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9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예레미야는 유다의 미래를 상상하며 눈물을 흘린다.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린 까닭에 눈물샘이 말라 버렸다. 그는 홀로 광야에 나가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가기를 소망한다(1-2절). 예레미야가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 백성의 타락상을 고발하신다(3-6절).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그들에게서 진실과 정직과 정의가 사라져 버렸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금속을 불로 제련하는 것처럼 그 백성을 심판하실 것이다(7-9절). 

예레미야는 심판의 날을 상상하며 슬픈 노래를 부른다(10절). 그러자 주님은,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아 황량하게 될 것임을 확인하신다(11절). 예레미야는 왜 유다가 그렇게 심판 받아야 하는지를 묻는다(12절). 주님은, 유다 백성이 율법을 버리고 우상을 따른 것이 그 이유라고 답하신다. 그로 인해 주님은 그들을 심판하시고 이방 민족 가운데 흩어져 살게 하겠다고 하신다(13-16절). 이제 할 일은 곡하는 여인들을 불러들이는 것 뿐이다. 참혹한 재앙이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17-22절). 

주님은 지혜가 많다고, 힘이 세다고 혹은 재산이 많다고 자랑하지 말라고 하신다. 진실로 자랑할 것은 주님을 아는 것이다. 주님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23-24절). 바로 그것이 율법을 주신 이유다. 율법을 따라 태어난지 8일 만에 아기의 몸에 할례를 행하는 이유는 율법의 정신을 따라 살도록 양육 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유다 백성은 몸에 받은 할례만을 자랑했지 그 정신은 무시했다. 정말 필요한 것은 마음에 할례를 받아 율법의 정신(긍휼, 공평, 공의)을 실천하는 것이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심판을 면하지 못한다(25-26절).

묵상: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그분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 앎은 곧 그 사람의 삶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닮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당신에게 귀중한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밝히십니다. ‘진실'(3절, 5절), ‘긍휼’, ‘공평’, ‘공의'(24절)가 그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어떤 가치들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배워 알라는 뜻입니다. 율법에 순종 하라는 말은 그런 가치들을 중요하게 여기고 행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의 실력은 지식이나 권력이나 재산의 분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알고 실천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눈물샘이 마르도록 운 것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숭배에 빠졌고 그로 인해 주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는 가치들을 외면하고 진실 대신에 거짓을, 긍휼 대신에 완악함을, 공평과 공의 대신에 불의와 불화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너무도 심해져서 유다와 예루살렘이 ‘현실 지옥’이 되어 버렸고, 그로 인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 나의 말과 행실을 통해 그 증거가 드러나고 있는가? 매일 내가 지향하는 방향이 하나님께서 지향하시는 방향과 일치하는가? 주님의 눈길이 닿는 곳에 내 눈길이 향하고, 그분의 눈물 있는 곳에 내 눈물이 더해지고 있는가? 

기도:

주님을 더 알아가기 원합니다. 머리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체험으로 깨달아 알기 원합니다. 그 지식이 깊어져 저희가 주님을 닮기 원합니다.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아멘. 

4 responses to “예레미야서 9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

  1. billkim9707 Avatar

    풍요와 탐심과 쾌락과 거짖이 점점 더 심해져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주님을 더알기 원하는것이 내 평생의 소원이 되는 세상을 꿈꾸어 법니다, 대속의 사랑을 깨닫고 세상에서 자랑할것은 오직 십자가만 인것을 기억하게 도와주시고 주님 닮아가고 말씀 순종하며 감사하며 인생을 마감하는 삶을 살아내는 사귐의소리 식구 모두가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Liked by 1 person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햇살이 찬란한 금요일 아침입니다. 오늘은 집에서 근무할 예정입니다.

    예레미아 9장. 비슷한 메시지가 계속 반복되어 지루한 느낌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할례를 머리깎는 것으로 오역한 듯한 새번역 (26절)의 이상한 구절도 거슬립니다. 성경은 꼭 전체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들 하니 그래도 결국은 유익과 좋은 깨달음이 오겠지요?

