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49장: 역사의 지평 너머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49장에는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된 여러 나라들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먼저 암몬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1-6절). 암몬은 모압의 북쪽에 있던 나라로서 모압과 마찬가지로 롯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암몬 족속이 섬기던 민족 신은 “몰렉”(개역개정 “밀감”)이었다. 암몬이 자리잡고 있는 땅은 과거에 갓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이다. 주님은 몰렉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백성(암몬)이 이스라엘 영토를 점령하고 있다고 탄식하신다(1절). “랍바”(2절)는 암몬의 수도로서 거대한 돌산 위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인데, 주님은 그 성이 폐허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3절). 암몬은 거대한 산지와 비옥한 골짜기를 자랑했다(4절).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폐허가 될 것이다(5절). 그런 다음, 주님은 때가 되면 포로로 잡혀간 암몬 사람들을 회복시킬 것이다(6절). 

이어서 에돔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 나온다(7-22절). 에돔은 모압의 남쪽에 위치한 나라로서,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에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은 지형적으로 게릴라 전에 유리하기 때문에 외세의 침입에서 비교적 안전했다. 에돔 사람들은 유다가 느부갓네살에게 멸망 당하는 것을 보면서 쾌재를 불렀다.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천시를 받아왔기 때문이다. 주님은 에돔 역시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은 페트라의 동굴 속으로 피신하겠지만, 그곳 조차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다마스쿠스는 이스라엘의 북쪽에 있는 시리아의 수도였다. 주님은 그 도성이 한 때 당신의 기쁨이었다고 말씀하면서, 그 도성도 결국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23-27절). 게달과 하솔은 광야에서 이동하며 살아가던 유목 민족이었는데, 이들도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28-33절). 엘람은 바빌로니아 남동쪽에 위치한 민족으로서, 활을 잘 쏘는 민족으로 유명했다. 그들도 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 하지만 때가 되면 주님은 엘람을 회복시키실 것이다(34-39절).

묵상:

주전 605년부터 562년까지 40년 넘게 신바빌로니아를 통치한 느부갓네살(정확하게는 ‘느부갓네살 2세’)은 역사 상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지중해 동부 지역에 흩어져 있던 나라들을 모두 정복했습니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져 있던 예루살렘, 암몬의 랍바, 에돔의 보스라,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등이 그의 군대에 의해 폐허가 되었습니다. 수 많은 정복 전쟁으로 거대한 제국을 이룬 그는 황후인 아미티스를 위해 ‘공중정원’을 건설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주변 나라들을 정복한 것은 그의 야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수 많은 민족과 나라들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그 모든 일들이 당신의 섭리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느부갓네살을 “나의 종”이라고 부르십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따라 잔인한 정복 전쟁을 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 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악행을 당신의 계획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멸망된 나라들에 대해 당신이 직접 심판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그 뜻을 따라 살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 대로 삽니다. 하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는 사람에게 우연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고차 방정식으로 인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수렴합니다. 그렇게 믿기에 우리는 역사의 지평 너머를 바라보며 소망을 찾습니다. 주님께서 인류의 역사를 다시리시며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오늘도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악행을 도모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듣습니다. 그러한 현실에 분노하고 때로 낙심하지만, 주님을 생각하며 희망을 수습합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시고 섭리하심을 믿고, 오늘도 저희에게 주어진 소임을 겸손히, 감사히 받아 안습니다. 아멘. 

7 responses to “예레미야서 49장: 역사의 지평 너머”

  1. gachi049 Avatar
    gachi049

    인류가 살아 있는 한 악행과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원죄로 역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삶은 극과 극으로 더욱 뚜렷하게 구분되어가고 있습니다. 주님. 어서 속히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어 고통 받고 신음하는 백성들과 모두가 주님과 더불어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Liked by 2 people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Like

  2. billkim9707 Avatar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 가운 데에서도 은신처와 도피성을 마련하신 구원과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믿습니다, 마땅히 멸망 당해야하는 죄인들게 복음입니다, 믿는 모든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입니다.

    저희들이 살길은 하나님 품으로 향한 십자가 길을 감사하며 믿음의 공동체로 모으시는 고아와 과부와 함께 기뻐하며 걷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Liked by 1 person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님!!!

      Like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수요일입니다. 햇살이 강하고 하늘은 푸르지만 승강장에 이는 추운 바람이 옷속으로 스며드네요. 이제 더 추워질 일만 남았겠지요?

    49장. 드디어 지난 두 달간 걸었던 예레미야서의 여정도 종착점을 향해 가고 있어요. 계속 이어지는 주변 열국의 미래에 대한 예언. 오늘은 암몬, 에돔, 다메섹, 게달.하솔, 엘람에 대한 이야기. 말하자면 기타 등등 편이라고나 할까요?

