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2장 1-15절: 더불어 살기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앞의 율법 규정(21장 12-36절)이 제 6 계명 즉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시행 세칙이라면, 22장 1-15절은 제 8 계명 즉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시행 세칙이다. 

소나 양을 도둑질 하여 잡거나 팔면 소는 다섯배로, 양은 네배로 갚아야 한다(1절). 밤에 도둑이 들었을 때, 그 도둑을 때려 죽게 했다면 살인에 해당하지 않는다(2절). 하지만 해가 뜬 다음에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살인죄에 해당한다(3절). 모든 경우에, 도둑질한 물건은 반드시 물어내야 하고, 가진 것이 없으면 자기 몸을 종으로 팔아서라도 갚아야 한다. 도둑질한 가축이 죽지 않았으면, 두 배로 물어 주어야 한다(4절).

자신이 기르는 가축이 다른 사람의 농작물을 망쳐 놓았을 때는 자신의 농작물 중에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해야 한다(5절). 불을 놓다가 다른 사람의 밭을 태웠다면, 반드시 물어주어야 한다(6절). 다른 사람에게 맡긴 물건을 도둑 맞았을 때, 도둑이 잡히면 두배로 배상해야 하고, 잡히지 않으면 그 물건을 맡은 주인은 하나님 앞에서 결백을 확인 받아야 한다(7-8절). 어떤 물건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생기면 하나님 앞에서 판결 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은 상대방에게 두배로 갚아야 한다(9절). 

이웃에게 가축이나 물건을 맡겼는데, 그것이 죽거나 다치거나 사라졌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결백을 증명해야 한다. 피해자가 그 결백을 인정하면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10-11절). 도둑 맞은 것이 확실하면 맡은 사람이 배상해야 한다. 가축이 맹수에게 물려 죽었다면,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12-13절). 이웃에게서 가축을 빌렸을 때, 주인이 보는 앞에서 그 가축이 죽었다면 배상 책임이 없으나, 주인이 보지 않았다면 배상해야 한다. 대여료를 받고 그 가축을 빌린 것이라면, 대여료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다(14-15절).

묵상: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단일체가 아니라 삼위일체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공동체로 존재하시고 활동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으셨다는 말에는 우리가 서로 연합하여 더불어 살도록 지어졌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공동체적인 하나님이 인간을 공동체적인 존재로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서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점에서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의 생명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이며, 셋째는 다른 사람의 명예입니다. 십계명의 제 6 계명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라는 뜻이고, 제 7 계명과 8 계명은 다른 사람의 소유권을 존중하라는 뜻이며, 제 9 계명은 다른 사람의 명예를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다른 사람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여러 상황에 대해 규정합니다. 인간은 서로 더불어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지어졌으나, 죄로 인해 공동체성이 깨어지고, 각자도생이 새로운 삶의 원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몫을 키우기 위해 부심합니다. 그 마음을 잘못 다루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어서라도 자신의 몫을 불리려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현실 지옥으로 만드는 이유입니다. 

살인의 경우처럼,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고의성에 있습니다.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의 소유권을 침해한 경우에는 힘에 부치도록 보상해 주도록 규정합니다.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함부로 탐하지 않게 하려는 뜻입니다. 과실 혹은 부주의로 인해 다른 사람의 재산권에 손해를 끼친 경우에도 배상의 책임을 부과함으로써, 선한 이웃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도록 요청합니다. 그래야만 깨어진 세상이 더 심하게 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에게 “자족의 비결”을 알게 해주십시오. 힘껏 노동하여 얻는 수입에 자족하며, 이웃의 어려운 이들을 돌아보게 해주십시오. 각자도생이 새로운 원리가 된 이 시대에 이방인이 되어 더 많은 이웃을 품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responses to “출애굽기 22장 1-15절: 더불어 살기”

  1. billkim9707 Avatar

    모든것을 아시는 전지전능의 삼위일체(코람데오) 하나님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기를 원합니다만 상대방을 의심하고 남들의 의심을 두려워하며 살아온 처량한 존재입니다.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 살지만 정의와 공평의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바라보며 세상에 눈치를 보지말고 신실하고 정직하게 살기를 원 합니다.