    죄와 벌…그 죄는 돌이키기 이미 늦었고 그 심판은 확정된 코스에 이미 들어섰어요. 이전 세대의 사람들도 마찬가지 죄를 지었을 텐데 왜 하필 이 세대만? 어린아이들은, 또 아기들은? 불의와 압제의 가해지와 피해자가 똑같은 환난을? 모르겠어요. 그냥 넘어가기로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심판의 날에 보혈로 씻겨있는 이들은 약속대로 양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겠죠? 그렇지만 상급은 있다 했으니 얼마나 하나님을 아는지가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 아닐지요.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살로 알듯이 아는 것 (yada). 오늘도 하나님을 만지고 그 분의 만짐을 받는 하루가 되기를.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그분의
    뜻이 내 목적이 되며, 그 분과 감정을 나누고 살아가는 매일이 되기를. 날마다, 숨쉬는 순간 마다…

    Liked by 2 people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교회를 성전으로 부르는게 맞나?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관용어처럼 쓰니까 익숙하게 들리지만 교회를 자꾸 성전이라고 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회중기도에서 ‘거룩한 주일에 성전에 나와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마다 익숙한 표현의 반복인지, 주일-성전-예배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한 뒤에 나온 감사인지 잠시 멈춰집니다. 예배에 집중하지 않고 딴생각을 하게 하는 사탄의 ‘시험’이라고 자신을 꾸짖고 넘어갑니다만 그런 익숙함, 남이 하는대로 따라 하기, 교회의 문법을 잘 지키기 등이 과연 신앙의 성장과 성숙에 유익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믿는 사람은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표현도 어색하기 그지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마태 5:13-16)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딸이다와 나의 딸 역할을 하라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며 살게 하소서’라는 기도도 그런 면에서 재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존재와 소명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뜻, 즉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처럼 짠 맛을 내며 살라는 명령이라는 뜻에서 소금이 하는 역할을 잘 하고 살자는 것이라고 이해를 하긴 합니다만, 말씀대로 산다는데 밑줄을 수도 없이 그면서 정작 우리의 언어와 사고가 말씀대로인지 점검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시험에 든다고, 남한테 상처가 될 수 있다고, 목사님이 가장 잘 안다면서 넘어갑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 유다 백성을 생각하며 통곡합니다. 당신의 처소라고 하시던 예루살렘 성전을 폐허 더미로 만들고 늑대들의 소굴 (7장에서는 도둑의 소굴)로 만들겠다고 하십니다. 왜 이렇게 되었냐고, 여호와의 가르침을 받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느냐고 선지자가 묻습니다. 주께 순종하지 않았고 하라고 명령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하십니다 (13절). 고집을 부리며 살고 조상이 가르쳐준대로 거짓 신 바알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14절). ‘조상이 걷던 선한 옛길’을 가라고 하셨는데, 옛길이라도 선한 길인지 아닌지를 묻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그분의 공의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불의가 일어나고 악행이 벌어지는 것을 보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만약 심판이 없다면 하나님의 약속,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그러므로 거짓인) 약속이 됩니다. 하나님이 아닌 바알을 섬기는 우상숭배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배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유다 백성이 여호와와 바알을 구분하지 못해 그리 한 게 아닐 것입니다. 여호와는 여호와대로, 바알은 바알대로 자기들 원하는 것을 얻고 싶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데도 여기저기에 산당을 지었습니다. 성전과 산당의 구분도 사라졌습니다. 여호와의 법 (사랑, 공의, 화평, 인내, 용서…)이 아니라 거친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 우상숭배의 동기입니다. 고전 명언 ‘강자는 자기가 하고 싶을 것을 하고, 약자는 겪어야 할 것을 겪는다 The strong do as they want, the weak suffer what they must’ 는 살벌한 대조가 우상숭배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저버린 인간의 땅은 늑대의 소굴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없으면 사람은 서로에게 늑대가 된다 Man is wolf to man 는 말도 있습니다. 짐승은 할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받는 할례를 쉬운 말로 하면 양심의 회복일 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공의를 내 양심이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나의 양심이 주의 정의에 반응하게 하소서. 나의 심장이 정의와 사랑을 따라 뛰기를 원하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Liked by 2 people

  4. gachi049 Avatar
    gachi049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특히 인류를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며 못하실일이 전혀 없으시며 인류를 너무사랑하시므로 함께 살려고 하셨으나 스스로 죄를 범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어리석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시고 바라셨지만 긍휼, 공의, 사랑이신 하나님은 인간의 죄가 상상할 수 없는 쾌락, 우상숭배등으로 진노하신 하나님은 피조물을 완전히 쓸어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말씀이 육신되어 십자가에서 스스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써,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을 이루셨습니다. 또한 심판주로 도둑 같이 다시 오셔서 새하늘 새땅을 이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재림의 그시기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심판의 그 날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천국의 소망을 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Liked by 1 person

Leave a reply to billkim9707 Cancel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