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15장: 제자됨의 대가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주님은, 비록 모세와 사무엘이 살아나와 간청한다 해도 유다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다고 하신다(1절). 심판 당할 때 유다 백성은 살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느냐?”(2절)고 물을 텐데, 피할 곳이 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전염병에, 어떤 이들은 칼에 맞아, 어떤 이들을 굶어 죽을 것이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 갈 것이다(2-3절). 세상 만국 백성들은 유다가 심판 당하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4절). 그들이 그들의 하나님에게 버림 받아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5-6절). 침략군을 끌어들여 당신의 백성을 심판하실 때, 주님은 아무런 자비도 베풀지 않으실 것이다(7-9절).  

심판의 예언을 전한다는 이유로 예레미야는 동족으로부터 극심한 혐오와 박해를 당한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세상 떠난 어머니에게 하소연을 한다(10절). 그러자 주님은, 그를 강하게 해주고 그의 원수들을 심판하겠다고 하신다(11절). 그 원수들은 다름 아닌 유다 백성이다. 주님은 그들을 “북녁에서 오는 쇠와 놋쇠”로 심판하실 것이며, 살아 남은 사람들은 이국 땅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실 것이다(12-14절).

예레미야는 자신이 당하는 모든 수모와 박해가 주님을 위해 겪는 것이니, 자신을 위해 원수를 갚아 달라고 청한다(15절). 그는 예언자로 부름 받았을 때 기꺼이 따라 나섰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그것을 기뻐했다. 그는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16절)답게 의롭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썼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가 얻은 것은 배신과 모욕과 살해의 위협이었다. 주님은 그를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고통은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수가 없게 되었다(17-18절). 

이 호소를 들으시고 주님은 흔들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레미야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유다 백성처럼 살려는 유혹에 흔들리고 있었다(19절). 주님은 그를 보호하고 굳세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20-21절).

묵상:

유다 백성에 대한 예레미야의 감정은 ‘애증’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유다 백성에 대한 긍휼함을 마음에 품고 삽니다. 그들을 위해 중보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을 위해 간절히 중보합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은 예레미야를 배척하고 증오하고 모욕하고 박해합니다. 그로 인해 상심이 깊을 때면, 예레미야는 자신을 위해 그들을 징계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런 까닭에 예레미야가 조울증을 겪고 있었다고 진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 역시, 조울증이었을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부름을 따라 나설 때면, 이렇게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예언자로 부름 받았을 때 주저하고 사양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그는 “받아먹었다”(16절)라고 표현할 정도로 반겼습니다. 하지만 그 예언으로 인해 유다 백성으로부터 혐오의 대상이 되고 고향 사람들로부터 살해 위협을 당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다른 사람들과 똑 같이 살고 싶은 유혹에 흔들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돌보시고 지켜 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고난의 현실은 악화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로 사는 것에 대해 두 가지의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건축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미리 그에 따른 비용을 추산하고 그 비용을 마련한 다음에 시작해야 하고, 전쟁을 시작하려는 사람은 충분한 군비를 마련하고 시작해야 합니다(눅 14:25-33). 그것처럼, 주님의 부름을 받고 사명을 따라 살려는 사람은 그에 따라 감당해야 할 손해와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제자로 살아가는 데에는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알고 시작해도 예레미야처럼 흔들릴 수 있으니, 모르고 시작한다면 필경 중도에 포기할 것입니다.  

기도:

주님, 예레미야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는 차마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말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저희가 예레미야의 상황에 처한다면, 주님의 부름을 반납하고 떠나고 싶어 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 마음 안에 “주님의 제자”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싶은 열망이 있음을! 저희를 도우시어 그렇게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7 responses to “예레미야서 15장: 제자됨의 대가”

  1. billkim9707 Avatar

    세상을 버리고 자신을 부인하고 허락하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귀를 원합니다만 주님으로 부터 멀지감치 떨어저 주저하는 모습입니다, 세상과 천국 사이에서 갈팡질팡 방황하고 있습니다.

    확고 부동한 십자가의 믿음, 위험을 두려워 하지않은 용기, 말씀 순종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주님의 심판보다 비교할수 없게 큰것을 기억하면서—-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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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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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면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고 자녀 문제로, 직장 문제등 여러가지 문제로 해결해결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기도하지만 고통에서 해방시켜주시지 않고 점점 더해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아시는 분 이심을 믿기에 응답을 받을때까지 기도하고 주시는 지혜로 남은 여생을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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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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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간밤에 서리 경보 (frost warning)가 있더니 날씨가 확 추워졌습니다. 벌써 금요일.

