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38장: 위기와 지도력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왕의 근위대 뜰에 갇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결국 성을 함락시킬 것이며, 항복하는 사람들 외에는 모두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궁정 대신들이 그 예언을 듣고 왕에게 나아가, 예루살렘 주민들이 그 예언을 듣고 불안해 하니 예레미야를 처형하라고 상소한다(1-4절). 통치권이 든든하지 못했던 왕은 예레미야를 고관들에게 넘겨 주었고, 그들은 예레미야를 진흙 웅덩이에 던져 넣는다(5-6절). 

시드기야 왕을 섬기는 에티오피아 출신의 내시 에벳멜렉이 이 소식을 듣고 왕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예레미야를 죽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고 간언한다(7-9절). 왕은 에벳멜렉에게 예레미야를 구출해 내라는 비밀 명령을 주었고, 그는 친위대 몇 사람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를 웅덩이로부터 끌어 올린다. 그로 인해 예레미야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 근위대 뜰에서 지내게 된다(10-13절). 

얼마 후, 시드기야 왕은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예레미야를 부른다. 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예언이 없는지 묻는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숨김없이 말하면 왕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답한다(14-15절). 시드기야가 절대로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자(16절),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기로 정하셨으니 살아 남으려면 항복하라는 말씀을 전한다(17-18절). 시드기야 왕이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는 것이 두렵다고 말하자, 예레미야는 그것 외에는 살 길이 없다고 답한다(19-23절). 

시드기야 왕은 자신에게 한 말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이르고 그를 돌려 보낸다. 고관들이 그의 말을 들으면 그를 죽이려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왕은, 고관들이 그를 찾아와 왕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물으면, 거짓말로 둘러대라고 지시한다(24-26절).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의 말대로 고관들에게는 예언에 대해 함구했고,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까지 근위대 뜰에 갇혀 지낸다(27-28절).

묵상:

“위기가 지도자를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기를 당하여 잠재되어 있던 지도력이 발현되어 공동체를 위기로부터 구해내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반면, 위기를 당하여 무능함이 드러나고 공동체를 파멸로 이끄는 사람도 있습니다. 시드기야가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다가오고 있는 국가적인 재난을 알면서도 개인적인 안위 때문에 혹은 고관들의 저항 때문에 모른체 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자꾸 불러들여 하나님이 주신 다른 말씀은 없었느냐고 묻습니다. “다른 말씀이 없느냐?”는 질문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구해주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더냐?”는 질문입니다. 바빌로니아 군대와 맞서 싸우기에는 힘이 없고, 항복하자니 백성에게 미움 받고 죽임 당할지 모르니, 요행수만 찾았습니다. 

당시로서 지도자로서 그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은 바빌로니아에게 항복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사 항전은 모두를 죽게하는 최악의 선택이었습니다. 진실로 백성의 안위를 위한다면, 항복한 후에 백성에 손에 찢겨 죽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드기야는 자신의 안위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은 최악의 순간에 최악의 지도자를 가졌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큰 죄를 지어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했을 때, 시내 산에 올라가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주님의 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달라고 떼를 썼던 모세를 기억합니다(출 32:32). 가정이든, 교회든, 회사든, 국가든, 한 공동체의 지도자로 산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지도자는 자신보다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더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날의 지도자들에게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자신의 안위만을 위하는 시드기야의 모습을 너무나 자주 봅니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힘 없는 소시민의 불행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가 속한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왜 그 자리에 있게 되었는지를 바로 아는 지혜를 주십시오.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위해 선택하는 결단력을 주십시오. 저희에게도, 혹시 작은 권력이나마 맡겨진 것이 있다면, 저희 자신이 아니라 맡겨준 이들을 위해 생각하고 선택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5 responses to “예레미야서 38장: 위기와 지도력”

  1. bull9707 Avatar

    떠나온 모국의 지도자들과 이땅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듣고 싶은 충고만 듣고 오판하여 비참한 인생을 마칠뿐만 아니라 나라와 백성들을 망하게 하지는 않은지 걱정이 되는 현실 입니다.

    하늘의 지혜로 현명한 판단을 내려 나라와 백성들이 살도록 하는 지도자들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비록 가족과 교회와 사회에서 비난과 멸시를 받을 각오를 하고 말씀을 가지고 삶의 현장에 나가 빛과 소금이되는 사귐의 소리 믿음의 식구 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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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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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오늘도 구름이 많습니다. 주말에는 비소식이 있고요. 벌써 목요일.

