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2장 1-12절: “그 때 그곳”과 “지금 여기”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1절부터 편지의 본론이 시작된다. 그는 먼저 재림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으려 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일”은 재림을 말하고, “우리가 그분 앞에 모이는 일”은 재림 때에 믿는 이들의 상태에 대한 가르침을 말한다.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과 5장에서 그 문제를 다뤘다. 그런데 교인들 중에 바울이 한 말이라고 하면서 “주님의 날”(재림)이 이미 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다(2절). 그 말을 듣고 당황하거나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편지를 쓴 것이다. 

이 가르침에 대해 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반박한다. 재림은 개인적인 사건이기도 하지만 우주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어떤 영적 체험을 했다 해서 혹은 세계사적인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을 재림으로 간주 해서는 안된다. 재림이 있기 이전에 먼저 “불법자 곧 멸망의 자식”(3절)이 나타날 것이다. 그는 모든 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신으로 주장할 것이다(4절). 사도는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 그 사실을 분명히 가르친 바 있다(5절). 그 불법자가 “지금은 억제를 당하고 있지만, 그의 때가 오면 나타날 것”(6절)이다. 지금 그 불법자가 일어날 기미가 보이기는 하지만, 주님께서 풀어주기 전까지는 그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7절). 

주님께서 풀어주실 때 그 불법자는 잠시 동안 세력을 떨칠 것이다(8절). 그는 사탄의 도구로서 “온갖 능력과 표징과 거짓 이적”(9절)을 행하여 “멸망 받을 자들”(10절)을 속일 것이다. 그들이 “자기를 구원하여 줄 진리에 대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불법자에게 속아 거짓말을 믿게 되는 것이다(11절). 그 불법자는 주 예수께서 나타나실 때 그 영광의 광채에 압도되어 멸망할 것이다(8절). 그것이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기뻐한 모든 사람들”(12절)에게 내리는 심판이다. 

묵상: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 안에는 종말론에 대해 두 가지의 극단적 성향이 존재해 왔습니다. 하나의 극단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으니 그 날을 준비하는 일에 전념하자는 “시한부 종말론”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재림이 이미 일어났다는 “현재적 종말론”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은 현세에서의 책임과 의무를 외면하는 광신적 믿음으로 인도하고, 현재적 종말론은 신앙적인 안일과 도덕적 해이의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과 바울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건강한 종말론은 “그 때 거기서”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될 것이라는 소망으로 “지금 여기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두 극단의 신앙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은 시한부 종말론을 믿던 사람들에게 준 가르침이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2절은 현재적 종말론을 믿던 사람들에게 준 가르침입니다. 사도는 어떤 일을 보더라도 재림이 임박했다고 혹은 이미 왔다고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재림하기 전에 반드시 사탄의 대리자인 “그 불법자”가 나타나 많은 사람을 미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여 많은 사람들을 속여 자신을 신으로 섬기게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재림하실 때 먼저 “그 불법자”와 사탄을 멸하시고 모든 믿는 자들을 모으실 것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신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나타났다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서 스스로를 메시아 혹은 구원자로 자처하면서 혹세무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가 여기서 말한 “그 불법자”와 유사해 보이지만 그 자신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나타났던 미혹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불법자가 나타날 때에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부르심을 받은 대로 거룩하게 살며 사랑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기도:

주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이 저희의 마음 안에 늘 살아있게 해주십시오. 그 소망으로 오늘 이 땅에서 거룩하게 살게 하시고 사랑 안에서 자라게 해주십시오. 아멘. 

7 responses to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2절: “그 때 그곳”과 “지금 여기””

  1. billkim9707 Avatar

    믿음에서 떠나 미혹한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따르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미혹한 영과 귀신의 가르침에 유혹되어 흔들리지 않게 매일 아침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살게하시고 영생과 천국을 미리 땡겨 맛보게하시고 새하늘과 새땅의 소망으로 사는 하루 하루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토록 귀한 축복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오늘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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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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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구름이 끼고 조금 습한 토요일 아침입니다. 오늘 본문은 불법자의 위험에 대한 경고. 좀 난해하네요.

    초대교회에는 종말론과 더불어 적 그리스도 교리도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종말, 재림 등의 교리가 자칫 신비주의로 흐르면서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르려는 세력들이 초기 부터 있었다는 것 등을 짐작해 볼 수 있어요.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듯이 그 끝도 있겠지요? 전능하신 창조주,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 그 분이 인간의 이해가 아닌 신앙의 대상이듯이, 종말도 신비와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 듯 해요.

    그 때와 그 의미가 무엇일지는 알 수 없어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유 안에 완성되고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때일 것을 그저 믿고 바랍니다.

