로를 해 주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시인은 예루살렘이 당한 불행을 자신의 불행으로 여기고 슬퍼합니다. 첫 번째 시편에서 그는 거듭하여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고 토로합니다(2절, 9절, 16절, 17절, 21절). 어떤 사람들은 유다 백성이 당한 일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냉담하게 등을 돌리고, 어떤 사람들은 고소해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당한 일이 자신들에게 일어날까 두려워 피합니다. 당한 불행 보다 모두에게 버려졌다는 것이 더 큰 아픔입니다. 모두에게 버렸다는 감정만큼 절망적인 것이 따로 없습니다.
그 철저한 고독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합니다. 비록 자신들의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았지만 지금 그들 곁에 있어서 호소를 들어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
위로자로 오신 주님, 저희의 참된 위로가 주님께 있습니다. 저희를 향한 주님의 사랑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더 깊이 머물게 하시고, 주님께로부터 얻은 위로의 능력으로 이웃에게 작은 위로자로 다가가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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