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1장 12-36절: 하나님의 배려심으로

2–4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살해 의도를 가지고 살인을 한 경우(일급 살인)에는 사형에 처해야 한다(12절). 실수로 다른 사람의 목숨을 해쳤다면(이급 살인, 과실 치사), 도피성에 피할 수 있다(13절). 도피성에 피신한 과실 치사범은 누구도 잡아갈 수 없으나, 일급 살인범의 경우는 성전 제단에 피한다 해도 사형으로 엄벌해야 한다(14절). 부모를 살해한 경우(15절), 유괴한 경우(16절), 부모를 저주한 경우(17절)는 모두 사형으로 다스려야 한다. 

이웃과 싸우다가 그 사람을 상해한 경우에는 완치될 때까지 손해 배상과 치료비를 부담해 주어야 한다(18-19절). 주인이 노예를 때려 죽게 했다면, 그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20절). 즉사하지 않았다면, 주인에게 죄를 묻지 않아도 된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기 때문이다”(21절). 

싸우던 중에 임신한 여자를 낙태하게 했다면, 돈으로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22절). 만일 그 여자가 낙태와 함께 신체적인 상해를 입었다면,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23-25절) 갚아야 한다. 당한 만큼만 되갚아 주라는 뜻이다. 만일 주인이 노예의 눈을 멀게 하거나 이를 부러뜨리면, 그에게 자유를 주어 내보내는 것으로 배상해야 한다(26-27절).

사람을 해친 소는 반드시 죽여야 하고, 그 고기도 먹어서는 안 된다(28절). 소의 임자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자신의 소에게 사람을 받는 버릇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방치하여 누군가를 죽게 했다면, 소와 주인을 모두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29절). 만일 피해자 가족이 합의한다면, 재판관이 정하는 배상금으로 대신할 수 있다(30절). 어린 소년이나 소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 같은 법을 적용해야 한다(31절). 목숨의 가치는 어려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종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소 임자는 종의 주인에게 은 삼십 세겔을 주고 그 소는 죽여야 한다(32절). 한 세겔은 성인 노동자의 4일 품삯에 해당했으므로, 은 삼십 세겔은 인간의 목숨에 대한 최소한의 값이다. 

만일 가축이 다른 사람이 파 놓은 구덩이에 빠져 죽으면, 구덩이의 주인은 돈으로 배상해야 한다. 그럴 경우, 죽은 가축은 구덩이 주인의 것이 된다(33-34절). 어떤 사람의 소가 다른 사람의 소를 받아서 죽게 한 경우, 살아 있는 소를 팔아서 그 값을 반으로 나누어 갖고, 죽은 소의 고기도 반으로 나누어 갖는다(35절). 하지만 그 소에게 받는 버릇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방치하여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 사람은 피해자에게 살아 있는 소로 배상하고, 죽은 소는 자신이 가질 수 있다(36절). 

묵상:

앞에서 말한 것처럼, 율법 규정들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치의 최상을 담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과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전제한 상태에서 주어진 최소한의 안전 장치입니다. “종은 주인의 재산이다”(21절)와 같은 말은 당시 인간 사회의 통념을 지적한 것입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되기 전에 노예 소유주들은 이 말씀을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하여 노예들을 착취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대로,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생긴 현실이지, “원래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에게 등급을 매기고 차별한 것은 타락 이후의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면, 모든 차별의식이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사형 제도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겁습니다. 사형 제도를 찬성하는 사람들 중 다수는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사형에 대한 율법 규정을 근거로 듭니다. 심각한 범죄에 대해 사형으로 다스리라는 명령은 도덕 의식이 매우 낮았던 모세 당시의 상황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처음 국가가 형성되는 단계에서 일벌백계의 엄한 징계가 아니고는 사회 질서가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범죄자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의 뜻은 사랑입니다. 또한 인간 생명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그것을 기억한다면, 사형 제도를 허용한다 해도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할 것입니다.

율법 규정을 읽으면서 우리는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다양하게 표출되는지를 보며 놀라야 하고, 그 불의하고 부조리한 사회 안에서 약자들을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배려를 보고 감탄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도 이 불의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주위를 살필 수 있습니다.

