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1장 1-11절: 불의한 제도 안에 깃든 하나님의 은총

3–4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21장부터 23장까지의 내용은 나중에 ‘언약의 책'(24:7)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여러 가지 율법 규정이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 율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한 정의를 내리신다. 이혼에 대한 율법(신 24:1)을 논하면서 예수님은,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막 10:5)라고 말씀하신다. 즉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주어진 생활 지침이다. 인간에게 기대할 “최상의 기준”이 아니라 인간이 지켜야 할 “최하의 기준”을 제시하신 것이다. “너희가 죄를 범하지 않고 살 수는 없으나 이 선은 넘지 말라”는 뜻이다. 

모세 당시 노예 제도는 당연한 사회 관습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이 만들어 낸 불의한 제도이므로 때가 되면 철폐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 수준이 아직 그 정도로 깨이지 않았으므로, 잠정적으로 노예 제도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하는 편을 택해야 했다.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다 보면, 동족 히브리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 분명했다. 주로 채무를 갚지 못할 때 그런 일이 발생한다. 그럴 경우 하나님은, 일곱째 해 즉 안식년에 몸값을 요구하지 말고 자유인으로 풀어 주도록 명령하신다(2절). 

노예 방면의 원칙은 노예가 될 당시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3절). 독신으로 노예가 되었으면 독신으로 나가고, 결혼한 상태에서 노예가 되었으면 그 상태로 나가면 된다. 독신으로 노예가 되었는데, 주인이 여종을 아내로 주어 결혼하고 자녀들을 낳았을 경우, 종은 가족을 두고 혼자 나가야 한다(4절). 여종과 그 자녀들은 주인 소유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종이 가족과 함께 살기를 선택할 경우, 주인은 절차를 거쳐 그를 영구한 노예로 삼을 수 있다(5-6절). 

“남의 딸을 종으로 샀을 경우”(7절)는 채무를 갚을 수 없어서 딸을 채권자의 첩으로 내어 주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럴 경우에는 안식년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첩과 노예는 신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채권자의 마음이 변하여 그 여인과 같이 살기를 원치 않으면, 몸값을 얹어서 그 여자의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지,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 “외국인”(8절)은 “다른 사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 여종을 아들에게 첩으로 주었다면, 그를 딸처럼 대해야 한다(9절). 

채무 관계로 인해 여종을 첩으로 두었을 경우, 주인은 여종에게 침식을 제공해야 하며, 부부 관계의 의무도 충실히 행해야 한다(10절). “그는 그의 첫 아내에게”라는 번역은 “그는 그 여종에게”로 수정되어야 한다. 11절의 “그의 첫 여자에게도”라는 번역도 오역이다. 10절과 11절은 첩으로 받아들인 여종에 대한 물질적, 인간적 의무를 다하라는 요청이며, 그것을 원치 않으면 몸값을 요구하지 말고 자유하게 풀어 주라는 명령이다. 

묵상:

구약의 율법 규정을 읽다 보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가 틈틈이 보입니다. 인간의 죄성이 만들어 낸 악한 제도와 관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약자들이 강자들에게 한없이 유린 당하지 않게 하는 지침들이 보입니다. 채무로 인해 남성이 노예가 되었을 경우, 안식년에 몸값 없이 풀어 주라는 것도 그렇고, 여성 노예를 첩으로 들였을 때는 정당한 대우를 해 주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 여종과 더 이상 같이 살기를 원치 않을 경우에는 몸값을 얹어서 친정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규정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우리는 율법이 마땅히 닿아야 할 지점에 한 참 못 미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믿기에는 정의 의식이 너무도 미개해 보입니다. 노예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도 그렇고, 일부다처제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런 규정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좀 더 급진적일 수 없었을까? 당시 사회에서 당연하게 취급되고 있던 노예 제도와 일부다처 제도 그리고 남성중심적인 제도를 철폐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도덕 의식에는 너무도 높은 기준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초등학생에게 대학생의 기준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시 사고방식과 사회적 관행을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정의와 은혜의 숨구멍을 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기준도 중요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에 준비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읽으면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고, 그 답답함은 우리로 하여금 메시아를 소망하게 합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계시를 갈망하게 하고 소망하게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율법을 읽는 이유입니다.

