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6장 11-16절: 선한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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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하나님의 사람이여”(11절)는 디모데를 염두에 둔 말이지만, 디모데를 통해 이 편지를 듣게 될 에베소 교인들을 포함한다. “이 악한 것들”은 앞에서 언급한 병적 증상들(교만, 논쟁과 말다툼, 시기, 분쟁, 비방, 악한 의심, 경건을 이득의 수단으로 삼는 행위)을 가리킨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한다. 사도는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이런 것들을 “성령의 열매”라고 불렀다. “좇으십시오”는 헬라어 ‘디오코’의 번역인데, 범인을 잡기 위해 추적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현재 명령형은 “지속하여”라는 의미를 가진다. 

12절에서 사도는 믿음을 “선한 싸움”에 비유한다. 헬라어 ‘아고나’는 “경기” 혹은 “씨름”을 의미한다. 그것을 “선하다”고 말한 이유는 사람을 이기기 위한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생을 얻으십시오”는 “영생을 부여잡으십시오”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믿음 안에서 이미 주어진 영생을 놓지지 말라는 뜻이다. 그것이 신앙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다. 

디모데는 영생을 부여잡기 위해 박해 중에도 신앙을 지켰다. “많은 증인들”은 그의 신앙 고백을 지켜 본 사람들을 가리킨다. “훌륭한 증언”(개역개정, “선한 증언”)은 박해와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믿음을 고백하는 것을 가리킨다. “증언”으로 번역한 헬라어 ‘호몰로기아’는 “고백”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예수께서 빌라도 앞에서 “훌륭한 증언”을 하셨다(13절). 사도는 디모데에게,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명을 지켜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14절)이 되라고 격려한다. 

사도는 앞에서 “훌륭한 증언”(고백)에 대해 언급했는데, 15절과 16절은 사도의 신앙 고백이다.“정한 때가 오면”(15절)은 “그분의 때가 오면”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재림의 날은 성부 하나님께서 정하실 일이다(행 1:7). 사도는 재림을, “하나님께서 주님의 나타나심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재림은 드러나지 않게 활동하시던 그분이 환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찬양 받으실 분이시요, 오직 한 분이신 통치자이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시다. 그분은 “죽지 않으시고,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없는 빛 속에 계시고, 사람으로서는 본 일도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시다. 이 지점에서 사도는 성부 하나님께 “존귀와 영원한 주권”을 올려 드린다. 말로 표현하고 보니, 그 하나님이 너무나 놀랍고 신비했기 때문이다. 

묵상:

바울 사도는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롬 10:10)라고 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고백하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습니다. 진실한 믿음은 마음에서 시작하여 입으로 고백하고 손과 발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의에 이르는 것”과 “구원에 이르는 것”도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 받고 의롭다고 인정 받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지만 죄 씻음 받고 의롭다고 인정 받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악한 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아”(11절) 살아서 “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는 사람”(14절)이 되어야 합니다. 의롭다고 인정 받은 후 실제로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변화는 마음의 믿음과 입술의 고백이 함께 갈 때에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받은 영생을 붙잡아 두는 방법입니다. 

이런 점에서 영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선한 싸움”입니다. 내적으로는 잠복해 있는 죄성을 경계하면서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하기 때문이요, 외적으로는 악한 영이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기”(벧전 5:8)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도전하고 박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목숨을 내 걸고 진실을 증언하셨습니다. 바울 사도 역시 이 편지를 쓰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훌륭한 증언”을 하고 참수형으로 순교 당했습니다. 믿음을 배반하고 살아남아 영생을 잃느니 차라리 죽어서 영생에 이르겠다는 태도로 증언하고 고백했습니다. 사도는 디모데가 이미 담대한 고백과 증언을 해 왔음을 칭찬하면서 계속 그렇게 하라고 격려합니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 앞에 온전히 설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종국적인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 그분의 영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태중에 있는 생명에게는 건강하게 태어나는 것이 목표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태아는 이 세상이 얼마나 놀랍고 인생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나라에 이르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 나라의 현실을 한 조각이라도 알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상대화 됩니다. 그런 믿음이 아니고는 목숨을 내걸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의 영원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 나라를 알지 못합니다. 주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주님을 더 깊이 알게 해주십시오. 부활의 능력을 더 온전히 체험하게 해주십시오. 그래야만 저희에게 이미 주신 영생을 굳게 부여잡고 살아갈 것입니다. 아멘. 

3 responses to “디모데전서 6장 11-16절: 선한 싸움”

  1. billkim9707 Avatar

    세상의 싸움은 서로 죽이는 싸움이지만, 선한싸움은 서로 사는 싸움인것을 고백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믿고 새사람되고 말씀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선한싸움을 싸워 승리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 앞에 설때까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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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야곱처럼, 에스더처럼,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기도로 악한 영들과 싸우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생명까지 받치셨습니다. 주님.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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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성경 본문과 해설 글을 연이어 읽고 나니 믿음의 달리기를 멈추지 말라는 바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권투 선수들의 링 밑에서 소리 지르는 코치의 모습을 한 바울이 연상되지만, 믿음의 경주는 권투나 레슬링 같은 일대일의 싸움 -자아와의 싸움, 악한 영과의 싸움-보다, 마라톤이나 수영 경기처럼 자기 레인에서 자기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성적으로 승부를 가리는 싸움 쪽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본문을 다시 천천히 읽어가니 이번엔 엔도 슈샤쿠의 ‘침묵’이 떠오릅니다. 소설로 큰 반향을 일으켜 스테디셀러 책이면서, 영화로 만들어진 뒤에는 화면에서 본 인물들의 감정과 의지가 생생하게 남고 각인된 책입니다. 바울이 ‘서양’의 믿음을 그렸다면 엔도는 ‘동양’의 믿음을 그렸다고 할까요. 바울이 포기하지 않는, 승리하는 경주를 권한다면 엔도는 포기와 좌절의 십자가를 하나 더 세우고 그 십자가를 바라 보라고 권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엔도 슈샤쿠의 ‘침묵’은 아무 말씀하지 않는 하나님, 믿음 때문에 핍박 받고 죽어가는 신도들에게 아무 위로나 인정의 말을 하지 않는 하나님을 그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지요- 작가는 ‘신은 말씀하고 계신다’ 즉 사람들 (우리)의 인생이 그분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알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흔적으로서의 믿음, 남겨진 인상으로서의 신앙 고백 같은 것입니다. ‘침묵’의 주인공인 ‘배교 수사’ 로드리고는 후미에 (성화)를 밟으면 믿는 교인들을 살려 주겠다는 압력을 받습니다. 끔찍한 고문으로 죽지도 못한 채 고통 속에 신음하는 신도들을 보면서 그는 배교합니다. 땅에 놓인 성화 속 예수님이 로드리고에게 말하십니다. ‘밟아도 좋다…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물론 이런 것은 다 자기 합리화일 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어찌 생명의 연장과 맞바꾸는 일이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살아도 죽은 것과 같은 삶이 있고 (배교한 뒤 수사가 사는 삶), 죽어도 사는 삶 (순교자, 고귀한 희생자의 죽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생이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고 하는 엔도 슈사쿠의 말은 곱씹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마음에서 시작해 말로 고백하고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나의 말과 행동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감춰진 하나님을 드러냅니다.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을 그립니다. 씁니다. 노래합니다. 고백합니다. 증언합니다. 믿음을 지키는 경주의 한 구간을 오늘도 달립니다. 주의 사랑과 은혜를 내 안에 품고 달립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함께 뛰어 주시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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