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14장: 유다 백성을 위한 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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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예레미야가 활동할 당시 한 때 유다에 심한 가뭄이 들었다. 그로 인해 사람들만이 아니라 식물과 동물까지도 심하게 고통 받았다(1-6절). 예레미야는 그것을, 유다 백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기고, 자신들을 영영 버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한다. 그들의 희망은 그들 가운데 계시는 주님 밖에 없기 때문이다(7-9절). 주님은 심판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10절),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신다(11-12절). 주님은, 백성에게 평화를 예언하는 사람들은 당신과 아무 상관 없다고 하시면서, 그들도 유다 백성과 함께 심판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13-16절).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가올 재앙을 미리 내다 본 자신이 그로 인해 얼마나 아파하는지를 유다 백성에게 전하라고 하신다(17-18절).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향해 호소한다. 주님은 유다 백성을 위해 중보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고, 심판은 돌이킬 수 없다고 하셨지만, 예레미야는 그럴 수 없었다.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백성에 대한 긍휼한 마음 때문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유다 백성의 죄가 심판 받을 만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유다 백성을 심판하지 말아달라고 간구한다(19-22절). 

묵상: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그 사람(들)에 대한 긍휼한 마음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긍휼’이라는 의미의 헬라어는 속이 뒤틀리는 감정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긍휼함을 느낀다는 말은 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낀다는 뜻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을 위해 기도 올리면서 “우리”(7절)라는 대명사를 사용합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죄로 인해 심판 받아야 할 유다 백성과 자신을 하나로 보았습니다. 그렇게 동일화 했기 때문에 그는 유다 백성이 장차 당할 고통을 미리 경험했습니다. 그 고통 가운데 그는 유다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합니다. 주님은 유다 백성을 위해 중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판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에 대한 기도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 대한 끓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나의 기도에는 누가 담겨 있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 줍니다. 중보기도는 응답을 확신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어떻게 사용하실지는 하나님이 정하실 일입니다. 주님은 그분의 큰 계획 안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수도 있고 거절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절도 그분의 응답입니다. 우리 기도의 목적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에게 주님꼐 대한 더 큰 믿음과 사람들에 대한 더 뜨거운 사랑을 주십시오. 저희의 기도 안에 더 많은 이들을 품게 해주십시오. 아멘. 

7 responses to “예레미야서 14장: 유다 백성을 위한 중보 ”

  1. gachi049 Avatar
    gachi049

    세상은 약육강식의 동물적 사회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주님. 새하늘과 새땅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지 안는자, 병든자, 약한자, 어찌할 바를 알지못하는 자들을 위해 끊임 없는 중보기도를 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시옵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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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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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illkim9707 Avatar

    주님의 사랑과 은혜보다 더 큰 피조물이 없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끝없이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수 없다는 주님의 약속을 꼭 붙잡고 있습니다. 비록 마땅히 죽어야 할 인생이지만 그들을 위해 극심한 십자가의 수모와 누명과 고통을 당하신 성자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귐의 소리 식구들이 점점 더 멀리 떠나가는 불상한 인생들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도록 도와 주십시오.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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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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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침 공기가 쌀쌀하더니 갑자기 햇볕이 강해집니다. 목요일. 시간이 참 빠르네요.

    예레미아 14장. 갑자기 주제가 바뀝니다. 북쪽 (바벨론)에서 올 재앙 (유다 정벌)에서 현재 이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재난 (극심한 가뭄)으로 갑자기 바뀌네요.

    사람의 인생에 질병과 결핍, 갈등의 고통이 늘 따르듯 나라와 문명의 역사에는 칼, 기근, 역병이 늘 따르나 봐요. 현대의 문명 국가들은 기근과 역병 대신 불평등과 범죄라는 변형된 병증을 앓지요.

    지금의 가뭄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응보라고 하시는 주. 그리고 그 분께 탄원하며 중보하는 선지자.

    오늘도 메트로를 타고 출근합니다. 간 밤에 잠을 허락하시고 아침에는 깨어 일하러 가게 하셔서 감사. 창밖으로 비치는 아름다운 정경. 이 아름답고 풍요한 나라에 살 수 있게 하심도.

