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5장 16-22절: 성령에 대하여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사도는 믿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그것이다(16-18절). 여기에 사도는 세 가지의 수식어(“항상”, “끊임없이”, “모든 일에”)를 덧붙인다. 기뻐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기뻐하는 것, 항상 기도하는 것 그리고 감사할 수 없는 조건에 처할 때에도 감사하는 것이 믿는 이들에게 기대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18절) 가능한 일이다.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19절)라는 말은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들을 비판하거나 억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뜻이다. 사도는 신비주의나 열광주의의 위험을 경계하면서도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추구하라고 권한다. 성령 충만을 구하는 사람들은 늘 열광주의와 신비주의로 흐를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반면, 그것을 너무 경계하다 보면, 성령을 억압하고 소멸하는 결과에 이른다. 인간이 성령을 억압하거나 소멸할 수 없다. 억압하고 소멸하는 대상은 본인 자신의 영성이다. 

사도는 “예언”의 은사를 예로 들어 설명을 이어간다(20절). 예언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개인이나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문제는 성령의 영감을 받지 않은 사람이 감정적인 고조 상태에서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경우다. 악의적으로 예언을 받았다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문제 때문에 예언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예언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도는, 예언의 은사를 억압하지 말고 분간하라고 가르친다(21절). “분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도키마조’는 “시험하여 진위를 확인하다”라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한다 할 경우, 받는 사람들은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좋은 것”)만을 취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든 모양의 악을 멀리해야 한다(22절).

묵상:

“저는 예수 믿는 것은 좋은데, 성령 받기는 싫습니다.” 오래 전, 은사 운동이 우리 지역을 혼란스럽게 할 때 어떤 교인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구한다는 사람들이 보인 열광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행태로 인해 나온 반응입니다. 신유, 방언, 예언, 입신 같은 현상에 더하여, 설교자가 안수하면서 사람을 쓰러뜨리는 일, 하늘에서 금가루가 쏟아지게 하는 일, 멀쩡한 치아가 금색깔로 변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현상들은 사람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합니다. 그런 것에 현혹되면 이성을 잃고 더 신기한 현상을 추구하게 되어 있고, 온갖 추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것에 몰두한 사람은 천국을 사는 것 같은 기분인데, 곁에서 보는 사람에게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입니다. 

신비주의와 열광주의의 문제는 초대 교회부터 늘 있었던 일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더 많았습니다. 그런 현상을 보면 위험을 느끼고 억압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엄격한 이성주의와 율법주의도 초대 교회부터 늘 있었던 또 다른 극단입니다. 지금도 스스로를 보수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교파들 중에는 방언이나 신유 같은 은사까지 부정하고 모든 유형의 성령 운동을 금지하는 교단이 있습니다. 대다수의 교회들은 두 극단 사이에 위치하는데, 성령 운동에 관한 한 균형을 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는 두 극단 사이에 서는 위험을 감수하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고, 성령을 받아야만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12:3).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 중에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되고, 그럴 때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늘 기도하며 언제나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근본적으로 성령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로 모일 때 성령의 임재에 예민해야 하고,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사모해야 합니다. 다만, 그 열정에 매몰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사도는 ‘도키마조’라는 동사를 자주 사용하는데,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인지를 시험하여 확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영적 사술에 넘어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기도:

오늘도 성령의 충만을 구합니다. 저희의 말과 행실을 통해 성령의 은사가 드러나게 하시고, 성령의 열매가 저희의 인격으로 드러나게 해주십시오. 저희의 공동체 안에 성령의 임재가 드러나게 하시고, 모든 지체가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6 responses to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22절: 성령에 대하여 ”

  1. billkim9707 Avatar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며 어려울때에도 감사하여야 하는것을 알면서도 많은 시간을 그렇게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오직 성령의 인도를 간구합니다, 냉정한 분별력 뜨거운 마음 순종하는 손과발을 원합니다.

    개인의 기쁨과 감사의 기도가 않이고 모든 가족 모든 교인 모든백성이 다함께 기뻐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시간이 오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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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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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구름이 낮게 깔리고 습도가 놓은 수요일 아침입니다. 벌써 한 주의 허리네요.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항상 기쁨, 쉼 없는 기도, 범사에 감사에 대한 요절. 그리고 성령충만에 대한 균형적인 태도를 다루고 있어요.

    교회의 어떤 자매. 깊은 질고의 강을 건너며 깨달았다지요? 이 절망의 심연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겠니? 감사할 수 있겠니? 그 불가능한 질문에 네 하고 대답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행하는 것이 바로 자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성령의 권능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마음이 가능할지요? 그런 마음 앞에서는 죽음의 쏘는 침이 정말로 힘을 잃을 것 같아요. 그런 마음 안에서는 죽음의 커튼은 이미 걷어내졌고 찬란한 부활이 미리 성취되는 것은 아닐지요?