    흑암과 혼돈에 휘감긴 세상. 악한 영이 인간의 욕망과 불안, 가난과 외로움을 파고 들어 영적 노예로 만들고 있지요.

    깨어있는 오늘이 되기를. 그 날과 때는 모르나 오실 재림의 때를 기다리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려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과 고통이 없는 그 곳. 모든 것이 자기의 때에 아름다워지는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 허락하신 삶을 열심히 또 기쁘게 살아가기를. 허락하신 인생의 동산을 에덴으로 가꾸기를. 기도해요. 소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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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종말에 대해 묵상하려 하면 막막하기만 합니다. 재림설이나 종말론의 어떤 가설이나 이론도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말세야, 종말이 오나봐, 주님이 오시려나…이런 말들을 하고 삽니다. 해설에 두 가지의 종말론이 나옵니다. 시한부 종말론은 시간이 정해진 종말입니다. 미래 어느 시점에 종말의 시간이 온다고 믿습니다. 현재적 종말론은 실현된 종말론이라고도 부르는데 신약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할 때는 미래에 올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 시작되고 제자들이 (그리고 우리가) 지속해 가는 일들 즉 역사적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소서’ 하는 것은 현재적 종말론에서 나온 수사입니다. 우리는 지금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종말론적 시각을 이해하고 싶어 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를 쓴 시점은 주후 50년경으로 알려졌지만 후서를 보낸 연도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세기 교회는 복음서 (마가 주후 65년, 마태와 누가 주후 80년, 요한 주후 90년)와 요한계시록 (주후 90년) 등이 쓰여지던 활발한 문서 작업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4권의 복음서들도 요한계시록처럼 묵시문학적인 배경에서 나온 책들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묵시문학은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담고 있습니다. 현재적 (실현된) 종말론의 설명을 적용하면, 복음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세상, 하나님의 선한 뜻이 펼쳐지는 우주의 시대는 예수님으로 인해 이미 (already)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성되거나 끝이 난 것은 아닙니다. 믿는 이들이 계속해서 on going 해야 할 일, 아직 안 된 (not yet) 사건입니다. 왜? 악이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루실 완전한 정복의 때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종말론을 중심으로 삼는 묵시문학 (요한계시록 같은)은 힘 (권력)에 집중합니다. 묵시문학은 누가 힘을 가졌는가를 묻습니다. 요한계시록과 요한복음 (다른 공관복음서들도 마찬가지로)의 질문은 우주의 주인은 누구인가, 누가 세상의 주인인가 -그리스도인가 가이사인가-입니다. 종말론과 묵시문학의 연관성에 대한 좋은 예가 있습니다. 역사 (history)를 손에 비유하면, 손등은 묵시문학이고 손바닥은 종말론입니다. 역사를 보며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세상이 끝나나보다’라고 느끼는 종말론적인 감정이 손바닥에 (밑에) 흐르고, 손등은 이것을 문학이라는 해석을 통해 드러냅니다. 그래서 손등은 묵시문학이고 뒤집으면 종말의식과 감정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에게 보낸 편지는 바울의 손등이고, 손바닥에는 그의 종말론적 인식이 있는데 어제와 오늘 본문은 특히 상세하게 바울의 종말관을 보여 줍니다. 예언이나 말씀으로 바울인 척 꾸미고, 모든 것을 지배하려 들며 심지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고 능력, 거짓 기적과 표적을 보여서 사람들을 꾈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바울은 이들이 진리를 거부했기에 하나님은 그들이 헛된 것을 좇아 잘못된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셨다고 말합니다. 무서운 경고입니다. 종말에 대해 바울이 맞게 이해했든지 틀리게 생각했든지 그의 경고는 어느 시대에나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을 보면, 당장 벌어지고 있는 전세계 사건의 99 퍼센트는 ‘권력’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여러 얼굴을 하고 나타납니다. 권력 싸움이 계속되는 이 세상은 언제나 종말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묵시문학 -복음서와 계시록-과 바울의 서신들은 한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누가 세상의 주인인가. 주님, 주님의 나라를 기다립니다. 그 나라에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빚어 주세요. 우리의 영과 혼과 육신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그 날까지 아무 흠없이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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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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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gachi049 Avatar
    gachi049

    사탄의 하수인들인 사이비 종교들이 여러모양으로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더욱 악랄한 방법으로 권력을 등에 업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묶어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다음 세대인 젊은 이들을 집단으로 세뇌시키고 있는 형편입니다.

    주님. 더이상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나님의 선한 능력에 힘입어 그들을 돌볼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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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오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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