기도:

주님, 주님의 마음을 저희에게 주십시오. 주님의 눈으로 그늘진 세상을 보고, 주님의 귀로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해주십시오. “비루함이 높아지고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고 있는”(시 12:8) 이 시대에 정직과 진리로 살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4 responses to “출애굽기 21장 12-36절: 하나님의 배려심으로”

  1. billkim9707 Avatar

    지난날 알게 모르게 수없이 남들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었습니다, 주님의 잣대로 보면 일급살인 또 이급살인한 중범죄자 입니다, 십자가가 마땅히 사형받아야할 나의 도피성입니다. 앞으로는 이웃에게 위로가되고 도움이되는 제자의 삶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비록 해를 당하더라도 7번에 70번 용서하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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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chi049 Avatar
      gachi0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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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으나,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지울 수 없는 죄성을 가지고 태어나 살면서 그죄가 더욱 간악한 죄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소한의 율법으로 죄를 다스리도록 했으나 죄는 더욱 악해졌습니다. 이율법대로 백성들을 다스린다면 살아남을 자가 없음을 아시고 사랑의 율법,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주님의 마음을 담아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도록 믿음의 공동체에게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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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법의 기초는 상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식은 사회의 구성원이 보통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하는 지식입니다. 일반적인 지식, 이해력, 판단력, 사리분별 능력을 통칭합니다. 상식은 그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관과 지식, 믿음, 행동 양식을 포함하며 의무교육으로 받은 학습 내용이 기준이 됩니다. 모두가 알만한 정보도 상식으로 취급합니다. 상식은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고, 새로운 정보나 이해가 상식을 재정립하기도 합니다. 법의 기초 단위가 되는 상식을 또 작게 잘라보면 상호존중과 상생이라는 기본 개념이 남습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하다고 보는 지식이 그 사회의 상식입니다. 상식을 지키면 서로 안전하게 느끼고, 상식적이지 않은 일을 보면 위험을 받습니다. 법은 사회적 약속입니다. 서로 지키자고 긋는 선입니다. ‘상식’이라고 동의하는 선을 크고 넓게 그려 놓아야 자유하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관세 가이드라인이 출렁거리자 전세계가 크게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상식적이지 않아서 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 내용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그저 노예 제도가 있던 사회의 상식적인 룰이라고 읽을만한 내용입니다. 남에게 해를 끼쳤으면 갚아야 한다는 약속이 중심입니다. 해를 끼치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고 살라는 것이 밑에 깔린 의도이겠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명령이 없었다면 이스라엘 사회는 어땠을까요. 모세와 아론이라는 지도자가 있었고, 이드로가 제안한대로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등을 두어 백성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는 방법도 생각해 냈으니 비상식과 혼란으로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의 이 백성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회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무리입니다. 이들의 상식은 사람의 상식 플러스 하나님의 상식입니다. 나는 이것이 이스라엘의 어드밴티지라고 봅니다. 유대인의 ‘힘’은 이 차이에서 나온다고 봅니다.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다 머리를 싸매고 최선을 찾을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자기들의 최선 플러스 알파 (정말 알파!)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부러운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우리도 예수님 카드가 있고, 예수님 챈스를 쓸 수 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나님의 법과 상식을 우리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의 상식이 닿지 않는 곳에 하나님의 마음을 비추고, 사람의 법이 지키지 못하는 곳에 예수님의 사랑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요. 어제 타주에 살다 친척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엘에이로 돌아온 예전 교회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의 주변에 있는 엄청난 부자 이야기를 하면서 베풀기는 커녕 필요한 일에도 자기 돈은 안 내놓으며 징징대기만 하는 그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거 아니냐는 말을 했습니다. 없는데도 많은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사람도 문제지만, 있는데도 없다며 안 쓰고 살면 그건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겁니다. 내게 있는 주의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 나도 그이처럼 인색하게 구는건 아닌지 잠시 생각해 봅니다. 법과 상식이 우리의 최소라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지키는 최소한의 도리라면,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나는 상식 이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급진적’이라는 단어에 정치색이 칠해 지면서 교회도 교인도 상식 선만 지키면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이지만, 예수의 말과 행동은 그 당시의 상식을 뛰어 넘는 래디컬 러브였습니다. radical hospitality, radical love, radical theology, radical teaching, radical forgiveness… 엄청 받고 조금 내놓는 내 모습이 부끄러운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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