    제 마음에도 성령의 불이 임하시면 좋겠어요. 성소 안 어둠을 밝혀주는 금촛대의 불빛처럼.

    성령의 빛이 비출 때 의심과 낙망, 상실과 원망, 비교의식과 열등감. 그 모든 어둠이 밀려나고 기쁨과 감사가 내 영혼에 환히 비춰지기를. 아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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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오늘 본문을 읽고 성령에 대해 묵상합니다. 성령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순복음교회에 열심히 나가던 분한테서 였습니다. 우리집에 가끔 들렸는데 그분 딸이 나와 동갑이라 같이 오면 함께 놀기도 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방언 기도를 한다’고 했습니다. 방언 기도는 그분 전에 다른 사람이 하는걸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방언 기도가 ‘진짜’ 기도라고 했고, 믿음이 좋아야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아야 방언 기도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에 대한 최초의 프레이밍 framing 이었습니다. 요즘에 프레이밍이라는 말을 할 땐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사안을 꾸며서 대중에게 알리는 방식이라는 뜻으로 씁니다. 같은 정보라도 제시하는 방식 (프레임-액자)에 따라 청중의 인식과 판단이 달라지는 심리학적 현상입니다. 성령을 방언 기도와 직접적으로 연결한 프레이밍이 나를 평생토록 따라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방언 기도와 한 세트로 소개되는 것이 병 고침의 은사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방언으로 기도하게 되고, 병을 고치는 은사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는’ 일이 단순하지 않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만사 제쳐놓고 교회나 기도원에 가서 며칠이라도 -성령 받아 방언이 터질 때까지- 철야기도를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결국 누구나 성령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 됩니다. 그 이후 방언 기도를 하는 사람들 중에 방언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방언이 터졌다고 하기도 하고, 무슨 기도였냐고 물으면 본인도 모른다거나 그 사람에게만 주시는 비밀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요즘엔 방언 기도를 안한다’는 말을 하기도 해서 본인 의지에 따라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는가보다 생각하곤 했습니다.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 방언 기도 얘기가 꼭 나오곤 했습니다. 방언 할 줄 아는지 손들어 보라고 하는 목사님도 있었습니다. 요즘엔 교회에서 방언을 대표로 하는 ‘은사’ 이야기가 거의 전혀 없습니다. 3년쯤 전인가 애스베리 신학교에서 일어난 성령 부흥운동에 대한 후속 기사들을 찾아 봤더니 당시의 기사 외엔 별다른 것이 뜨지 않습니다. 감리교단의 분리를 놓고 양쪽의 주장이 정점에 달하던 때의 일이었던 점도 그렇고, GMC 새교단 설립에 앞장 선 목사님이 그곳을 찾아가 현장 분위기와 성령의 활동을 전하던 것을 떠올리면, 또 당시 그 학교에 다녀도 부흥회에 참가하지 않았던 학생들의 생각을 정리한 글을 찾아 읽어보면 성령을 옹호하고 따른다고 하는 일들이 성령을 이용해 자기를 부풀리는 일로 변질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신자들에게 은사를 구하고 성령의 인도에 맡기라고 격려하기 위해 쓴 것 같습니다. 공동체의 선을 위해 자기의 주장을 삼가고 성령의 뜻을 먼저 구하라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성령은 개인 기도에 쓰는 방언 -알 수 없는 언어-이나 병 고침의 이적 -상대방의 몸이 엑스레이로 보듯 보이는 성령을 받은 사람도 있다고 하지요-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바울의 편지가 담은 사실이 무엇이든 독자의 해석이 중요하니 성령을 받아 방언 기도를 해야 진짜 기도를 하는거라는 사람이나 방언 성령만 받아서는 안되고 통변의 은사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성령에 대한 나의 첫 이해가 성령을 부인하거나 소멸하는 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까 두려울 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믿었는데, 권사인데, 방언 기도 할 줄 모르니 창피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성령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내 믿음이 전부인 것처럼 여길 때가 도리어 성령을 제한하고 부인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을 느끼고 아는 능력을 잃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의 은혜라고 고백이 터져 나올 때가 있습니다. 주께서 응답하신 것이라고 소리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성령께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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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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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gachi049 Avatar
    gachi049

    성경에서는 성령님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를 가지신 인격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믿는자와 영원히 함께하시고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 이십니다(요한복음 14:16,26). 즉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고전 2:9)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믿는 자에게 주신 영혼을 통하여 성령께서 일거수 일투족을 감찰하시니 감사합니다. 내안에 성령께서 왕으로 오셔서 분별력을 주심을 통해 세상의 쾌락, 사탄의 유혹등으로 인하여 성령님을 근심케하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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