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39장: 주님의 종으로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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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잠시 예루살렘으로부터 철수하여 이집트 군을 격퇴한 느부갓네살은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한다. 주전 587년, 포위된 지 18개월만에 예루살렘 성은 바빌로니아 군에게 함락된다(1-3절).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지자 시드기야와 군사들은 야반도주를 하여 아라바 광야 쪽으로 달아난다(4절). 바빌로니아 군사들은 그들을 추적하여 사로잡는다. 느부갓네살은 사로잡힌 시드기야 왕을 신문하고, 왕이 보는 앞에서 그의 자녀들과 귀족들을 처형한다(5-6절). 그런 다음,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7절). 

한편, 바빌로니아 군사들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왕궁과 민가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허물어 버린다(8절). 그런 다음,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성 안에 남아 있는 백성과 항복한 사람들을 바빌로니아로 잡아간다(9절). 예루살렘에 남겨진 사람들은 극빈자들뿐이었다. 느부사라단은 그들에게 포도원과 농토를 나누어 주며 선심을 쓴다(10절). 

느부갓네살은 느부사라단에게 예레미야를 보살펴 주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 주라고 명령한다(11-12절).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가 전한 예언을 들어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그를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느부사라단은 다른 고관들과 의논하여 예레미야를 그달리야에게 맡겨 보살핀다(13-14절).  

예레미야가 풀려나기 전, 주님께서 에벳멜렉에 대한 예언을 주신다. 에벳멜렉은 에티오피아 출신의 내시로서 고관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 할 때 시드기야 왕에게 간언하여 살려 낸 사람이다(38:7-13). 주님은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 군에게 점령 당할 때 에벳멜렉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돌보겠다고 약속하신다(15-18절).

묵상:

에벳멜렉은 에티오피아(<개역개정> “구스”) 사람으로서 유다의 왕궁에서 내시로 일 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아마도 가난 때문에 어릴 적에 유다로 팔려 와 내시로 양육되었을 것입니다. 시드기야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고 있던 그는 예레미야가 죽음 당할 위기에 있을 때 왕에게 간언을 합니다. 그는 왕의 지령을 받고 예레미야를 진흙 웅덩이로부터 구해 냅니다. 예레미야를 위해 간언을 한 것도, 구출작전을 지휘한 것도 그에게는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시드기야 보다 고관들의 권력이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예레미야를 위해 목숨을 건 모험을 감행합니다. 

에벳멜렉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주님은 “네가 나를 의지하였기 때문이다”(18절, <개역개정>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이방 사람이었지만 유다에 와서 사는 동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왕궁에 믿음 좋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에벳멜렉처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 보았고, 그래서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 용기를 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일로 인해 내가 죽더라도 하나님이 알아 주시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니, 그분 편에 서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에벳멜렉’은 ‘왕의 종’이라는 뜻인데, 그에게 있어서 참된 왕은 시드기야가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뜻입니다. 

때로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가장 위험한 일이 됩니다. 때로 인간적으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길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위태롭고 위험한 길이 됩니다.

기도: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이름 에벳멜렉을 기억합니다. 겉으로는 왕을 섬기는 자리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주님을 진정한 왕으로서 섬겼던 사람입니다. 필요하다면 목숨을 걸 정도로 주님을 우직하게 믿었던 그 사람을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저희의 믿음도 참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4 responses to “예레미야서 39장: 주님의 종으로 사는 것”

  1. gachi049 Avatar
    gachi049

    하나님께서 쓰셨던 종, 예언의 말씀을 목숨을 걸고 전한 예레미야가 부럽습니다. 예레미야의 믿음의 만분의 일 이라도 닮기를 소망하며 날마다 공급해주시는 말씀을 먹음으로 영과 육이 강건하여 변치 않는 믿음으로 십자가 만을 바라보면서 남은 여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 도와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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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구름이 많이 끼고 스산한 금요일 아침. 아침에 DMV에 가야해서 마음이 부산합니다.

    예레미야 39장. 마침내 찾아온 다윗 왕조 최후의 날. 왕의 혈통이 끊기고 왕은 눈을 잃은 포로가 됩니다. 예루살렘성은 철저히 파괴되고요. 그리고 행운의 주인공이 되는 세 인물(들). 포도원을 갖게된 빈민들, 자유를 얻은 예레미야, 그리고 보호받은 이디오피아 내시 에벳멜렉 (예레미야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 예언의 실현과 씁쓸한 결말.

    결국 일어날 일은 운명의 수레바퀴 같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강둑이 무너진다고 동네 사람들을 깨우는 파수꾼처럼 끝까지 최악의 결말만은 막으려 했던 선지자. 결국 아무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강둑은 결국 무너져 모두를 덥칠 것을 알고 있다면? 그래도 파수꾼은 끝까지 그곳에 남아 자기 일을 다해야 하는 것일지요?

