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5장: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에서 의로운 사람을 하나라도 찾으면 심판을 철회하겠다고 하신다(1절). 이 말씀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나누었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창 18:16-33). 예루살렘은 소돔과 고모라보더 더 심하게 타락했다는 뜻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주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 행동은 다르다(2절). 예레미야는 주님께, 의롭게 사는 사람을 찾아 보았으나 찾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3절). 그는 혹시 부자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있는지 찾아 보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레미야 자신도 유다 백성이 심판 받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다(4-6절). 

주님은 유다 백성의 죄악을 다시 고발 하신다. 그들은 우상숭배에 빠져 윤리적으로 심하게 타락해 버렸다(7-9절). 그래서 주님은 강대국들을 끌어들여 유다를 심판하실 것이다. 다만, 전멸시키지는 않으실 것이다(10-11절). 유다 백성은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속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12-13절).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말을 불이 되게 하셔서 유다를 불태울 것이라고 하신다(14절). 그가 전할 심판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주님께서는 한 민족 즉 바빌로니아를 통해 유다를 공격하게 하실 것이다(15-17절). 하지만 유다 백성을 전멸시키지는 않으실 것이다(18절). 

유다가 멸망을 당하면 백성은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이 왜 자신들에게 그렇게 하셨는지 물을 것이다(19절). 주님은 그 때 답할 말을 알려 주신다. 그 이유는 그들이 우상숭배에 빠져서 속속들이 썩어 버렸기 때문이다(20절). 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이 전능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그분의 주권을 부정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죄악을 일삼았고 그로 인해 세상은 회복할 수 없이 망가졌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심판 뿐이다(21-29절). 그들을 일깨워야 할 종교인들마저 타락해 버렸기 때문이다(30-31절).

묵상:

요즈음 한국과 미국의 뉴스들을 읽어 보면, 사람들의 윤리 의식이 얼마나 흐려졌는지를 거듭 확인합니다. 한편에는 젊은이들이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여 살기를 포기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허물어진 경제 구조의 틈바구니에서 수백억의 이득을 챙겼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권력을 치부의 수단으로 사용하고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드러난 것이 이 정도이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부를 키우고 있을까 생각하니, 의분이 치솟습니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면 그 마지막은 폭동이라는 것이 지난 역사의 엄연한 가르침인데,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듯합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불의하게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을 두고 “그들은 피둥피둥 살이 찌고, 살에서 윤기가 돈다. 악한 짓은 어느 것 하나 못하는 것이 없고, 자기들의 잇속만 채운다.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올바르게 재판하지도 않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지켜 주는 공정한 판결도 하지 않는다”(28절)고 한탄 하십니다. 경제정의와 사법정의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는 뜻입니다. 이천 오백 년 전의 이야기인데, 마치 오늘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이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못 가진 사람들의 절망은 더욱 깊어져 가고, 가진 사람들의 횡포는 더욱 심해져 갑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욱 절망적인 것은 그 불의를 책망하고 깨우쳐 주어야 할 종교인들마져 타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30-31절)고 탄식하십니다. 이것도 역시 오늘 우리 시대에 대한 고발처럼 들립니다. 거대한 부패 범죄의 주인공이 소문한 기독교인들이고, 세상을 분열시키고 혼란시키는 주범이 종교인들입니다. 

이런 까닭에 예레미야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이 오늘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머리를 무릎 사이에 파묻고 이 시대에 믿는 이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합니다.  

기도:

주님, 이 땅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저희가 그래도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일을 하실 터이니, 무너지는 희망을 부여잡고 오늘도 주님을 따라갑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5 responses to “예레미야서 5장: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

  1. billkim9707 Avatar

    극심한 빈부차이로 격해지는 인종차별로 성적문란으로 마약을 두려워하지 않는 어지러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기복사상을 주장하는 교회는 흥청 망청하고 십자가의 길을 걷고자하는 소수의 교회는 험하고 좁은 길을 걷고있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이 수고하고 갈망 하는것은 저희들의 소망을 모든사람 특히 신자들의 구세주이신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께 두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의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능력을 세상에 알리고 돌아오라고 부드럽게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세상이 듣고 따르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Liked by 2 people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Like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구름이 끼고 스산한 월요일 아침입니다. 콜럼버스 데이라 연휴라 아무 일정 없이 그냥 쉬려 합니다.

