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21장: 비주류의 삶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유다의 마지막 임금인 시드기야(주전 597-586 재위)는 바스훌(20장 1절에 나오는 바스훌과 동명이인)과 스바냐 제사장(예언자 스바냐와 같은 사람)을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바빌로니아의 공격에서 유다를 보호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해 달라고 청한다(1-2절). 예레미야는 중보 기도는 커녕, 주님께서 느부갓네살 임금을 통해 유다를 멸망 시킬 것이며,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전한다(3-7절). 

주님은 유다 백성에 전하라고 하시면서, 이미 유다를 바빌로니아에게 넘겨 주기로 작정했으니, 살아 남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바빌로니아에게 항복 하라고 하신다(8-10절). 

하지만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이집트에게 도움을 청함으로 인해 유다 백성에게 참담한 재앙을 안겨 준다. 주님은 유다 왕실을 향해, 공의로운 판결을 내리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건져 주라고 요구하신다. 요시야 왕 이후에 유다의 왕들은 하나님의 뜻에 등 돌리고 자신들의 권력과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만 몰두했다. 그들의 악행으로 인해 유다 백성은 도탄에 빠졌고 그로 인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11-14절).

묵상:

예레미야가 백성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라는 예언 때문이었습니다. 나라가 망해 갈 때 애국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목숨을 내놓고 적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권을 잃은 나라에서 목숨을 부지 하느니, 조국과 함께 죽는 것이 의로운 일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백성을 격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심판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저항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고, 그러니 살고 싶으면 바빌로니아에게 항복 하라고 했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당해야 할 모든 재앙을 겪고 난 다음에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유다 백성이 그를 혐오하고 배척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 하며 그분의 섭리에 맡기고 살아가는 것은 때로 예레미야처럼 비주류의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못합니다. 다수의 사람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길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과는 다른 것을 보고 있고 다른 뜻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을 빌린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고후 5:7)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주류의 삶은 고달픕니다. 외롭고, 오해 받고, 모욕 당하고, 혐오를 당합니다. 하지만 믿는 바가 있기에 그 길에서 버티고 견딥니다. 진정한 희망은 그 길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그 길은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마 7:13-14)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 만한 결기와 용기가 저희에게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더욱 의지합니다. 저희 자신을 부정하고 저희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라가는 이 길에서 멈추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3 responses to “예레미야서 21장: 비주류의 삶”

  1. billkim9707 Avatar

    전혀 희망이 없는 죽음의 낭떠러지 에서도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알려주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말씀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나라와 사회와 지도자들이 부패하여 패망하는 중에도 소외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과 같이하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와 도움이 되는 말씀 순종하는 사귐의 소리 식구 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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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오늘 10월 31일은 종교개혁 기념일입니다. 1517년에 독일의 학자 마틴 루터가 교회 (카톨릭)의 부패 특히 면죄부 판매에서 나타난 신앙적인 타락을 지적하며 95개 조항에 걸쳐 회개와 갱신을 촉구하는 문서를 발표한 것으로 시작한 대개혁 (대문자 the Reformation) 이 시작된 날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유럽사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가져온 사건으로 중세의 마감과 근대의 시작을 가져온 역사적인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신학자들은 루터의 개혁 이전에도 내부적인 자정노력과 개혁의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개혁의 불씨처럼 보는 교회의 타락도 루터 때가 그 전세대보다 더욱 심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도 합니다. 모든 운동이나 대사건이 그렇듯 한 개인이나 특정한 상황을 원인으로 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여러 일들이 연쇄적으로 혹은 랜덤하게 일어나 한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사건을 만들어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인쇄술의 발달은 성서가 대중에게 보급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성서가 보급되면서 신학적인 사고와 토론이 사제층의 담을 넘어 대중에게로 열렸습니다. 루터는 교회 부패의 원인이 신학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정치화되고 부패가 만연해진 교회를 정화해야 한다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사상적인 변화와 새 신학의 세계를 여는 문이 된겁니다. 작년에 이사야서 14일 읽기 온라인 모임에 같이 했던 여성신학 교수가 페북에 올린 글을 새벽에 읽었습니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교회의 개혁에 참여했던 261명의 여성들을 찾아내 ‘여왕들, 어머니들, 이주여성들, 순교자들, 신비가들, 선교사들’의 챕터별로 소개하는 책을 읽고 쓴 글입니다. 종교개혁은 루터-칼빈-녹스 등의 대단한 신학자들의 노고로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알고 있지만,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을 상상하고 기리는 일은 의미있고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컴퓨터를 여니 오늘의 묵상 제목이 ‘비주류의 삶’입니다. 당장 든 생각은, 여성만한 비주류가 있겠나 였습니다. 목사님의 제목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얼마나 ‘비호감’과 반대중정서적인 메시지였는지를 강조하고, 동시에 예수를 따르는 삶은 정가운데, 무대 중앙에서, 스팟라이트를 받는 삶과는 대조적인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제목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오히려 빛이 비추지 않는 곳, 중심에서 밀려난 외지고 구석진 곳에 사는 것을 받아 들여야 하는 삶인지 모릅니다. 오늘 해설을 읽으면서 일본 강점기 시대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선의 독립에 재산과 생명을 바친 이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반대로, 일본제국을 존경하는 것을 넘어 동족을 희생제물로 삼은 친일 인간들의 이야기에는 분노가 일어납니다. 감동과 분노의 양극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예레미야의 선포를 읽습니다. 생명 유지를 택하려면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가 바빌로니아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피하지 못하는 대신 수치와 굴욕을 받아야 합니다. 칼과 질병, 굶주림까지 피해 목숨이 붙어있다고 해도 성 안에 있으면 -하나님의 집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하면- 죽게 됩니다. 주류와 비주류 사이의 선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항일과 친일의 갈림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의 얼굴을 밟고 지나갈 것인가, 산채로 흙 속에 묻혀 죽는 순교를 할 것인가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혹은 예수의 제자라는 말은 이미 비주류입니다. 우리는 주류와 비주류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비주류의 삶을 성실히 사는 일 만 할 뿐입니다. 배교와 순교를 놓고 갈등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것 만 할 뿐입니다. 배교자가 된 페레이라 신부는 고문 받는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 배교합니다. 그것 또한 순종 아니었을까요. 예레미야 본인은 정작 바빌로니아로 가지 못합니다. 바빌로니아에 저항하는 세력에게 잡혀 이집트로 끌려가고 이집트에서도 그 땅에 내릴 여호와의 심판을 예언하다 (돌에 맞아) 죽습니다. 예레미야도 ‘종교개혁’을 외친 선지자입니다. 제도권 종교, 화석화된 신앙으로 부터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전한 개혁가입니다. 개혁은 진행형입니다. 주님, 새로운 정신, 새로운 결단, 새로운 삶을 격려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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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achi049 Avatar
    gachi049

    세상에 수많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다니는 넓은 길은 쾌락과 부패와, 우상숭배와 부정한 권력들이 함께 다니는 길이기에 이들과는 거리가 먼 믿음의 형제자매들의 순례의 길은 아주 좁고 정적만이 흘러 두려운 길이라 생각합합니다. 그러나 행여나 사탄의 사탕발림 말 한마디에 꼬임을 당할까봐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고 계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나의 전부를 맡기고 살아가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도록 성령님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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