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3장 16-18절: 평화와 은혜

2–3 minu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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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마지막으로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전한다. “평화” 즉 “샬롬”은 유대인들의 상투적인 인사말이기는 했지만, 로마의 식민지인 데살로니가에서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당시 로마 제국은 “로마가 주는 평화”(팍스 로마나)라는 이념을 선전하면서 그들의 정복 전쟁을 정당화 했다. 로마 제국의 깃발 아래에 들어와야만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로마 제국의 식민이 되면, 전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위협이 사라졌다고 해서, 평화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일반 소시민들은 로마의 식민이 됨으로 인해 더 불안한 일상을 살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평화의 주님께서 친히 언제나 어느 방식으로든지,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16절)라고 기도하는 것은 로마 제국의 정치 선전에 대한 은밀한 비판이며, 로마가 주는 평화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가 더 우월하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진정한 평화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언제나” 누릴 수 있고, “어느 방식으로든” 얻을 수 있다.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도는 마지막에 직접 친필로 인사말을 쓴다(17절). 사도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편지에 서명하는 표”다. 사도는 마지막으로 그리스-로마식의 인사말(“은혜”)로 편지를 마무리 한다(18절). 다만, 그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  

묵상:

오늘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이념은 무엇일까요?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에 사용했던 구호(“바보야, 문제는 경제야”)가 우리 시대의 이념을 가장 잘 담아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평화(전쟁의 부재)라고 선전한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돈이라고, 먹고 사는 문제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먹사니즘”이라는 말도 들립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사실, 로마 제국이 선전한 평화나 신자유주의 시대가 선전하는 경제나,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동일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다운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물리적 조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전쟁과 가난은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위협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위험 없이 넉넉히 먹고 사는 것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확보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는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마 4:4). 로마가 선전하는 평화도, 신자유주의가 선전하는 경제도, 알고 보면, 매우 기만적입니다. 인간 존재의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로마가 주는 평화도, 신자유주의가 약속하는 경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살려는 인간의 불신앙이요, 그로 인해 발생한 인간성의 파괴이며, 그 결과로 생겨난 현실 지옥입니다. 바울 사도가 편지를 쓸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라고 기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평화”라는 말로 기대한 모든 것 그리고 그리스-로마인들이 “은혜”라는 말로 기대한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진리의 주님, 세상 선전에 속지 않게 해주십시오. 평화의 주님, 세상이 약속하는 평화에 현혹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신 주님, 물질주의에 사로잡히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님 안에서 참 평화를 누리고 자족하는 비결을 배워 세상을 이기게 해주십시오. 아멘.    

5 responses to “데살로니가후서 3장 16-18절: 평화와 은혜”

  1. bull9707 Avatar
    bull9707

    함께하시겠다는 Immanuel 하나님, 그의 얼굴을 택하신 민족에게 향하시고 평화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은혜의 주님을 등지고 Pax Americana 와 타락한 천사 Mammon 을 따르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저희들에게 축복과 지키시기를 원 하시며 그의 얼굴을 저희들에게 비치시고 은혜 베프시기를 원 하시며 그의 얼굴을 우리들에게 돌리시고 평화를 주시기를 원하시는 창조주 하나님 사랑안에서 사는 믿음의 식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진정한 평화는 오직 전지 전능의 하나님으로 부터 인것을 세상에 알리면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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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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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직도 허리케인의 영향이 남아 먹구름이 어둡게 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신을 마무리하는 사도의 인사. Wishing and looking forward to…Yours truly에 해당하는 부분이겠지요?

    고난에 값에 비해 성과가 미미해보이던 바울의 전도 여행. 마침 그 때 기적 같이 나타난 데살로니카 교회. 그 소중한 선물에 대한 깊은 애착의 마음을 담아 사도는 최고의 평화, 촤상의 은혜를 축원한 듯 해요.

    평화의 주. 갈등과 혐오로 찢기운 이 시대 속에서도 우리들의 교회를 그리고 보잘 것 없는 저희 인생을 평화의 도구로 써주셨으면.

    은혜의 주. 오늘도 저를 죄의 올무에서 건져주시고 주홍같이 붉은 제 죄를 눈보다 희게 씻어주시길. 재림의 때가 올 것을 믿으며 항상 깨어있게 하시고, 성령님의 조명 아래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게 하시길.