    구름 사이로 조금씩 아침에 밝아옵니다. 혼돈과 흑암으로 가득한 세상. 그 어둠 가운데 길을 잃지 않고 아침이 다가옴을 알리는 파수꾼으로 살아가기를. 주님 여기 계시기에. 주님 보고 계시기에. 의심을 이기고, 두려움을 넘어. 물 위를 걷는 그런 오늘이 되었으면.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다 하신 주. 제가 이 어둠 속에서 작은 소망의 등불을 꺼뜨리지 않고 지켜갈 수 있을까요? 제가 믿습니다. 믿음 없음을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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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billkim9707 Avatar

    보이는 세상의 군주보다 창조주 전능의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지혜를 원합니다. 나라와 백성이 망해가는 가운데에서도 위험을 알면서도 살길을 선포하는 선지자를 보호하는 용기를 기도합니다, 열매를 마땅히 맺어야 하는 늦 가을에 열매가없는 인생이 가을을 앞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십자가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을 허락하신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부터라도 열매맺는 감사를 드리는 포도나무 가지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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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바빌로니아 군대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있던 중에 이집트가 싸우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차 철수합니다 (37:11). 예레미야는 땅을 상속 받는 일을 처리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려고 길을 떠났다 성 보초병들에게 잡혀 체포됩니다. 시드기야의 고위 신하들은 예레미야가 적 (바빌로니아)과 내통하여 나라를 배신하는 자라고 정죄하며 서기관 집의 지하감옥에 가둡니다. 왕은 예레미야를 궁으로 몰래 불러들여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게 없는지 묻습니다 (37:17). 성이 함락되지 않으며 이스라엘이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언자는 옥에 갇혀 있는 중에도 예루살렘의 멸망을 경고합니다. 신하들은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이제는 그를 죽이고자 합니다. 시드기야 왕은 ‘그대들 뜻대로 처리하시오. 나는 그대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겠소 (38:5)’라고 답합니다. 신하들은 예레미야를 물 없는 진흙 웅덩이 속으로 밀어 넣어 죽기를 기다립니다. 그 때 왕궁의 내시 에벳멜렉이 왕에게 사서 아룁니다. 예레미야가 웅덩이 속에서 굶어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악한 일이라고 청하고 해어진 옷가지와 누더기를 이용해 웅덩이 바닥에서 그를 구합니다 (38:12). 1년 반쯤 지나 예루살렘은 뚫리고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은 성의 중앙 문에 앉아 유다의 왕과 신하들을 문초합니다. 유다의 고관들은 처형되고, 시드기야의 아들들도 다 죽습니다. 시드기야는 아들들과 신하들이 죽는 것을 다 본 뒤에 양쪽 눈이 뽑히는 무자비한 형벌을 받고 목숨만 붙어있는 가련한 신세가 됩니다.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에 경호대장에게 예레미야의 안전을 명합니다. 예레미야는 풀려나 자기 백성과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아직 풀려나지 않았을 때에 특별한 지침을 내리십니다. 에티오피아 내시 에벳멜렉에게 가서 ‘예루살렘에 관해 한 말을 그대로 이루는 날, 평화가 아니라 재앙으로 나타날 그 날을 네 눈으로 보게 될 것’이라고 전하고, 하나님은 에벳멜렉을 구해 주실 것이라고, 꼭 구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는 말씀을 전하라 하십니다. 그 이유는 ‘네가 나 여호와를 의지했으므로’ 살려주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격인 내시에 관해 알려진 바가 없으니 상상으로만 그를 생각해 봅니다만, 그가 참 단단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신하들에게 ‘치여’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왕이었지만 고관들이 요구하면 다 들어주었습니다. 예레미야를 몰래 궁으로 불러 혹시 다른 예언을 주시지는 않았는지 물었다는 것만 보아도 그는 조정의 압력에 굴복한 약한 왕이었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내시 에벳멜렉은 인간미 humanity 와 신심으로 다져진 사람입니다. 예언자를 웅덩이에 가두어 죽게 두는 악한 짓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왕과 신하들 보다 하나님이 더욱 무서웠던 사람입니다. 신약에서 빌립과 이디오피아 내시가 만나는 스토리는 내 마음 속에 아름다운 장면으로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주변인, 약자, 피해자, 힘 없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하고 애틋한 마음을 볼 수 있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서에도 이디오피아 내시가 나오는지 몰랐습니다. 세월을 건너 뛰는 일관성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의 한 예로 아프리카 환관이 등장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거짓과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의도성이 없고 적극 가담자가 아니라 해도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진실이 무엇인지 모를 때라도 -지금 같이 혼란한 세상이라면 더욱 더- 듣는 말, 읽는 글이 거짓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지식과 정보와 경험이 전부 다 진실이고 언제나 옳다는 착각을 버려야 합니다. 내시는 시드기야 왕 앞에서 하나님의 예언을 들으라든가, 예언자가 옳으니 죽이면 안된다든가, 혹은 풀어주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하들의 행동은 악한 것이라고, 굶어 죽도록 웅덩이에 가두는 것은 악한 짓이라고 말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나는) 신학적 통찰과 대단한 신앙고백적 행동이 주님께 점수를 딸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듯, 옥에 갇혔을 때 찾아왔는지, 물을 주고 음식을 먹이고, 옷을 입혀 주었는지…내시는 그런 것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기억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인간의 작디작은 사랑을 당신의 무한한 사랑으로 키워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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