    내용은 다 비슷해요. 모두가 칼로 멸망하고 황폐화된다는. 이 정도면 거의 똑같은 예언을 모두에게 복붙(copy and paste)한 것 아닐까. 그냥 예레미야라는 사람 자체가 원래 극단적인 비관론자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도 잠깐 들었어요. 그렇지만 모두가 바벨론의 침공으로 패망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지요.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 출애굽의 구속사를 원점으로 돌려버린 유다의 자손. 언약(covenant)는 깨어지고 거룩한 나라는 실패했지요. 선택된 백성의 실패는 모든 열방에게 저주가 되고, 구원의 등불은 꺼지려고 해요. 모두가 진노의 자녀.

    메트로를 타고 출근합니다. 창밖으로 스쳐가는 앙상한 겨울 풍광이 왠지 아름답고도 슬프네요. 하루. 또 하루 분량의 삶을 만나처럼 내려주심을 감사. 일하고 살아가며 사랑하게 하심을 감사.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자. 주홍같은 내 죄를 흰 눈과 같이 씻겨주시고 자녀의 권세를 주신 이를 찬양. 새 언약을 세우시되 아무 조건없이 마음의 돌판에 새겨주시는 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 스스로 계시는 분. I AM. 제 눈이 오직 그분 만을 바라보고 그의 구속이 유일한 소망, 또 모퉁이돌이 되는 하루, 그런 인생이 되었으면.

    Liked by 1 person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런 말을 하면서 그게 무슨 뜻인지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일상의 말보다 느슨합니다. 사용자들이 따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컨텍스트 (문맥, 맥락)를 통째로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 처음 믿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단점입니다. 첫사랑을 기억하자, 처음 은혜 받던 때의 감동을 회복하자 이런 말을 하는데 이것도 교회 언어입니다. 난생 처음 예배에 나온 사람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갑니다. 요즘엔 교회에 새로 온 손님이어도 교회에 처음 나온 것은 아니기 쉽습니다. 한 때는 교회를 초신자와 새신자들에게 편한 곳으로 만들자는 의견이 활발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어렸을 때 처음 교회에 처음 나가서 느꼈던 생경함은 까마득한 기억 속에 갇혔지만, 구약을 읽으면서 느끼던 당혹감은 오늘도 여전합니다. 나는 지금도 ‘성경이 읽어진다’는게 어떤건지 모르겠고, 특히 감옥에 있으면서 성경을 몇 번 씩 통독해서 그 뜻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사람은 신기하고 부러운 정도가 우주에 갔다 온 우주인을 보는 수준입니다. 구약을 처음 읽을 때 얼마나 어렵고 혼란스러웠는지요. 과학과 성경의 충돌 이런 것보다 더 심각한 혼란은 심판과 재앙, 진노와 질투의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야서의 구절들 같은 데서 보는 하나님의 모습은 정말 무섭고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구약 읽는 것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통독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그분을 사랑한다 이런 말이 조심스럽습니다. 교회의 언어니 ‘척하면 알아 듣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나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한다는게 무슨 뜻인지 알고 그렇게 말하는가 스스로에게 물을 때가 지금도 있습니다. 온 세상을 물로 덮으신 하나님, 노아의 가족과 그가 데려온 동물 만 살리신 하나님을 나는 의지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될 사람들도 고통의 잔을 마셔야 했는데 하물며 너희 에돔 백성이 허물이 없다며 고통의 잔을 피할 수 있겠느냐 (12절)’ 는 구절을 읽으면서는 하나님은 과연 공정한 분인가를 또 묻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한다는 말들을 하지만, 나는 그게 잘 안됩니다. 대신, 내 삶에서 일어난 일이나 성경을 붙들고 갈등하고 고민하던 중에 얻은 희미하고 약한 깨달음, 성령의 지혜라고 느낀 강력한 울림 이런 것들이 말씀을 받아 들이게 도와줍니다. 나의 안목이 자라면서, 또 살면서 얻는 것과 잃는 것 (잃는 것을 통해 더 많이 얻는 신비) 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 덕분에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며 삽니다. 어제까지 몰랐어도 오늘 깨달을 수 있고, 어제까지 확신하던 것이 오늘 무너질 수 있는 여유와 긴장 속에서 말씀의 바다로 들어갑니다. 유다의 이웃 나라들이 여지없이 쓰러지는 심판의 장면을 상상하면 주께서 택한 백성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말 많은 부족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속에서 선민의 정체성,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산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나와 똑같은 질문을 이들도 했겠구나 싶습니다. 때론 강하게 밀어 붙이고 때론 수용하고, 때론 양보하고 때론 공격하면서 매일이 처음인 삶을 살았겠구나 싶습니다. 백성은 정체성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주의 백성이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되었고, 백성의 신은 신당이 없어 제사를 받지 못하는 신이 되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연약한 분이 되었습니다. 나의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가 아니라 사랑을 택한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노아 만 살리신게 아니라 지구별을 포기하지 못한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은 mother of all bombs 의 가공할 위력으로 오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 의 보호와 희생 안에서 자라야 하는 연약한 아기로 오시는 분입니다. 모든 사람을, 특히 죄인과 병자를 먼저 사랑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어서 오소서.

    Liked by 2 people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임마누엘!

      Like

Leave a reply to billkim9707 Cancel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