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21장부터 23장까지의 내용은 나중에 ‘언약의 책'(24:7)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여러 가지 율법 규정이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 율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한 정의를 내리신다. 이혼에 대한 율법(신 24:1)을 논하면서 예수님은,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막 10:5)라고 말씀하신다. 즉 율법은 인간의 죄성을 전제한 상태에서 주어진 생활 지침이다. 인간에게 기대할 “최상의 기준”이 아니라 인간이 지켜야 할 “최하의 기준”을 제시하신 것이다. “너희가 죄를 범하지 않고 살 수는 없으나 이 선은 넘지 말라”는 뜻이다.
모세 당시 노예 제도는 당연한 사회 관습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죄성이 만들어 낸 불의한 제도이므로 때가 되면 철폐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의식 수준이 아직 그 정도로 깨이지 않았으므로, 잠정적으로 노예 제도를 그대로 둔 상태에서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하는 편을 택해야 했다.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다 보면, 동족 히브리 사람을 노예로 삼는 경우가 발생할 것이 분명했다. 주로 채무를 갚지 못할 때 그런 일이 발생한다. 그럴 경우 하나님은, 일곱째 해 즉 안식년에 몸값을 요구하지 말고 자유인으로 풀어 주도록 명령하신다(2절).
노예 방면의 원칙은 노예가 될 당시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3절). 독신으로 노예가 되었으면 독신으로 나가고, 결혼한 상태에서 노예가 되었으면 그 상태로 나가면 된다. 독신으로 노예가 되었는데, 주인이 여종을 아내로 주어 결혼하고 자녀들을 낳았을 경우, 종은 가족을 두고 혼자 나가야 한다(4절). 여종과 그 자녀들은 주인 소유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종이 가족과 함께 살기를 선택할 경우, 주인은 절차를 거쳐 그를 영구한 노예로 삼을 수 있다(5-6절).
“남의 딸을 종으로 샀을 경우”(7절)는 채무를 갚을 수 없어서 딸을 채권자의 첩으로 내어 주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럴 경우에는 안식년 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첩과 노예는 신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채권자의 마음이 변하여 그 여인과 같이 살기를 원치 않으면, 몸값을 얹어서 그 여자의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지,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는 안 된다. “외국인”(8절)은 “다른 사람”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 여종을 아들에게 첩으로 주었다면, 그를 딸처럼 대해야 한다(9절).
채무 관계로 인해 여종을 첩으로 두었을 경우, 주인은 여종에게 침식을 제공해야 하며, 부부 관계의 의무도 충실히 행해야 한다(10절). “그는 그의 첫 아내에게”라는 번역은 “그는 그 여종에게”로 수정되어야 한다. 11절의 “그의 첫 여자에게도”라는 번역도 오역이다. 10절과 11절은 첩으로 받아들인 여종에 대한 물질적, 인간적 의무를 다하라는 요청이며, 그것을 원치 않으면 몸값을 요구하지 말고 자유하게 풀어 주라는 명령이다.
묵상:
구약의 율법 규정을 읽다 보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가 틈틈이 보입니다. 인간의 죄성이 만들어 낸 악한 제도와 관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약자들이 강자들에게 한없이 유린 당하지 않게 하는 지침들이 보입니다. 채무로 인해 남성이 노예가 되었을 경우, 안식년에 몸값 없이 풀어 주라는 것도 그렇고, 여성 노예를 첩으로 들였을 때는 정당한 대우를 해 주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 여종과 더 이상 같이 살기를 원치 않을 경우에는 몸값을 얹어서 친정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규정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우리는 율법이 마땅히 닿아야 할 지점에 한 참 못 미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답답함을 느낍니다. 이 율법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믿기에는 정의 의식이 너무도 미개해 보입니다. 노예 제도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도 그렇고, 일부다처제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런 규정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좀 더 급진적일 수 없었을까? 당시 사회에서 당연하게 취급되고 있던 노예 제도와 일부다처 제도 그리고 남성중심적인 제도를 철폐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도덕 의식에는 너무도 높은 기준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초등학생에게 대학생의 기준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시 사고방식과 사회적 관행을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정의와 은혜의 숨구멍을 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기준도 중요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에 준비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읽으면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고, 그 답답함은 우리로 하여금 메시아를 소망하게 합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계시를 갈망하게 하고 소망하게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율법을 읽는 이유입니다.
기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저희가 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지난 시대에 낮은 도덕 의식과 불의한 제도로 인해 억압받고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의 희생으로 오늘 저희가 이만큼 정의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불의한 제도와 관습이 많습니다. 그 불의한 제도와 관습 안에 살고 있는 저희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시어, 불의 가운데 정의를 실천하게 하시고, 거짓 가운데 진리를 행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Leave a reply to billkim9707 Cancel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