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9장: 거룩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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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이어지는 지침은 제사장을 세우는 절차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구별하여 세우는 절차”(1절)라고 표현한다. ‘거룩’을 의미하는 히브리서 ‘카도쉬’는 ‘구별하다’는 뜻이다. 본질상 거룩한 존재는 하나님 밖에 없다. 인간과 모든 피조물은 본질상 부정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한 절차에 따라 구별해 내야 한다. 절차를 따라 구별해 낸 것을 “거룩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제사장은 죄인들 가운데 거룩한 존재로 구별해 내고 모든 백성이 그 구별됨을 인정함으로써 그 직분을 수행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백성이 제사장의 구별됨을 인정할 수 있도록 매우 정교하고 복잡한 절차를 지시하신다(2-37절). 그 절차들은 일 주일 동안 진행되어야 한다. 백성으로 하여금 제사장의 거룩성을 인정하고 그 권위에 순종하게 하기 위한 배려다. 그들이 제사장에 대해 가지는 마음 가짐은 곧 하나님에 대한 마음 가짐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절차를 통해 거룩하게 구별된 제사장은 성막 제단에서 매일 아침과 저녁에 일 년 된 수양으로 번제를 드려야 한다. 또한 정해진 곡식제물(소제)과 부어드리는 제물(전제)을 함께 바쳐야 한다(38-41절). 매일의 번제는 하루도 쉬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내가 거기에서 너희를 만날 것이고, 거기에서 너희에게 말하겠다……거기에서 나의 영광을 나타내어 그 곳이 거룩한 곳이 되게 하겠다”(42-43절)고 약속하신다. 그분은 계속하여 “내가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머물면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겠다”(45절)고 말씀하신다.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는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46절).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제사장의 나라로 만들어 모든 민족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묵상:

율법은 무엇을 거룩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거룩은 ‘거룩하다고 구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정교한 절차를 통해 무엇인가를 거룩하다고 구별해 놓고 그것을 거룩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본질상 거룩하지는 않지만 거룩한 것으로 간주하자는 합의에 의해 율법 종교는 유지되었습니다. 성막도, 성구도, 제사장도, 제사장의 예복도 본질상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정해진 절차에 의해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었고 백성이 그렇게 인정했을 뿐입니다. 

이렇듯 율법은 모든 것을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으로 구분했습니다. 제사장은 거룩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성막은 거룩하고 다른 장소는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안식일은 거룩하고 다른 날들은 부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고 다른 모든 백성은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거룩한 음식이 있는가 하면 부정한 음식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함과 부정함을 나누는 전통과 관습을 모두 부정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본질상 거룩하며, 그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안식일만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모든 시간이 거룩하고, 제사장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거룩하며, 이스라엘 백성만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피조물은 모두 거룩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막 7:19)고 선언하셨습니다. 본질적으로 거룩한데 죄로 인해 부정해졌으니, 이제 그 거룩성을 회복하면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일부의 사람만이 구별됨을 받아 거룩한 제사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은 모두 거룩한 제사장이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 모두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 2:9)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또한 믿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불렀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는 이미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율법 규정들을 읽고 묵상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래서 얼마나 감사한지,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새삼 깨닫습니다. 찬미 예수!

기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저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고, 성령을 통해 저희를 의로운 존재로 변화시켜 주시는 성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더 많이 누리는 것이 생의 목적이 된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돈독히 살아가도록 저희를 붙들어 주십시오. 아멘. 

6 responses to “출애굽기 29장: 거룩하다는 것”

  1. billkim9707 Avatar

    그토록 복잡한 여러가지의 제사를 드리지않고 단 한번의 제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온전하고 영원한 대속 제물이 되셔서 부족하고 비천하고 추악한 인간들을 거룩하다고 인정해주신 그토록 엄청난 은혜에 감사와 영광을 드려올립니다.

    지금 부터라도 거룩한 제사장에 걸 맞은 삶을 살며 가정과 교회와 이웃의 은혜와 구원의 통로가 되도록 인도 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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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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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햇볕이 강하지만 그늘에서는 그래도 꽤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있는 아침입니다. 제사장을 정별하는 의례에 대한 본문.

    세상 모든 종교에서 정별 (consecration)은 일종의 공통 언어인 듯 해요. 정한수 한 사발을 떠놓고 이름도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치성을 드리던 민속 신앙에서 국왕이 종묘에서 드리는 국가제례까지.

    이스라엘 정별의례의 독특한 테마는 끝없이 반복되는 도축과 피를 통한 죄 씻김 아닐지요?

    일년 내내 아침, 저녁에 번제를 반복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제사의 불완전성, 그리고 속죄의 유한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율법이라는 지도를 받았지만 그 지도에는 길이 없지요. 그러니 길을 잃고 있는 것은 알아도 집으로 돌아가지는 못해요. 양의 문이 되신 주. 그가 보혈로 길을 여실 때까지.