    예레미아 15장. 전반부는 예루살렘에 임할 끔찍한 징벌 (역병, 칼, 기근, 포획) 예언의 되풀이. 그런데 후반부는 예레야 자신의 처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그 주제에요. 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과 동족에 대한 복수 청원을 배설하듯 쏟아 내고 그런 예레미아에게 하나님은 돌이키라고(repent) 하시네요. 매우 다크한 전개입니다.

    조울증? 글쎄요.그러나 선지와 대언이란 큰 사명의 값으로 예레미아는 분명 ‘불행’이라는 개인적 대가를 치뤄야 했던 듯.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오라고 하신 주님. 여기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개인의 생존과 행복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는 데까지 가야하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이제 또 하루를 시작하려 해요. 오늘도 생명 주심을 감사. 추위를 피할 집, 삶을 나눌 가족,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주심에 감사. 지금 제 삶의 자리가 맡기신 사명의 자리임을 기억하고, 그 자리에 숨겨진 주님의 뜻을 조금씩 더 알아가는 오늘이 되기를. 십자가의 사랑, 그 능력을 매일 힘입기를. 사랑을 위해 내 생명을 나누고 내려놓는 인생, 주님께 기쁨이 되는 그런 인생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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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한국에서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은 하나님 이해에 있어 긍정과 부정의 두가지 길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는데 두가지 코스가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긍정의 길 via positiva과 부정의 길 via negativa 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빛이다’라는 고백이 대표적인 긍정적 이해입니다. 부정의 길 via negativa 는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 unknowing, unknowable 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합니다. 어둠으로 빛을 설명하는 방식이랄까요, 없는 것을 통해 있어야 할 것의 중요성을 말한다는 논리가 부정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도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이중창입니다. 멋진 화성 대신 불안한 화성, 어긋난 박자를 듣는 듯 합니다. 예레미야는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주위의 사람들 -아는 이, 모르는 이 구분할 필요없이-이 다 자기를 비난합니다. 왜 태어나 이 고생을 한단 말인가 한탄합니다. 어머니가 원망스럽고, 주가 부르실 때 행복해 했던 자기 자신이 밉습니다. 예레미야가 경험하는 하나님은 부정의 길에서 만나는 하나님입니다. 행복하지 않고, 웃을 일도 없고, 허무하기만 한 현실입니다. 그런 현실 가운데로 자기를 밀어 넣은 하나님입니다. 이 고통이 왜 끝나지 않는지, 상처가 왜 낫지 않는지 선지자는 묻습니다. 자기에게 하나님은 이제 ‘물이 넘쳤다가 말랐다가 하는 믿을 수 없는 시내와도 같다’는 기가 막힌 표현을 합니다. 통 모르겠다는 고백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생각이 이랬다 저랬다 바뀐다는 고백입니다. 나도 이런 마음일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 이해한건지, 하나님이 달라지신건지 모르겠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따뜻한 이불처럼 덮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한 데로 쫓겨나 추위 앞에 떠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선지자의 믿음과 비교 조차 되지 않는 작디작은 믿음을 가진 나도 이런데 높은 이상을 품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부재’를 느낄 때의 어둠은 얼마나 깊고 무서운걸까요. 목사님의 해설에 조울증이 잠깐 나옵니다.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도 정신질환은 여전히 스칼렛 레터 주홍글씨입니다. 정신건강의 중요성을 외치는 전문가들이 늘어났고, 스스로 드러내는 유명인들 덕분에 대중인식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울 왕도 다윗도 ‘정상’은 아니었던 것 같지요. 조울증이야말로 긍정의 길과 부정의 길이 극적으로 겹치고 합쳐지는 현상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긍정의 길이나 부정의 길 하나 만 정해 올라 갈 수 없는 산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건축이나 전쟁을 할 때 충분한 계산을 해야 한다는 비유로 우리의 결단과 각오를 촉구하셨는데 계산과 준비만 잘하면 ‘다 잘 될 것이다’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군비가 많아도, 건축 예산이 충분해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으로 이해하고 배우고 사랑해야 할 분입니다. 예수님은 가진 재산의 일부를 들여 지을 수 있는 집이 아닙니다. 허물어 새로 짓는 집, 완전히 비운 뒤에 다시 올리는 건축물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답을 듣습니다. ‘마음을 돌이켜 내게 돌아오며,’ ‘헛된 말을 하지 말고 값진 말을 해야’ 하나님의 입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긍정의 햇살과 부정의 폭우 뒤에 뜨는 무지개를 상상합니다. 조울의 파도에 삼켜지지 않고 또 떠오르고 또 떠오르는 기적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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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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