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장 13-16절: 말씀이 살아 움직이도록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앞에서 사도는 자신들이 얼마나 진실하고 헌신적으로 그들을 섬겼는지를 회상했는데, 이어서 그는 말씀을 대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태도를 칭찬한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실제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13절). 그렇게 받아들였기에 그 말씀은 그들 가운데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박해에 짓눌리지 않고 믿음을 지킴으로써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었다(14절).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조상들로부터 내려 온 죄를 이어받아 예수님을 박해하고 바울을 박해 했으며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있다(15절). 그들은 이방인들을 향한 바울의 전도를 방해해 왔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조상이 쌓은 “죄의 분량”(16절)을 채워가고 있다. 예수께서도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을 책망하면서 “너희는 너희 조상의 분량을 마져 채워라”(마 23:32)고 하셨다.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이르렀습니다”라는 말은 이 편지가 쓰여지기 전 해에 있었던 예루살렘 대학살 사건을 염두에 둔 말처럼 보인다. 48년에 로마 군은 유대인들의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2-3만 명을 살해했다. 

이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17절) 머지 않아 만나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실제로 사도는 데살로니가로 가기 위해 몇 번 노력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사도는 이것을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였습니다”(18절)라고 표현한다. 그가 그들을 그렇게 만나기를 바라는 이유는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분 앞에 내놓을 것은 오직 그의 희생을 통해 구원 받은 영혼 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19-20절).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묵상: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그들을 택하여 지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바울과 그 일행이 보여 준 모범을 기준으로 삼고 본 받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인 말씀은 그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13절) 있었습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그들로 하여금 환난과 시험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힘이 되었습니다.

말씀이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기서 봅니다. 첫째, 전하는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는 여러분에게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습니다”(1:5)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늘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사람의 이념이나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2:2) 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그 말씀이 ”하나님의 검정“(2:4)을 받을 만한 것인지를 늘 엄밀히 따져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전하기 쉽습니다. 

셋째,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순전한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마음에 깨우침이나 도전이 올 때, “아멘!”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말씀은 성령의 검이 되어 숨겨진 죄를 드러내고 악습을 끊어내며 거룩한 성품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영적으로 너무나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무속과 주술이 득세하고 있고, 이단 종파가 세력을 무한히 확장시키고 있으며, 정통 기독교계 안에서도 인간적인 이념과 사상을 복음으로 둔갑시켜 사람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방법으로 인간에게서 영광을 구하고 있고, 예배를 빙자하여 정치 권력과 금전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생명처럼 지킨 복음의 원리를 정반대로 뒤집어 놓은 형국입니다. 

기도:

오늘의 영적 현실을 보시고 주님께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시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불같이 진노하셔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오, 주님, 저희가 이 시대에 남은 자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돈독히 전하게 하시고, 말씀을 듣는 이들은 겸손히 분별하며 경청하게 해주십시오. 성령과 말씀의 능력이 다시 회복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6 responses to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16절: 말씀이 살아 움직이도록”

  1. billkim9707 Avatar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떠나 미혹의 영과 사탄의 가르침을 따르고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만,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허락하신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비록 세상에서 비난을 종종 받지만 부활하신 주님의 교회인것을 확신합니다, 매일아침 영의 양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드리고 주님닮아가고 말씀순종하며 승리의 삶을 살아내는 사귐의소리 식구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Liked by 1 person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Like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선선해졌습니다. 벌써 가을이 다가오는 것일지요?

    오늘은 대살로니카 교회에 살아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 이야기. 단 3주 간의 짧은 만남. 그동안 사도는 몇번이나 말씀을 전할 기회를 가졌을까요?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뿌려진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돋우더니 박해와 고난을 견디는 굳건한 나무가 되었어요. 어떻게 그런 일이?

