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1절)이라는 말에서 독자는 솔로몬을 생각한다. “전도자”는 ‘코헬렛’의 번역이다. 전도자는 “헛되다”는 말을 다섯 번 반복한다(2절). “헛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벨’은 ‘숨’, ‘바람’, ‘수증기’를 의미한다. 존재하는 것 같지만 실체가 없는 것, 잡고 싶으나 붙들 수 없는 것, 혹은 의미 있는 줄 알고 잡아보니 의미 없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에서”(3절)는 개역개정처럼 “해 아래”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히브리어로 ‘타하트 하 세메쉬’인데, 이 표현은 전도서에 29회 나온다. “해 아래”라는 표현은 인간 실존의 한계를 상징한다.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의 한계 안에서는 어떤 수고도, 노력도 궁극적으로는 덧없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언제나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세대가 바뀌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고(4절), 계절의 순환과 생명 현상은 무심히 반복된다(5-7절).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다 지쳐 있다”(8절)고, 전도자는 말한다. 인간도, 생명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9절). “새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고(10절). 모든 것은 잊혀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11절).
묵상
2절은 불교적 인생관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석가모니의 제일 가르침은 ‘제행무상'(諸行無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든 존재는 늘 변화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헛되고,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2절부터 11절까지의 전도자의 고백은 불경에서 인용해 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아 보입니다.
그것이 “해 아래”에서의 삶의 본질입니다. “해 아래”라는 말은 인간 실존의 한계를 상징합니다. 우주가 아무리 광대하다 해도 3차원의 물리적 공간입니다. 모든 존재는 1차원 시간의 흐름의 한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 한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주어진 원리에 따라 일어나고 소멸합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만들어 놓고 보면 과거에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것이고, 그 모든 것은 사라지고 잊혀져 버립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다”(8절)는 말은 전도자의 고백입니다. 그는 새로운 무엇을 이루어 의미와 보람을 맛보기 위해 평생토록 노력했는데, 모든 것은 지나가고 남는 것은 진한 공허감과 회의감과 무력감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 만물이 다 지쳐 있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세상은 동일한데, 마음의 상태에 따라, 생명의 춤으로 가득해 보이기도 하고, 모든 것이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의 ‘제행무상’의 가르침은 현상계에 대한 정확한 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해 아래”의 세상에 국한한 관찰입니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신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멈춥니다. 하지만 전도자는 결국 “해 위”를 바라보고 이 무거운 침체와 회의를 극복합니다. “해 아래”에 대한 관찰은 “해 위”를 보게 하고, “해 위”를 본 사람은 “해 아래”를 다르게 살아갑니다.
기도:
때로 저희도 전도자와 같은 회의감, 무력감, 절망감에 빠지곤 합니다. “해 위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고 계신 주님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육신의 눈을 감고 마음의 눈을 뜹니다. “해 위에서” 우주의 운행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묵상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순간이 새롭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니다. 오늘도 새 날, 새 세상을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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