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2장 1-11절: 시험삼아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전도자는 “시험삼아”(1절) 여러가지를 시도해 본다. 참된 만족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기 위함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도 허무한 일이었다. 그 어떤 것도 잠시 즐거움을 줄 뿐, 진정한 만족은 없었다(2절). 

그는 술에 탐닉해 보기도 했다(3절). 술 취함이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거대한 토목 공사를 해 보기도 했고, 포도와 여러 과일 나무 재배에 공을 들여 보기도 했다(4-6절). 남녀 종들을 두고 가축을 길러 보기도 했고(7절), 여러 나라에서 보물을 수입해 보기도 했으며, 수 많은 궁녀와 처첩을 거느리기도 했다(8절). 그 결과, 그는 역사 상 가장 큰 세력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고, 지혜의 왕으로 알려졌다(9절). 

그는 인간으로서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고,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 누려 보았다. 그 모든 것은 그가 수고하여 얻은 것이고, 자랑할 만한 것이었다(10절). 하지만 이제 돌이켜 보니, 자신이 인생이 바람을 잡으려고 몸부림 친 것과 같았다(11절). 어떤 것도, 잠시 동안 기쁨을 줄 뿐, 오래도록 만족을 주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묵상:

2017년, 뉴욕패션윅 인터뷰에서 영화배우 짐 캐리가 자신이 누리고 있던 인기와 부와 특권에 대해 “여기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풍성하게 누려 본 사람이 “내가 해 봤는데, 별 의미 없어!”라고 말할 때, 그것을 누려 보지 못한 사람은 은근히 화가 납니다. 헛되고 덧없다 해도 한 번 누려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없는 사람에게는 그 모든 말이 가진 자의 한가한 고백처럼 들립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흔히 추구하는 일들(쾌락, 부, 명예, 성취, 지식 등)은 만족과 안전과 편리를 제공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런 것을 누리는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전도자가 그런 것들을 누려 보았어도 헛되더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런 것이 모두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서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을 얻지 못하겠더라는 뜻입니다.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은 “해 아래에” 있는 것들에서는 발견할 수 없더라는 고백입니다. 그것은 “해 위에서” 즉 하나님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잠시 동안 갈증을 해갈시켜 주는 진정제일 뿐입니다. 모든 진정제에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진정제는 잠시 쓰고 말 약이지, 치료 목적으로 사용할 약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경우, 결국 중독에 빠져 파멸을 당하게 됩니다. 

따라서 어리석음 중 가장 큰 어리석음은 인생에서 성취할 수 있는 어떤 것에서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는 태도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허무함의 쓰디 쓴 맛을 보고 “모든 것이 헛되더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온전한 기쁨과 안식과 만족을 하나님에게서 얻고 매일 주어지는 하루치의 수고와 만족을 겸손히 받아 누리는 것이 진정한 삶의 지혜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과 그 결과에서 만족을 찾지 않습니다. 이미 충분한 만족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님 안에서 만족을 얻었다고 말하면서도, 저희 안에는 이 세상의 것들로 더 큰 만족을 누리고 싶어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더 많이 가지면 더 많이 누릴 것처럼 착각하곤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품을 더욱 깊이 파고 듭니다. 아멘. 

3 responses to “전도서 2장 1-11절: 시험삼아”

  1. gachi049 Avatar
    gachi049

    더 즐기고 더 많이 가지려고 더 경험하고 싶은 욕망의 늪 속에 빠지면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됨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는 교만이 가득 찬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주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주신 것에 만족하며 이타적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께서 믿음의 공동체와 동행하시고 인도해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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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illkim9707 Avatar

    세상에서 추구하는 쾌락과 권세와 명예와 욕심에는 끝이 없고 한계가 있고 한순간의 만족 후에는 멸망이 기다리고 있는것을 8 학년 6반 그것도 뒷자리에서 배우고 있는 형편 입니다, 너무나 어리석고 계으른 삶을 살아온 영혼을 사랑의 십자가로 은혜를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부터라도 영원한 만족, 세상이 줄수없는 안식은 오직 사랑의 주님안에서 만인것을 기억하고 주님이 내안에 내가 주님안에서 거하며 알차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걸작품 포도나무 가지가 되는 사귐의 소리 식구 모두가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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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저마다 행복의 조건이 같지 않을지라도 행복에 대한 이해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각 언어마다 ‘행복’이라는 단어가 있는지 에이아이에게 물어봤더니 아니라고 합니다. 전세계에 7천여개의 언어가 있는데 ‘엄마’와 ‘아빠’라는 말은 필요에서 나온 공통 언어의 예이고, 티와 커피, 택시, 피자, 샴푸 같은 단어들은 국제 무역과 문화 교류로 인해 지구촌에 다 퍼진 단어의 예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행복은 공통 어휘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행복을 완전정복 -행복의 근원, 발견, 조건, 유지와 보수 등등-하지 못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의 연구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발견 가운데 하나가 행복은 강도 intensity 보다 빈도 frequency 가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행복하다는 경험은 강렬한 하이라이트 몇 장면이 아니라 잔잔하고 훈훈한 순간들이 모인 데서 온다고 합니다. 작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평안하고 온화한 감정을 자주 경험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겁니다. 지혜자가 쾌락이나 성공에서 오는 만족도가 헛되더라고 말하는 것도 만족감이 결국 소진되고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사라집니다. 행복한 상태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지혜자는 행복이 없다는게 아니라 오래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오래 가도록 붙들어 매려는 노력 또한 소용 없다는 말이겠지요. 행복의 약점은 집착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의 적은 콘트롤입니다. 바람과 같은 행복을 내 손으로 잡아 병 안에 가둬 놓고 원할 때마다 꺼내어 음미하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행복은 길들일 수 없고 정복할 수 없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일반인이 아닙니다. 1장 1절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던 설교자’라고 밝힙니다. 2장 1절에서는 쾌락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시험적으로 마음껏’ 즐겼다고 밝힙니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데까지 해 봤다는 뜻입니다. 그런 뒤의 발표가 헛되더라 입니다. 안되더라 입니다.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는 뜻일까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철저하게 무능한 존재라는 뜻일까요. 서론은 그래 보입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다 그만 두고, 생각 없이, 감정 없이, 살라는 말 같습니다. 아니지요. 아니겠지요. 세상과 사람의 창조 스토리에서 인간 아담은 다른 창조물과 구분되는 행동을 합니다. 창조주는 모든 짐승과 새를 아담에게 이끌고 가셔서 그가 그것들의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 보셨다 (2:19)고 합니다. 이름을 짓는 것은 관계의 시작입니다. 나와 너의 시작입니다. 아담은 주께서 지으신 동물과 새들을 자기의 일부로, 자기 세계 안으로 데리고 들어옵니다. 이름을 붙여 각각의 자리를 만들어준겁니다. 사람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인생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 아닐까요. 나와 너의 관계가 시작하면 나의 객관화도 시작됩니다. 나의 자리를 너와 함께 나누는게 가능해집니다. 인생에 나의 행복 뿐 아니라 너의 행복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 아닐까요. 기쁨과 행복이 가능하다고 믿고 싶습니다. 전도서에 분명 삶의 의미와 행복이 있으리라는 기대를버리지 않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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