    손잡아 주세요. 함께 걸어주세요. 슬픔 많고 힘겨운 이 광야를. 아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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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2008년에 아카데미상을 비롯해 각종 영화상을 휩쓴 미국영화가 있습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입니다. 내용은 상당히 폭력적이지만 제목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영화상을 쓸어 담지 않았어도 영화 매니어나 일반인이나 기억하며 이야기 했을 법한 영화입니다. 영화 제목은 원작자인 코맥 매카시 Cormac McCarthy가 빌려온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의 ‘Sailing to Byzantium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으로의 항해’라는 시의 첫구절이랍니다. 예이츠는 이 시에서 유한한 현실의 관능에 사로잡힌 젊은이들의 세계를 떠나 지성과 영원을 상징하는 비잔티움으로 가고자 하는 노인 (예이츠 본인이 60세 좀 넘었을 때 썼습니다)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예이츠는 정신과 육체, 예술과 현실, 무한한 지성과 유한한 시간 등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초기의 콘스탄티노플 (비잔티움)이 종교와 예술과 실제의 생활이 일체를 이루며 예술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과 함께 했던 사회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비잔티움으로 가고자 하는 노인은 이상과 영원을 동경하는 사람을 대신합니다. 바울의 편지를 읽는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영화 제목이 생각난 것은 실제로 ‘노인’이라는 약자가 살아가기에 더더욱 각박해진 현실 때문이고, 노인 뿐 아니라 모든 이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는 나라/사회/체제란 없다는 단호한 결론 때문입니다. 나라의 복지 정책을 논할 때 이 영화 제목이 단골로 나온다는 말도 농담으로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노인은 늘어나는데 이를 감당할 인프라는 부족해 보입니다. 자원이 부족한 게 아니라 자원의 분배가 문제라는 말도 합니다. 어찌됐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올해 1월에 백악관 주인이 바뀌면서 ‘한 (사람의) 노인을 위한 나라’가 된 것 같은 씁쓸함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팍스 로마나 대신 팍스 아메리카나를 외치지만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역시 진행형입니다. 교장실에 불려온 부모들처럼 대통령 책상 앞에 둘러앉은 유럽의 정상들 사진을 보면서 경멸인지 연민인지 한탄인지 모르겠는 감정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바울의 시대는 이보다 더 우울했겠지요. 기득권이라면 별 탈이 없겠지만 일반 로마 시민도 나름 어려움이 있었을겁니다.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황제 권력의 목표라면 그 부담은 시민이 떠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흉흉한 소문과 신화와 새로운 사상이 산사태가 나서 내려오는 흙탕물처럼 거침없이 쏟아졌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 예수를 믿는 소수의 사람들은 어찌 살았겠습니까. 이 세상에선 소망이 없고 죽어서 가는 내세에 소망을 걸었겠지요. ‘비잔티움’으로 가고 싶은 노인의 심정은 이미 그 당시 교인들 사이에도 교감이 되었겠습니다. 재림의 신앙이든, 영원을 희구하는 인간의 본성이든 ‘여기’를 떠나 ‘저기’로 가고자 하는 마음은 다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여기와 저기 사이에 십자가가 있음을 봅니다. 예수가 여기와 저기를 이어줍니다. 성령이 여기에서 저기로 우리를 옮겨 줍니다. 여기와 저기는 물리적 이동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이 마지막 숨을 쉬고 공간이동을 해서 하나님의 품에서 깨어나는 상상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기와 저기는 우리의 가치와 판단이 주님을 따라 같이 이동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바울의 평화의 인사는 어느 시대, 어느 계급, 누구에게나 고마운 안부입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평안을 내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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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gachi049 Avatar
    gachi049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먹고 살만하니 마치 인간들은 자신만이 이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불순한 착각속에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을 언제, 누가, 어떻게, 왜, 무엇때문에 만들었는지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즉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에서 함께살기를 원하시고 하나님됨을 알게하셨지만 세상에서 온갖 사악한 죄와 같이 삶을사는 백성을 그냥 두시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구원 받는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주님은 평화의 주로서 주님께의지하는 사람에게 평화와 은혜속에서 살게하십니다. 주님. 주신 평화 속에서 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믿음의 공동체와 성령께서 동행하시어 도와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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