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5장 3-8절: 참 과부로 살기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이어서 사도는 당시 교회 생활에 있어서 가장 뒷말이 많았던 과부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한다. 당시 교회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모델을 따라 경제적으로 어려운 과부들을 돌보았다. “참 과부”(3절)는 교회 공동체가 경제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존대하십시오”는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마음으로 존경할 뿐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부양하라는 뜻이다. 만일 그 여인에게 자녀들이나 손자들이 있으면 교회에게 부담을 주지 말고 자녀들에게 부양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자기네 가족에게 종교상의 의무를 행하는 것”(4절)을 가르쳐야 한다. “종교상의 의무”는 십계명의 제5계명을 준수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부양 받을 자녀들이 없는 경우에는 교회가 돌보아야 한다.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는 참 과부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5절) 드려야 한다. 교회로부터 물질적인 부양을 받았으니 영적으로 교회를 도와야 한다. 끊임없이 기도와 간구를 드리는 사람은 성적인 방탕으로 흐를 수 없다. 

“향락에 빠져서 사는”(6절) 이라는 말은 사치와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별한 남편에게서 재산을 상속받은 부유한 과부들 중에는 자유분방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도는 그들에 대해 “살아 있으나 죽은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영적으로 죽은 것이므로,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뜻이다. 

7절에서 사도는, 4절에서 언급한 “자기네 가족에게 종교상의 의무를 행하는 것”을 다시 언급한다. “그들에게 이런 것들을 명령하여”(7절)는 가족 부양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의미한다. 믿는 이들이 가족 부양의 책임을 소홀히 하면 “비난”받을 수 있다. 사도는 부모 공양에 대한 계명을 친척과 가족 전체로 확대한다(8절). “그는 벌써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라는 말은 친척과 가족 부양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구원을 잃는다는 뜻이 아니다. 가족 부양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다. 게다가 그것은 율법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다. 믿지 않는 사람이 가족을 부양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것이지만, 믿는 사람이 그렇게 한다면 인간의 도리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까지 저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입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묵상:

믿음은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남으로 믿음은 시작됩니다. 마음에서 시작된 믿음은 마치 누룩이 반죽 전체에 퍼지는 것처럼 존재 전체에 퍼져서 말과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한 것처럼, 믿음이 진실하다면 행동으로 드러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라고 했습니다. 

이론은 그러한데, 실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야고보 사도가 저런 말씀을 한 이유도,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에 따른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떤 형제나 자매에게 그날 먹을 것조차 없는 것을 보고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약 2:16) 하면서 말로만 때운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죽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살아 있다면,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해도 사치와 쾌락에 빠질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이 살아 있다면, 어려움 중에 있는 친척과 가족을 내몰라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룬 다른 지체가 굶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혼자서 배불리 먹을 수 없습니다. 교회는 확대된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육신과 물질에 탐닉하여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6절)이라고 말합니다. 대지로부터 뿌리 뽑힌 나무는 잠시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이미 생명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에게서 분리된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누리는 즐거움은 실상 자신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물질주의가 사람들 사이에 너무도 널리, 너무도 깊이 퍼져 있습니다. 믿는다는 사람들조차 물질주의에 푹 젖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은 하나님을 이용하여 더 많은 물질을 누리려 합니다. 사치와 방탕과 쾌락을 누리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자랑합니다. 저희를 도우셔서 참 과부처럼 살게 해주십시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로”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3 responses to “디모데전서 5장 3-8절: 참 과부로 살기”

  1. billkim9707 Avatar

    믿는다고 생각과 말로 고백을 하지만 손과 발이 연결되지않은 죽은 믿음으로 살아왔습니다. 극심하고 처절한 고통으로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이 되신 예수그리스도를 항상 기억하고 온 몸과 영혼과 삶으로 믿는 전인격적인 믿음을 원 합니다.

