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45장: 바룩에 대한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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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주시는 말씀을 바룩에게 받아 적게 했다(36장). 그것이 여호야김 왕 4년(주전 605년)의 일이었다(1절). 그 이후로 바룩은 예레미야를 시중 들면서 그에게 주어지는 말씀을 받아 적었다(2절). 지금 우리가 예레미야의 예언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바룩의 공이다. 그는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과 이집트로 내려갈 때까지 동행하며 온갖 고난을 함께 했다. 

바룩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적으면서 자신도 그런 재앙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두려워했다. 그는 주님 앞에 자신의 두려움과 염려를 아뢰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했다(3절). 주님은 그 간구에 대한 답을 예레미야에게 주셨다(4절). 주님은 그에게, “큰일”(5절)을 찾지 말라고 하신다. 기적적인 일이 일어나서 장차 당할 재앙을 피할 수 있기를 바라지 말라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심판을 정하셨고, 그 모든 것이 행해질 때까지 재앙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바룩의 간구를 들으셔서 그의 생명을 보존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다. 

묵상: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무수한 고난을 겪었고 때로 그 고난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불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다 백성은 그를 혐오하고 배척하고 때로 살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끝까지 유다 백성과 운명을 같이 하려 했습니다. 바빌로니아로 가는 것이 그에게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다에 남기로 했고, 남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여 이집트로 내려갈 때에도 동행했습니다. 그는 이집트에서 동족과 함께 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바룩은 예레미야와 달랐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에게 임한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적으면서 장차 겪어야 할 일들에 대해 두려워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그의 마음을 압도할 때면,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마음을 쏟아 놓고, 그 재앙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가 자기중심적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유다 백성이 당해야 하는 재앙을 피할 수는 없지만,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주십니다.

모두 다 예레미야 같을 수는 없습니다. 동족과 운명을 같이 하려는 예레미야의 태도는 참으로 귀하지만, 누구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룩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응답해 주시는 주님의 배려가 고맙고 다행스럽습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와 같기를 소망하지만 실제로는 바룩과 같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바룩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에 위로와 용기를 얻으며, 예레미야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잘못된 것 아뢰면 측은히 여기사 크신 은혜를 주네 거기 기쁨있네”라는 찬송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주님 앞에 드리는 저희의 기도가 늘 주님께 기쁨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지만 때로 저희가 잘못된 것을 구해도 자비와 긍휼로 답하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7 responses to “예레미야서 45장: 바룩에 대한 배려”

  1. billkim9707 Avatar

    모든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저서 교훈과 책망과 고침과 의로 가르치시려는것은 성도들이 바르게 살게 하려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허락하신 믿음의 공동체, 가정과 교회를 살리기위해 먼저 나의 Ego 가 먼저 죽어야 하는것을 알면서도 그렇지 못하는 비열한 존재 입니다.

    주님앞에 설 날이 멀지 않은것을 실감합니다. 지금 부터라도 주님께로부터 잘했다고 칭찬 받고 천국 잔치에 초대 받는 삶을 살아내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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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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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조국이 나라를 잃었을 때 나라 밖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했던 독립투사들을 생각합니다. 특히 일만오천명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20~25%인 약 삼천 내지 사천명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한국이 존재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국내에서 반역자들이 있어 동족 간의 분쟁을 중지시키시고 힘있는 나라에 파송하셔서 그들의 도움을 이끌어내도록 인도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이민 생활하는 백성들이 조국 통일을 위해 통일의 그날까지 깨어 기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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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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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추운 날씨이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습니다. 금요일 아침.

    예레미야 45장. 선지자의 입을 빌어 바룩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메시지. 레코드 판에서 바늘이 튀듯 시간은 다시 여호야김 왕 때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흐름이나 전개 없이 불쑥 들어온 스토리.

    맥락이나 배경은 알 수 없는 바룩의 신세 한탄 (아 나 왜 이렇게 꼬이지?). 좀 동문 서답 같기도 한 하나님의 응답 (나는 지금 친히 심은 것들을 뽑고 직접 만든 집을 모두 허무는 중. 그런데 이 와중에 네 진로 걱정?) 이 짧은 대화는 어디 가든 목숨을 지켜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끝나요. 약간은 사족 같이 느껴지는 글.

    이제 하루를 시작하려 해요. 가족들과 따뜻한 집에서 감사절을 보내게 하심을 감사. 오늘 하루도 눈을 뜨고 숨을 쉬며 생명을 누리도록 하셔서.