    율법의 저주 아래 죽을 수 밖에 없던 자를 보혈로 씻기시고 왕같은 제사장의 옷을 입히신 분. 그 은혜의 능력을 믿으며 고통 가운데 있는 나라, 이웃, 지체들을 품고 중보하는 오늘이 되기를. 응답하신 기도도 거절하신 기도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결국은 완전한 선을 이루실 것임을 확신하고 삶을 통해 확인하기를. 그런 믿음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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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랍비 조나단 색스가 생전에 쓴 신문 기고문 중에 유대력의 새해를 맞아 쓴 글을 읽었습니다. 그의 글이나 설교에는 유대인은 누구인가, 유대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의 질문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의 글에는 도덕적 책임 moral responsibility 을 지는 삶이라는 표현도 자주 나옵니다. 유대인은 주어진 자유 안에서 책임적인 선택과 결정을 내리며 살 의무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여러 신을 섬기는 이방의 종교 paganism 에서 유일신교로 옮겨오는 과정은 운명 대신 믿음을 선택하는 과정이며 믿음을 선택하는 행동은 곧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로서 도덕적인 책임을 지며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in His image and likeness’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랍비 색스는 우리가 이 표현에 익숙해서 그렇지 실은 꽤 역설적인 말이라고 지적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미지나 모습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공통점은 자유와 책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늘 바른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자유를 선하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질서로 움직이는 우주 안에서 인간은 질서를 깨뜨리는 선택을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높은 기대를 갖고 계시지만 인간은 기대에 못 미치는 행동을 합니다. 조나단 색스 랍비는 하나님의 용서가 이 신학적 딜레마에 대한 ‘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는 하나님의 용서로 가능하다는 뜻이겠지요. 오늘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가 살던 때 실제로 큰 가뭄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땅에 비가 오지 않아 농부도 짐승도 절망 속에 잠깁니다. 실제의 가뭄이든 상징이든 인간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예레미야는 재앙에서 건지신 과거의 여호와를 상기하며 당신은 이스라엘의 희망 (8절)이라고 부릅니다. 구해 달라고,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합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냉정하십니다. ‘이 백성이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라 (11절)’고 차갑게 답하십니다. 교회의 중보기도 팀이 기도하고 있는데 이런 음성이 들리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무섭습니다. 금식을 해도, 부르짖어도, 온갖 제물을 바쳐도 받지 않겠다고 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전쟁과 굶주림과 무서운 병으로 멸망시키겠다는 말씀으로 도장 꽝! 찍는 음성을 들으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고, 고통도 당하지 않고 진정한 평화를 누릴 것이라고 거짓을 말하는 예언자들까지 나서면 (14절) 우리는 그런 혼란과 두려움을 어떻게 감당할까요. 랍비 색스의 말을 빌리면, 우리는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요. 이런 상황에서 도덕적 책임은 어떤 모습일까요. 답이 없습니다. 저울이 이미 기울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무게가 너무 무겁습니다. 예레미야는 간청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모세의 기도와 같습니다- 백성을 미워하지 마시고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깨지 말아 달라고 (21절) 애원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희망 (22절) 이라고 다시 한 번 매달립니다. 이 기도를 들으셨나요? 아니지요. 백성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때가 되자 어김없이 일어납니다.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고 그 땅에서 정해진 기간을 삽니다. 예레미야의 간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은겁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자기의 선택에 책임 지는 모습’은 결국 하나님의 뜻 (심판)이 실현되는 모습과 만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예수님의 구원으로 우리에게 내립니다. 문득, 예레미야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이 슬픔과 애통함으로 가슴을 치며 살았지만 예수님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함께 웃으며 ‘죄인들과 같이 먹고 마시며’ 살았으니 이는 완전히 다른 세상의 그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눈물 속에서 피어난 한송이 꽃 같으신 주님, 감사합니다. 가슴에 희망을 담고 오늘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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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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