    하나님의 선택? 성령의 권능? 메시지의 능력? 메신저의 매력? 네 그 모든 요소들이 함께 적용하여 일종의 화학적 변화를 일으킨 것이겠지요.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

    한주를 시작합니다. 모두가 휴가를 떠나 좀 여유있는 한 주. 그래도 삶은 녹녹치 않습니다. 걱정과 염려는 늘 마음을 사로잡지요. 또 사탄은 우는 사자처럼 삼킬자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어요. 깨어있는 삶,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는 오늘이 되기를.

    제게 허락하신 삶의 작은 동산. 그곳을 에덴으로 가꾸는 인생이 되었으면. 제게 허락하신 교회. 그곳이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 곳 견고한 반석, 진리와 성령의 성채로 굳게 굳게 세워지기를.

    바라고 기도해요. 아빠 우리 아버지.

    Liked by 1 person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하는 동시에 그들을 괴롭히는 이들이 어떤 점에서 잘못하고 있는 지를 지적합니다. 유대에 있는 교회들도 비슷한 처지에 있는데 (14절),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예언자들을 죽이고 쫓아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모든 이들의 원수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인 바울이 동족 유대인의 잘못을 직접적으로 꼬집습니다. 요즘 언어로는 ‘내부 총질,’ ‘내부 갈라치기’ 라는 제목이 붙을만한 지적입니다. 독자로서 우리는 바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편지를 읽습니다만, 당시의 분위기에서 중심을 못 잡고 이게 옳은가, 저게 옳은가 고민하는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분별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소식은 ‘…카더라’ 방송 수준보다 훨씬 높은 신빙성이 있었던 게 분명합니다. 곳곳에서 예수님으로 인해 변화된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혹은 담대하게 말하기 시작했고 그런 일들이 유다와 여러 지방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50년쯤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사람들의 존재와 인식에 미친 영향은 시간과 함께 고조되었을 뿐 감소되거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광주 민주화운동에 ‘비교’ 할 수는 없지만, 오월항쟁 사건도 45년 전의 일이지만 잊혀지거나 미미한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각자 의견이 있고 개인적인 의미 부여의 수준이 다릅니다. 그러나 광주의 그 시간이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말에 이의를 걸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당시의 정부와 언론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사회 안정과 체제 유지라는 목표 밑에서 얼마나 많은 아픔과 고통이 생겨났는지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보는 유다의 기득권도 사회 안정과 체제 유지가 우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기득권자였습니다. 유다의 미래는 유다의 ‘유다 다운’ 정체성을 지키는 데 있다고 믿었습니다. 유다 답다는 것,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뜻은 율법과 관습, 역사와 문화를 어그러 뜨리지 않고 잘 보존한다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금방 끝낸 출애굽기의 모세와 백성의 삶에서 보았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다의 유다 다운 삶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의 복음을 바울보다 더 잘 전할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유다인의 세계관에 철저하게 잠겨 있던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마음을 바꾼다, 하나님을 새롭게 본다,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것은 ‘사람의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기적이며 혁명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널리 멀리 퍼져 나갔습니다. 재림의 기대라는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갔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만큼 핍박이나 고난도 컸습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 – 바울과 여러 사도들의 증언이 맞는지, 유대교 정통 지도자들의 말이 맞는지 – 분별하기 어려운 시대에 위험한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이고 믿은 사람들은 정말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이리도 용감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 때도 지금도 세상은 예수의 사람들이 용감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사회 안정과 체제 유지에는 용감한 사람들이 필요 없습니다. 교회가 받은 사명이 무엇인지 묵상합니다. 교회인 나의 선택은 무엇인지 묵상합니다.

    Liked by 2 people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Like

  4. gachi049 Avatar
    gachi049

    유대 율법학자와 바리세파 들에게 선교를 방해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이르는 무서운 죄값을 받는다는 바울의 경고(16)와 예수님께서“너희는 너희 조상의 분량을 마져 채워라”(마 23:32)라는 저주석인 경고가 무섭게 여겨집니다. 주님. 세상은 종교가 정권에 빌 붙어 그들의 야욕을 채워가는 현실입니다. 어떤 핍박과 고난이 찾아와도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고 주신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Liked by 1 person

Leave a reply to young mae kim Cancel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