    탕자 같이 길을 잃고 방황하던 나. 이 죄인을 보배피로 씻기사 흰눈보다 희게하신 이. 그 대속의 사랑을 찬양하는 오늘이 되기를. 오직 아버지의 목적이 내 삶의 이유가 되고, 아버지의 뜻이 나의 길이 되며, 아버지의 일이 내 노력의 촛점과 목표가 되길.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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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어제는 집에서 아이들과 추수감사절 저녁을 같이 먹었습니다. 한국을 떠난 뒤로 ‘명절’이라고 기리는 날은 추수감사절 하루인 것 같습니다. 우리 음식 문화와 동떨어진 터키를 처음 굽던 때가 기억에 생생합니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아들 친구의 엄마가 자기는 이렇게 준비한다고 알려주던 대로 따라 해봤더니 터키가 ‘구워지고,’ 잡지에 나온 사진과 비슷한 그림이 만들어져서 마냥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다지 맛이 있는 요리가 아닌데도 아이들이 좋아하며 잘 먹는게 좋아서 해마다 터키를 구웠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전통이 되었고 추억이 되었습니다. 어제는 손녀 둘이서 두 가지 디쉬를 맡아 해 와서 (노력 점수는 높아도 맛 점수는…) 돋보이는 식탁이었습니다. 아홉살과 열 한살이니 자기들 생각엔 다 컸고 남들 눈에는 아직도 먼, 그런 애매한 소녀 둘이서 ‘올해 감사한 일’ 대화를 주도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지 못해 묵상이 늦어진 아침입니다. 가게 문을 닫는 날이 일년에 딱 이틀인데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입니다. 아침 일찍 가게에 나와 기계를 켜고, 주방에 물을 새로 받고, 과일을 깎고 장사 준비를 마쳤습니다. 카운터에 앉아 성경을 펴니 바룩이 특별히 주님의 은총을 입는 이야기입니다. 짧은 장이지만 울림이 깊습니다. 해설 말씀처럼 예레미야와 바룩 두 사람의 운명이 대조적이라 그런건지, 심판 받아 다 죽을 사람들 속에서 바룩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약속 덕분인지 마음이 평온해 집니다.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바룩을, 나를 아시는구나 싶습니다. 바룩의 염려와 불안, 불평과 슬픔을 모른체 하시지 않습니다. 바룩에게 직접 말씀하지 않고 예레미야를 통해 약속하시는 뜻도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걱정과 불안 속에 있을 땐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오락가락합니다. 마음을 굳세게 먹다가도 이게 아닌가 싶으면 금새 흔들립니다. 자기가 바라는 것과 실제로 희망할 수 있는 것의 경계가 사라져 신기루를 보았나 싶어집니다. 희망 hope 인지, 희망적인 바램 wishful thinking 인지 혼란스럽습니다. 희망이 기대할만한 근거가 있으며 이성적인 사고에서 나온 미래 예측이라면, 희망적인 바램은 다분히 막연하고 작의적입니다. 로또에 당첨되면 좋겠다는 ‘희망’으로 복권을 사지만 그것은 희망이 아니라 희망적인 바램일 뿐입니다. 바룩에게 주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희망적인 바램이 되었을 지 모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시며 기록하라고 하시면 그것은 주의 말씀이며 희망이요 약속이 됩니다. 바룩에게 임한 주의 은총이 이토록 섬세합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거래적이지 않고, 메릿 베이스도 아닙니다. 바룩 너가 고생을 많이 했으니 포상을 주겠다가 아닙니다. 바룩 너가 이만큼 하면 나도 이만큼 해줄께도 아닙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 하나님께서 그냥 해 주십니다. 로마서 5장 20절이 생각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은혜를 받기 위해 죄를 짓는다는 뜻이 아니지요. 죄가 많은 사람이 더 큰 은혜를 받는다는 역설적인 계산도 아닐겁니다. 포도원 농부들에게 같은 삯을 주는 주인의 ‘이상한’ 계산이 은혜의 핵심이지 싶습니다. 자기의 허물과 한계를 알면 알수록 주님의 은혜는 더욱 절절하고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베드로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에게도 따라갔습니다.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동산의 입구는 폐쇄되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닫히지 않았습니다. 바룩이 가는 곳마다 노략물처럼 생명을 받을 것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노략물은 전쟁에서 이길 때 받는 상입니다. 전쟁 같은 인생,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 하는 인간의 연약함을 표현하는 것일까요. 바룩에게 하신 말씀이 위로가 되는 아침입니다. 주께서 나도 보시니 감사합니다. 감사의 계절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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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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