    부활과 생명이신 주님을 믿고 죽어도 사는 믿음, 살아서 믿는 믿음으로 영원히 죽지않는 믿음을 갖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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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부부가 살다 한 쪽이 먼저 떠나면 홀아비나 과부가 됩니다. 바울이 과부에 대해 언급한 것이 과부가 더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홀아비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과부와 처지가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과부 신도에 대해 기본적인 원칙을 갖고 있도록 조언하는 것을 보면 남자는 혼자가 되어도 사회적인 약자로 내려 앉지 않아서인 것 같습니다. 과부와 ‘참 과부’의 표현이 재미 있습니다. 쉬운 성경은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만 개역개정을 비롯해 새번역이나 표준새번역도 참 과부라는 표현을 합니다. 혼자된 어머니를 돌볼 자녀들이 있으면 과부, 없으면 참 과부라는 뜻 같습니다. 자녀가 어머니 부양을 책임지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으면 참 과부가 아니겠습니다. 자녀가 있어도 너무 어리거나 능력이 되지 않으면 참 과부겠지요. 다만, 본문이 계속 되면서 ‘과부 리스트’ 즉, 과부의 명단을 언급하며 과부의 연령과 성품, 행실 등을 기준으로 교회의 지원을 받을만한지 아닌지를 살피라고 하는 것을 보면 과부들로 인한 잡음이 심각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의 재정과 자원은 유한하기에 필요한 이들에게 잘 사용되도록 관리하고 감독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실제적인 조언을 하고 있습니다. 병원 의 응급실을 보여주는 드라마를 보면 실려온 환자의 상태에 따라 구분합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듯한 최악의 상태 환자, 정밀 검사가 필요하지만 당장 위급하지 않은 환자, 긴급으로 꼬매거나 투약해서 상태를 지연시키면 괜찮은 환자 등등 처치법이 다릅니다. 응급실에서 치료 받고 곧장 퇴원하거나 좀 더 검사와 치료가 필요해서 병동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교회가 응급실인지, 입원 치료하는 병동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응급처치가 아닌 장기요양 병원인 것 같습니다. 바울의 시대에도 지금도 교회를 ‘이용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봅니다. 한국에서 온 친구 부부가 출석하는 교회는 ‘병이 잘 낫는 교회,’ 목사님의 기도를 받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널리 퍼진 교회랍니다. 예배 마치고 목사님과 악수 (만 해도 낫는다고 소문이 나서) 하려고 줄을 서는 사람들이 엄청나답니다. 그런데 그 줄에서 새치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큰소리가 나고 서로 밀고, 싸우는 일이 다반사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그 교회 교인이 자기 아는 사람을 겨우겨우 설득해 데리고 왔는데 기도실이 마루바닥으로 되어 있어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가 기도 마치고 나오니 누가 새로 온 사람의 신발을 신고 갔더랍니다.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이었다고 생각하게 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새로 온 사람은 ‘다시는 이 교회 안 온다’고 했다지요. 웃어야 할 지 울어야 할 지 모를 일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도대체 뭘 믿는지, 왜 믿는지 아무 생각 없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다는 말 아니냐고 친구 부부와 얘기했습니다. 과부가 되어 막막한 사람이 교회에 기대고 싶고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건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바울 시대엔 더 했을 것입니다. 도울 수 있으면서도 돕지 않는 자녀는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나쁜 사람 (8절)’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6절에서 바울은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 시간을 보내는 과부는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는 형편이 나은 과부는 (참 과부가 아닌 과부) 자기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도와야지 자기 좋을대로 사는 것은 신자의 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문득, 예수님한테서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은 많은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되돌아온 사람은 하나 뿐이라는 구절이 떠오릅니다. 교회는 개인으론 할 수 없는 일을 공동체라서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곳입니다. 사회에서 잊혀지고 상처받은 개인에게 작은 방을 하나 내주는 여관 같은 곳이기도 합니다. 과부, 참과부, 홀아비, 고아, 청소년, 노인, 병자…도움이 필요한 이라면 ‘묻지 않고’ 도움을 주는 곳이면 좋겠습니다. 바울도 이런 마음이었겠지만 그 당싱도 교회의 현실은 묻고 따져야 할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령의 활동은 교회는 물론 교회 밖에서도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주의 은혜가 필요한 이들을 찾아 가시는 성령께서 도와주실 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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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achi049 Avatar
    gachi049

    물욕과 쾌락으로 물든 세상, 특히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와 백성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 뿐임을 믿습니다. 주님. 먼저 주님을 만난 백성들의 기도와 거듭남을 통해 이타적인 사랑과 겸손한 마음으로 섬길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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