    비록 세상이 비난하고 누명과 배반을 당할때에도 모든것을 아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아시니 억울해 하지말고 즐겁고 감사의 마음으로 마지막 숨쉴때 까지 살도록 도와 주십시오.

    전지전능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려 올립니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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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chi049 Avatar
      gachi0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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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온세상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취득하기 위해 온갖 범죄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기주의의 극치로 달려가는 나라로 인하여 세계가 혼란을 격고 약한 나라는 더 약해 지는 현상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주 좋지 않는 현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로버트 같이 만드시지 아니하고 서로 돕고 협력하면서 살아가도록 창조 하셨습니다.

    주님. 강한자는 약한자를 돕고 가진자는 어려운자에게 베플고 주님이 주신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타적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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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상식의 선을 지키는 것도 어려워진 세상에서 그 이상으로 더 많이, 더 깊이, 더 뜨겁게 사랑하고 돌보라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어제는 칼팩 연회의 첫 날이었습니다. 올해 연회장소는 팜스프링스인데 매일 출퇴근 할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호텔에 묵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어서 온라인으로 참석과 투표자로 등록을 했습니다. 연회의 주제는 ‘cherish’ 입니다. 소중히 여기며 돌보자는 뜻입니다. 체리쉬할, 소중히 여겨야 할 대상은 많습니다. 가족, 교회, 자연, 이웃, 친구, 나라, 자녀, 전통, 가치, 무형과 유형의 재산, 자기 자신…감독은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나고, 고통의 무게에 짓눌리고, 힘든 현실 앞에 좌절한 이들이 설령 교회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교회가 왜 필요하냐고 묻더라도 답은 사랑이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자고, cherish one another, love one another. 그리고 감독은 빨간 종이 하트를 몇 장 손에 들고 그 하트에는 지난 1월에 발생한 엘에이 산불로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써달라고 연회 오피스로 보낸 헌금의 액수와 보낸 사람의 지역을 적었다며 하트를 읽었습니다. 필리핀에서, 엘에이 어느 교회에서, 중남부 연회가, 개인이, 대형 교회에서… 천 불, 이십 불, 몇 백불, 십만불… 유럽에 감독회의를 하러 갔을 때 우크라이나 교회의 교인이 자기를 위로했을 때 크게 감격했다는 말도 전했습니다. 전쟁이 난 그 우크라이나의 교인이 나를, 미국에서 온 나를 위로하는구나…감독은 자기 손에 있던 하트를 읽고 난 뒤에 박스 하나를 들고 단에서 내려왔습니다. 그 박스 가득 빨간 하트가 잔뜩 들어 있었습니다. 참석자들도 하트를 읽어 보라고, 연회 오피스로 보낸 사랑의 메시지를 읽고 사랑을 받았으니 우리도 또 사랑하자며 헌금액이 적힌 하트들을 나눠주었습니다. 현장에 있었으면 아마 울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사는 일의 대부분은 생명과 재산, 자존감이나 명예를 지키고 보호하는 일입니다. 대부분이 아니라 전부겠습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고 사는 데 필요한 재산 일구고 자존심 잃지 않으며 당당하게 사는게 ‘살아가는 일’의 내용이고 목표라고 해도 틀린 말 아닐겁니다. 내가 그렇듯 남도 그렇습니다. ‘사는 게 다 같다’는 말은 이래서 맞습니다. 목표는 같아도 목표까지 가는 방식이 다르니 사는 모습이 다 다르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상식과 법은 공통점은 확인해 주고 다른점은 조절해 주기 위해 있는겁니다. 오늘 말씀을 읽으면 잘못을 범한 사람과 피해를 입은 사람은 언제라도 자리가 바뀔 수 있는 것을 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받았는데 돌아서서 바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실수인 경우와 의도가 있는 경우, 의도하지 않았으나 심각한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경우 등등의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본문의 규정으로는 부족합니다. 법전이 두꺼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며 사는 삶의 특징은 복잡함이 아니라 단순함입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일에는 사랑을!’ 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꿈꿉니다. 본질과 비본질의 구분에 있어서도 (교단의 총회는 이 둘을 구분하는 데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랑과 포용을 하는 성숙한 사회를 꿈꿉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일에 부실해도 주님께서는 선한 길로 인도하시며 사랑 받고 있음을 기억하게 해 주십니다.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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