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44장: 예레미야의 마지막 예언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유다 백성이 이집트의 여러 지역에 정착한 후,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린다(1절). 먼저 주님은 본토 유다 땅이 폐허가 된 이유는 그들의 고집스러운 우상숭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신다(2-6절). 그것을 상기시킨 이유는 이집트에 피신 온 유대인들이 그곳에서도 우상숭배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유다 땅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심판을 목격 했으면서도 이집트의 신들을 숭배했다(7-10절). 주님은 그들의 악행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그들 중에 살아 남아서 유다 땅으로 돌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11-14절). 

이 말씀을 듣고 유다 백성은 본색을 드러낸다. 전에는 주님의 말씀이면 좋든 싫든 순종 하겠다고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대놓고 저항한다(15절). 그들은 과거에 우상을 섬기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풍요로왔는데 우상숭배를 멈추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우상 섬기는 일을 계속 하겠다고 말한다(16-19절).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조상들로부터 이어진 우상숭배의 죄를 참고 견디다가 끝내 심판하신 것이라고 답한다(20-23절). 우상숭배를 하는 동안에 형통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참으셨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그들이 이렇게 나오자 주님은 유다 백성에게, 하고 싶은대로 해 보라고 하신다(24-25절).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반역을 그대로 두고 보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 하라고 하시면서(26-28절), 이집트 왕 바로호브라가 실각하는 것을 보면 주님의 심판이 임한 줄 알라고 하신다(29-30절). 이 예언대로 바로호브라는 주전 570년에 그의 신하 아마시스에게 암살 당한다. 아마시스는 느부갓네살에게 반기를 들고 대적했다가 결국 바빌로니아에 의해 패했고, 유다 백성은 이 와중에 멸절되었다. 

묵상:

시기적으로 본다면, 이것이 예레미야가 전한 마지막 예언입니다. 그 이후에 예레미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습니다. 바빌로니아가 이집트를 침략 했을 때 다른 유다 백성과 함께 죽음을 당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43장에서 보았듯이, 예레미야가 이집트로 내려간 이유도 마지막까지 동족과 운명을 함께 하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끝까지 그곳에서 동족과 함께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아 나선 때로부터 그의 삶은 미움, 배척, 모함, 조롱, 살해위협, 구금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동족과 함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점술가들은 닥쳐 올 재앙을 미리 알려 주고 그것을 피할 방도를 제시합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재앙을 당할 때 혼자라도 살아남는 길을 알려 줍니다. 반면, 예언자들은 공동체에게 닥쳐 올 재앙을 미리 알려주고 그 재앙을 당하지 않도록 삶을 고치라고 요구합니다. 혼자만 살아남은 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살아남을 길을 제시합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 멸망의 길을 선택하면 예언자는 재앙을 향해 가는 공동체와 함께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합니다. 비록 그 운명이 비참한 죽음을 의미한다 하더라도 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가장 보기 드문 것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과거 역사의 위인들 중에는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으니, 나를 베고 부하들은 살려 달라”는 장군도 있었고, “이 모든 문제는 나의 부덕 때문이니, 나를 제물로 삼으라”는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 “제가 물러나겠으니, 교우 여러분은 하나가 되십시오”라고 결단하는 목회자도 있었고, 회사가 도산할 위기에 처했을 때 남은 재산을 사원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감옥행을 택했던 사업가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런 사람을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습니다. 모두가 자기 살 길만 찾는 비루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에 가장 큰 위기이고 불행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는 참으로 비루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믿는다는 이들조차 주님의 능력으로 성공하고 번영하기만을 추구합니다. 바울 사도처럼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여 주님의 죽음을 본받기”(빌 3:10)를 추구하려는 진심이 저희에게 없습니다. 오, 주님, 저희의 이기적인 마음을 제거해 주시고, 주님의 마음을 저희 안에 심어 주십시오. 그 마음 따라 살아 저희의 삶의 이야기에 십자가의 모습이 보이게 해주십시오. 아멘. 

7 responses to “예레미야서 44장: 예레미야의 마지막 예언”

  1. billkim9707 Avatar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간구와 바울의 간청이 그렇습니다. 허락하신 가정에서나 믿음의 공동체에서 role model 이 되어야 하는것을 알면서도 그렇지 못한 비겁한 위선자 입니다, 선장이 모든 선객들을 살리고 침몰하는 배와 같이 침몰하는 시대가 지난 실정에서도 끝까지 같이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직 십자가를 영혼에 깊히 깊히 각인하고 마지막 인생을 마감하는 축복을 기리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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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오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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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주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함께 더불어 살려고 하셨지만 죄속에서 태어난 저희들을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를 통해 용서하여 주심을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 보다 사랑으로 장차 다가올 일에 대해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 미리 알려주셨지만 믿음이 부족하고 간악하여 당장 눈에 보이는 것, 물질에만 꼿쳐있는 어리석은 배신자 입니다. 주님. 창조주이시며 다스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임을 믿고 사나 죽으나 피조물, 주님의 것임을 숨이 코끝에서 멈출 때까지 굳게 믿고 살아가는 여정을 지켜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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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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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바람이 차가운 목요일, 추수감사절 아침입니다.