    예레미야 38장. 예레미야가 근위대 뜰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갇히게된 경위 이야기. 침략군과 필사의 농성전을 펼치고 있는 성내에서 병사들에게 투항을 선동했으니 군은 당연히 그 행위를 간첩 또는 내통 행위로 보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예언자를 맘대로 죽일 수는 없어 왕의 허락을 얻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죽음의 문턱에서 벗어나 보호받던 그에게 왕이 찾아와 미래를 묻지요.

    투항만이 자기와 가족, 그리고 예루살렘성의 파멸을 줄이는 최선의 길이라는 대답에 고민하는 왕. 결국 그는 아무 것도 스스로 결단하지 않고 대세 (주전론)을 꾸역꾸역 따라가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아니 그럴 능력도 의지도 없는 꼭두각시 왕의 숙명?

    구름으로 캄캄한 아침. 왠지 마음이 울적합니다. 그래도 오늘이 또 하루 주어진 것을 감사. 호흡이 있어서, 해야할 일이 있고 사랑할 사람들이 있어서. 오늘이라는 기회, 그 기회가 축복임을 깨닫고 찬양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오늘 묵상 말씀처럼 모두의 유익이 내 생각과 결정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그런 인생이 되기를. 실망과 기다림의 시간 속에서도 그 속에 비밀처럼 숨겨져 있는 회복의 약속을 알아보는 영의 눈이 뜨이기를. 아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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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왕조시대의 백성은 초이스가 없었습니다. 사회 공동체 어디쯤에 자기가 위치하는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왕가와 고위층 가문이 정해져 있어서 지도자로 나서고 싶다고 되는 것 아니고, 반대로 지도자 같은거 안하고 싶다고 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류 역사를 시간대별로 나누면 원시-고대-근대-현대 정도로 나눌 수 있겠고, 시대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사건은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 것, 집단 안에서 노동의 분업화를 꾀한 것, 언어와 문화를 발명한 것, 이성과 지성을 연마한 것, 감정과 의지력으로 창조활동을 한 것 등이 대표적인 발전 모티프일 것입니다. 직립인간의 출현을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의 시초로 꼽기도 하고, 도구를 만들어 생존을 이어갔다는 점도 고대 인류의 특징으로 봅니다. 야만과 문명으로 1차 구분을 하고 인간 지성의 발전을 중심으로 중세와 근대를 나눕니다. 지성과 지식이 단계적으로 진화 발전하면서 사회 구조도 변화했는데 광범위하게 보면 종교적, 신학적 강제력 (왕=신)이 지배하는 군사적 사회와 이성과 사업계산 (경제적 이익추구)이 지배하는 산업형 사회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자기가 사는 시대 이전을 상상하고, 그 때의 일을 알 수 있고 교훈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는 기록의 덕분입니다. 동굴의 그림 벽화에서 부터 양피지 두루마리에 이르기 까지 삶의 자취를 기록해 남겼다는 사실보다 더 큰 ‘인류애’는 없을 것입니다. 좋아하는 클래식을 들으면서 작곡가의 악상이 악보로 정리되고 보존되어 나의 시대에 까지 왔다는 ‘기적’ 같은 일에 감동할 때가 많습니다.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예배하면서 기도에 음을 붙여 챈트로 부르는 일은 7, 8세기 경부터지만, 단성음악이던 챈트 보다 좀 더 풍성하고 폭넓은 음악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025년경 이탈리아의 수도승이 특별하게 음표로 표시하고 약속한 악보 기보법 musical notation 덕분이라고 합니다. 사선지에서 오선지로 발전한 것이 11, 12세기 즈음이고, 악보는 음악을 문자처럼 기록할 수 있게 만들어 음악을 보존하고 전파하는 데 혁신적이고 필수적인 방법이 되었습니다. 대량 인쇄기술이 나오기 전까지는 수도원에서 평생토록 (성경) 말씀을 쓰고 그림을 그려 넣고 음표도 적던 수도자들의 인류애가 지금 우리가 누리는 아름다움과 진실의 큰 부분을 이룬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예레미야서로 돌아가, 역사적으로 시대를 구분하자면 구약의 시대 특히 선지자의 시대는 종교적 강제력 아래에 있는 군사적인 사회였습니다. 그 시대의 일반 백성의 사고력이 지금의 우리보다 능력 면에서 떨어진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절대 왕권과 종교 권력의 힘과 지배 밑에 있으면서 창의적이고 다양한 사고를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왕의 지혜와 믿음(신실함)이 절실합니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서 정한 일이라고 해도, 시드기야에겐 자기가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여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최대한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 인류애가 본문에 없습니다. 시드기야 전의 수많은 왕들도 하나님과 백성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뿐입니다. 동물과 거의 구분이 안되는 최초 인간의 때부터 행성에 인간 정착지를 만들겠다는 이 시대, 그 이후도 임마누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세계를 지탱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의 사랑으로 오늘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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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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