    예레미아 5장. 계속 비슷한 주제가 반복되고 있어요.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백성들. 타락한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에 대한 심판이 임박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아하고 교회는 타협하네요.

    오늘 묵상 말씀을 좇아 요즘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팍스 아메리카나로 불려지던 세계질서가 깨지고 각자 도생의 시대가 열리고 있어요. 인공지능의 놀라운 발전 속도는 또 다른 두려움의 이유가 되지요.

    이 때가 정말 마지막 때일까요? 혼돈과 전쟁, 재앙의 시기를 거쳐 재림과 심판의 날이 정말 오는 걸까요? 모르겠어요.

    하루를 시작하려 합니다. 생명을 주심을 감사. 인생의 작은 동산을 허락해 주심도 감사. 지금까지 함께 하시고 지켜주신 에벤에셀의 주님. 그 주님께서 오늘 함께 하시고 (임마누엘) 내일을 예비해 주심(여호와 이레)을 믿고 평강의 능력을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말씀의 조명 아래 깨어 스스로를 정직히 돌아보고 예수의 보혈로 늘 씻기어 있는 그런 인생이 되었으면.

    Liked by 2 people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백성의 죄는 불신앙이나 열정 부족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신앙심이 없고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사는게 하나님 보시기에 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와 공평을 이루지 않는 것,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전혀 모르거나 알려고 들지도 않는 굳은 마음과 미적지근하고 흐리멍텅한 상태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식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멀어지는 사람은 자기가 잘하고 있다는 사람이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면 안될 것 같다는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단테의 ‘신곡’에서 그리는 죄인과 죄의 모습은 다양합니다. 지옥이 층으로 구분되는데 주요 죄마다 층이 따로 있습니다.탐욕 색욕 분노 나태 배신 이단 등입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은,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 각각으로 불행하다’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한데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괴로와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서로 비슷한 모습인데,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은 저마다 다 다른 일, 다른 방법, 다른 목적으로 분주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의와 사랑은 한 방향성을 가졌으나, 불의와 무관심, 욕망과 이기심은 사람마다 다 자기 배를 채우는 데 목적이 있으니 다 제각각으로 새롭게 방법을 고안해 -‘신종’ 사기 수법처럼- 영역을 넓혀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5장은 정직한 일을 하는 사람을 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one man, one woman who does what is right and tries to live a true life -있는지 찾아보라는 도전으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길,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공평 (4절)을 알고 행하는 사람이 있는가를 묻습니다. 예레미야는 백성은 가난하고 어리석을 뿐이라며 유다의 지도자들을 만나 말해보겠다고 합니다. 지도자들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합니다. 새들로 가득한 새장처럼 그들의 집에는 속임수가 가득 (27절)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부자가 되고 힘센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들의 악한 짓은 고아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공정하게 심판하지 않는 (28절)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거짓을 말하고 제사장들은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고 내 백성은 그런 제사장들을 좋게 여기니 (31절)’ 심판과 멸망은 정해진 결론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때에나 있었던 일이지 지금은 없는 일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예레미야가 한탄하고 울만한 세상입니다. 교회가 많고, 믿는 이들이 많은 지금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구하는 한 명의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나의 고백과 기도, 예배와 찬양이 그저 허망한 빈소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Liked by 2 people

  4. gachi049 Avatar
    gachi049

    더욱더 타락해가는 유다 백성을 살리시기 위해 어린 예레미야를 택하신 이유가 세상에 물들지 않아 말씀을 순수하게 잘 알아 듣고 보탬없이,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고 말씀 그대로 전할 것을 아신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맛의 늪에 빠져 윤리적 사고 방식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자신을 바라볼줄 모르고, 타인의 형편과 처지를 생각하지 않는 자신만이 인정하는 의의속에서 종교인, 선생등 모두가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주님. 먼저 믿은 믿음의 공동체가 먼저 자신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부르짓고 전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셔서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Liked by 1 person

Leave a reply to young mae kim Cancel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