    예레미야 44장. 예레미야의 마지막 예언이라고 묵상 제목이 붙어있네요. 옛언약을 휴지로 만들며 출애굽의 여정을 역주행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간 사람들. 피난처로 택한 애굽에서 그들이 우상을 다시 세운 것은 자연스러운 전개인 듯 해요. 불순종의 자녀들. 진노의 자녀들. 그들에게 “멸절”(perish)이라는 다크한 예언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남은 자들을 모두 버리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너희는 결국 다 죽게 되”라는 예언은 화풀이 말고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니라면 요나를 니느웨에 보내셨을 때처럼 하나님은 끝까지 기회의 문을 열고 기다리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들이 받아야할 죄의 삯까지 유월절 어린양 독생자의 피로 대신 치루신 것일지요?

    추수감사절입니다. 기쁨과 감격도 많이 있었지만 낙심과 우울과 상실도 늘상 곁에서 맴돌곤했던 한 해. 그래도 이렇게 눈을 뜨고 살아 숨쉬고 있고 아내와 함께 따뜻한 추수감사절 식탁을 준비하겠지요? 모든 것이 은혜,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임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기를. 무화과 나무가 무성하지 못해도, 우리에 양이 없고 밭에는 곡식이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의 노래를 울리는. 그런 하루하루, 그런 인생이 되었으면.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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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모두가 자기 살 길만 찾는 비루한 시대’ 라는건 한국 뉴스를 보면서 확인합니다. 일류 학교에서 교육 받고 높은 공직을 두루 거치며 평생 떵떵거리며 살던 고위 공직자가 법정에 서서 그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지하지 못하고 한 일이다, 변호사의 조언을 따랐다는 말을 늘어 놓습니다. 이 위기 만 넘기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겠지요. 국민과 역사 앞에 사죄하는 마음이 있다면 휘고 구부러진 것을 바로 잡아 여러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기회들을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로 맞바꾸며 살아왔음을 회개해야 마땅할텐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소셜 피라밋의 정점에 있는 권력자들의 내면이 얼마나 허하고 추한지요. 며칠 전 묵상할 때 기억하던 ‘왕좌의 게임’이 몇 년 전에 다 끝났습니다만 나는 마지막 시즌 (8)을 아직도 보지 않았습니다. 시즌 7이 끝나고 무려 19개월이 걸려서야 마지막 시즌이 나왔는데 끝까지 다 본 이들의 반응이 대부분 실망과 어이없음이었습니다. 마지막 승자가 누구라서 실망스럽다는게 아니라 그의 승리가 전하는 메시지, 그의 싸움과 여정의 의미, 권력의 헛됨, 목적과 수단의 복잡한 얽힘…이런 것들이 ‘후련하게’ 풀리지 않는다는 미진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13, 14세기의 유럽 대륙을 배경으로 삼지만 주제와 플롯 전개는 지극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선택에 따르는 결과와 책임, 권력의 독과 약, 다양하고 복합적인 인간의 심리 등이 드라마틱하게 펼쳐집니다. 이제라도 마지막 시즌을 봐야할까 싶어서 인터넷 서치를 하다보니 드라마에 실망한 이유 중에 “권력은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Power tends to corrupt and absolute power corrupts absolutely”는 진실을 확인하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세상 현실은 그렇더라도 드라마만큼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시청자의 ‘팬터지’를 채워주지 않았다고나 할까요. 권선징악의 후련함을 보여주면 시청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극장을 나갑니다. 8년 동안 계속된 드라마속 세계가 깔끔하게 정리되고 매듭 짓기를 기대했지만 카타르시스 대신 스트레스를 주는 엔딩이었나 봅니다. 권력의 부패가 드라마의 주요 테마라는 점이 이제라도 마지막 시즌을 보고싶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문명의 발전을 거듭하며 여기까지 왔지만 비루하고 비겁한 인간의 모습은 나의 밖과 안에 여전히 넘쳐나는 시대를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성경 속 유다 민족이나, 하나님의 뜻을 제멋대로 부리는 현대의 그리스도인이나 똑같은 심판을 받게 될거라는 아픔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려주었어도 백성은 돌아섭니다. 이집트여서 망하고 바빌로니아여서 망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바빌로니아도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 감사의 식탁을 차립니다. 심판을 하지 않는 하나님이라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심판하시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감사절 식탁에 둘러앉으면 무엇이 감사한지를 나누게 됩니다. 유달리 아픔과 우울의 기억이 많았던 올해였습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기도를 머리에 이고 어깨에 지고 매일 삽니다. 무엇이 감사할까요. 누구에게 감사할까요. 살아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여기 오늘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것도, 이미 죽은 것도 감사한 일임을 깨닫습니다. 고난의 해결이 감사한 것은 고난의 의미가 선물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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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님 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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