    제사는 더이상 쓸모를 잃게 되었고 제사장의 제도는 폐지되요. 모두가 이스라엘이 되고, 주의 제자 그의 친구가 되었지요.

    메트로를 타고 출근합니다. 오늘도 생명과 건강, 그리고 쓸모를 허락하셔서 감사. 오늘 하루가 주께 올려드리는 한편의 노래가 되기를.

    제게 믿음 주시기를. 그래서 소망과 확신, 기쁨과 감사가 낙심과 실망, 의심과 불안의 힘을 이기는 삶의 능력이 되기를. 바래요. 또 기도해요. 아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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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achi049 Avatar
    gachi049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피조물, 인간을 로버트로 창조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을, 사탄의 말에 속아 넘어가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한 선악과를 먹음으로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거룩하게 되기위해 이렇게 복잡하고 수많은 짐승의 희생과 피남새나는 과정이 계속되었다면 과연 믿는 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예수님의 속제제물, 십자가의 보혈로 인하여 우리 모두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 2:9)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했고 사도 바울은 또한 믿는 사람들을 ‘성도’라고 불렀으며. 믿음 안에서 이미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예수님을 믿고 주안에서 행복한 삶을 살게하신 은총에 감사 드립니다. 그러나 믿음은 자전거 원리처럼 페달을 밟지 않으면 쓰러집니다. 

    주님. 날마다 공급하는 영의 만나를 먹고 힘을 얻어 말씀을 묵상하고 주시는 은혜를 나눌때 믿음이 굳건하게 유지되고 발전될 것임을 믿습아오니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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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성경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읽고 있는 본문에 집중이 되지 않고 마음이 자꾸 떠납니다. 오늘이 좀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지만 제물을 태워서 바치는 고대 종교예식과 별 차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어린 양을 한 마리씩 바치고 매일 수소도 한 마리씩 일주일 동안 바칩니다. 태우고 삶고, 흔들고 붓고…이렇게 하기 전에 숫양을 잡아 그 피를 받아 아론과 아들들의 귓볼에 바르고 엄지 손가락, 엄지 발가락에 바릅니다. 제단 둘레에 뿌립니다. 올리브 기름과 양의 피를 섞어 아론과 아들들이 입은 옷 (그 아름다운 옷!)에도 뿌립니다. 그렇게 하는 행위로 그들은 거룩하게 됩니다. 거룩하게 되어야 제사장의 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거룩하게 하는 제의가 심히 불편하게, 심지어 역하게 까지 느껴지는 것은 시대적인 간격 때문일까요. 고대인과 감수성이 달라서일까요. 제사 지내는 방법 외에 불편한 부분이 또 있습니다. 정작 하나님은 이런 제사가 싫다고 하신다는 겁니다. 너희의 제사가 역겹다고, 신물이 난다고 하십니다.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막에서 성전으로 옮겨온 뒤 더욱 화려하고 풍성하게 올려지던 제사는 사라졌습니다. 과자와 번제물을 함께 태워 올릴 때 나는 냄새가 여호와를 기쁘게 한다 (25절)고 말씀하셨는데 더 이상 그런 제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떠났습니다. 이걸 알고 본문을 읽으니 마음이 어수선합니다. 어디서 잘못된건지 추적하고 싶어집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균열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요. 제사 어디가 잘못되어 하나님은 고개를 돌리신걸까요. 제사에 정성이 빠져서일까요. 처음 할 때는 떨리는 마음으로 틀리지 않고, 어긋나지 않게 하려고 온 신경을 써서 하다가 점점 익숙해지니까 자동적으로 척척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건성건성 올리게 된 것일까요. 제사장이나 백성이나 같이 노련해지고 꾀를 부리게 되었겠지요. 하나님의 기대가 너무 높거나, 사람의 한계가 너무 낮거나…지속될 수 없는 명령, 지속할 수 없는 제사 아니었을까요. 어디서 잘못되었을까 생각하다 보니 지금은 어떤가로 생각이 바뀝니다. 매주 드리는 예배, 수요일 금요일 예배, 특별집회, 새벽 기도, 묵상, 절기 예배…거룩해지는 구별을 위해 드리는 제사 (예배)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요. 주의 지혜와 빛으로 깨달음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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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blissful2a0acacad4 Avatar
    blissful2a0acacad4

    화려한 제사장의 모습은 오히려주님을 잊어버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주님은 십자가로 그 지워진 자리에 다시 찾아 오십니다.

    세상의 널브러진 반짝이를 쫓는 사람들 속에 서 있는 우리에게로 오십니다.

    흠모할 아름다움이 없는 모습으로, 멸시를 받고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자로 오셔서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담당하십니다.

    자꾸만 끊임없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죽어야만 주앞에 갈 수 있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님을 부르며 넉넉히 그 곁으로 가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을 지우듯 거룩함은 죄를 없애버립니다. 그 은혜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순간에 함께 하시는 거룩하신 주 앞에 거룩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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