기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저희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지난 시대에 낮은 도덕 의식과 불의한 제도로 인해 억압받고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오늘 저희가 이만큼 정의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불의한 제도와 관습이 많습니다. 그 불의한 제도와 관습 안에 살고 있는 저희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어, 불의 가운데 정의를 실천하게 하시고, 거짓 가운데 진리를 행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responses to “출애굽기 21장 1-11절: 불의한 제도 안에 깃든 하나님의 은총”

  1. billkim9707 Avatar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남존여비 노예제도 일부다처 빈부귀천을 심지어 선진국에서도 암암리에 볼수있는 현실입니다. 소외된자들과 함께하시고 배려하시는 사랑과 은혜와 공의의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진정한 정의과 공평은 오직 새하늘과 새땅에서만 이루워지는것을 믿는 소망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마라나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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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chi049 Avatar
      gachi0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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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율법이 인간의 최하의 기준이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활이 얼마나 완악하고 문란한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만약 율법을 최상의 기준으로 정하였다면 과연 살아남을 백성이 있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회초리 보다 스스로 변화하기를 기다리시며 최소한의 숨을 쉴 수있도록 은혜를 베프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강력한 율법이아니라 사랑의 율법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율법을 숨이 멎는 그날까지 지키며 살아 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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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새벽에 잠이 깨어 나쁜 습관인 줄 알면서도 들여다본 폰으로 엘에이에 해병대까지 투입되었다는 뉴스를 읽었습니다. 시위 현장의 보도나 엘에이 경찰측 설명을 봐도 시위진압에 주방위군을 동원해야 할 정도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정부는 해병대까지 보내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국내 상황에 군인을 투입할 때는 확고한 명분과 근거가 있어야 할텐데 불법체류자를 색출한다고 불법하고 비인도주의적인 방법을 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토요일에는 칼팩 연회 감독의 이메일도 받았습니다. ‘이민자들의 보호 Care of the Immigrants’ 라는 이메일에서 감독은 자신이 이민자의 딸이요, 엘에이 또한 미국의 여러 도시들처럼 이민자의 땀과 수고로 이룬 삶의 터전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어려움에 놓인 이들과 마음을 함께 하자고 호소합니다. 현장의 시위자들에겐 평화롭게 행동할 것을 부탁하고, 이민단속반은 무기를 쓰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우리 가게가 있는 동네는 라티노 주민들의 인기 주거지입니다. 가게 손님들 중에도 체류 신분이 불분명한 경우가 있겠지만 내가 매일 보는 손님들은 자녀들 먹이고 입히느라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거의 전부입니다. 법의 눈으로는 불법으로 와서 용케 단속을 피해 살다 애 낳고 ‘온갖’ 혜택 누리면서 사는 잠재적 범죄자일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궂은 일 험한 일 마다않고 열심히 하면서 자식들은 나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부모로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종으로 취한 동족 히브리인들을 대하는 규정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제단에 대한 규정 다음에 나오는 것이 종에 대해서라는 점이 참 특이합니다. 이 순서의 논리는 뭘까요. 여기 청중이 종으로 살다 풀려났다는 점에 논리의 시작이 있지 않을까요. 너희도 종이었음을 잊지 말라는 캡션이 달린거 아닐까요. 말씀의 중심은 종에게 자비를 베풀고 자유를 허락 하라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한 번 종은 영원한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20년쯤 전에 여선교회 세미나에서 인신매매 human trafficking, 현대 노예제도 modern day slavery, 성노동자 sex workers 이런 단어들을 들으면 뭐라 말할 수 없이 불편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여성을 납치해 섬에 가두고 강제 노동을 시킨다는 ‘전설’ 같은 소리를 듣긴 했어도, 정말? 이러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요즘 같은 세상에 노예가 있다고? 성매매를 하는게 자기들 잘못이 아니라고?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이런 이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믿음이 교회라는 온실에서 가꾸는 화초가 아니라는걸 깨닫기 까지 불편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안에 또렷하게 인쇄된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불편하고 불안한 시간을 지나는 동안 보고 듣고 느끼는 여러 가지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크게 와 닿기도 하고, 스치듯 지나가는 중에 느끼기도 합니다. 직관처럼 알 때도 있고, 여러 번 곱씹어도 잘 모르겠는 때도 많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이런 모습을 아실 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모자라고 흠 많은 나를 용서해 주시고 어려운 때일수록 겸손한 마음으로 살도록 도와 주세요. 우는 이들, 두려움에 떠는 어린이들을 지켜 주세요. 타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자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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