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5장 1-9절: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장로들과 충분한 시간을 가진 후 바로를 찾아갈 준비를 한다. 바로의 허락이 떨어지면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한 다음, 두 사람은 바로를 찾아간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바로에게 가라고 하셨는데(3:18), 어쩐 일인지 모세는 아론만 데리고 바로의 궁으로 간다. 

그들이 바로를 알현하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절대 왕국의 최고 권력자가 노예 백성의 대표의 면담을 허락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에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1절)의 명령이라면서, 광야로 나가 절기를 지키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게 허락해 달라는 것은 전략적 요청이다. 처음부터 이집트를 떠나게 해 달라고 요청하면 바로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그보다 작은 요청으로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바로는 모세와 아론이 말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허락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2절). “그 주가 누구인데” 혹은 “나는 주를 알지도 못하니”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신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의 요구를 허락하지 않으면 “주님께서 무서운 질병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 것”(3절)이라는 말로 바로를 설득한다. 다신교 문화를 가진 이집트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을 진노하게 하면 그 신으로부터 벌을 받는다고 믿고 있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나면 바로에게는 소중한 노동력을 잃는 결과에 이른다. 

바로는 그것을, 노동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로 여기고 거절한다(4절). 5절에서 바로가 한 말은 번역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새번역은 “그들이 이집트 땅의 백성보다도 더 불어났다”고 번역했는데, 개역개정은 “이제 이 땅의 백성이 많아졌거늘”이라고 번역했다. 개역개정의 번역을 따르면 의미가 더 잘 통한다. 바로는, 이집트 백성이 크게 불어났기 때문에 히브리 사람들의 노동력이 더 필요해졌다면서, 사흘 동안 일을 쉬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묵상:

이제 바로가 무대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출애굽기에서 바로는 “악의 전형”입니다. 인간이 죄성에 함몰되면 어떤 사고와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 주는 모델입니다. 따라서 독자는 바로의 말과 행동을 세밀하게 관찰하면서 동일한 악이 자신 안에 있지 않은지 혹은 우리 사회에 재현되고 있지 않은지를 물어야 합니다.

모세와 아론의 요구를 대하는 바로의 태도에서 가장 먼저 드러나는 악의 모습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가 히브리 사람들을 필요로 한 유일한 이유는 그들의 값싼 노동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인간다운 삶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히브리 사람들은 가축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자신과 이집트 백성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는 순간, 우리는 인간으로서 그에게 부여된 절대적 가치에 눈 멉니다. 그 사람의 이용 가치를 따지고, 이용 가치가 있는 한 곁에 두지만, 이용 가치가 없다 싶으면 가차없이 폐기합니다. 인간에 대한 모든 악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대단한 권력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절대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 중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만큼 인간을 높이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으로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그 사람을 천부적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아무런 유익도, 쓸모도 없다 해도, 인간인 이상 그 사람은 존중 받아야 합니다.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에게 주님의 형상을 부여하시고 창조의 꽃으로 대우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죄로 인해 깨어진 주님의 형상이 성령의 은총 안에서 오롯이 회복되게 해주십시오. 사람을 대할 때 저희가 얻을 유익을 계산하는 죄된 습성을 늘 경계하게 하시고, 누구를 만나든 저희에게 찾아오신 주님을 맞는 것처럼 대하게 도와 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7 responses to “출애굽기 5장 1-9절: 도구가 아니라 목적으로”

  1. gachi049 Avatar
    gachi049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읍니다(창 1:27).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잊고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모든 인간을 물건 처럼 취급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말씀을 통해 알려주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주님. 이웃을 귀히여기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남은 여정이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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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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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illkim9707 Avatar

    자신의 탐욕을 위해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는 처지입니다. 오늘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특히 가장 약하고 누추한 고아를 대접하는것이 주님께 영광인것을 압니다. 모르는 사이에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를 대접하는 날이 되기를 원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의 형상으로 지움받은것과 온 인류의 영혼 구원을 위해 오신 구세주를 깨닫고 살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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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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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공기는 서늘하고 햇살이 좋은 목요일 아침입니다. 바로를 만나 메시지를 전하는 모세와 아론. 바로의 답은 간단합니다. I do not know the Lord. 그리고 오는 역풍. 바로는 히브리 노예들의 노역량을 더 늘릴 것을 명령하지요.

    애굽은 죄의 사슬과 악의 지배를 상징하겠지요? 그것은 내 밖의 세상이기도 하고 내 삶의 상태, 그리고 내 자아 그 자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Let my people go. Let go. 애굽에 맞서 일어서는 순간 거기에는 댓가 곧 고난이 따르는 것 아닐지요?

    묵상 말씀처럼 악의 본질은 인간을 도구로 취급하며 usefulness의 잣대로만 사람의 값을 매기는 것. 메트로로 출근합니다. 오늘도 누군가에게 쓸모를 보이고 자신있게 노력의 댓가를 받기 원해요.

    그러나 주님은 아무 쓸모가 없어도 저를 사랑하시고, 또 그 사랑은 완전하고 한도가 없는 것임을 기억합니다. 아가페 사랑의 능력으로 실망과 낙심을 이겨내고 애굽의 사슬을 깨뜨리는 자유자의 삶을 살기를. 그 자유의 능력으로 주신 인생의 동산을 에덴으로 가꿀수있기를. 기도해요. 사랑해요.

    아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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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모세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노예로 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백성을 데리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로 가게 된 배경은 기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기근이 심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야곱의 일가는 이집트의 세도가가 된 요셉의 초청으로 이집트로 이주해 살게 되었습니다. 이집트 백성들 사는 곳에 같이 살지 않고 나라로 부터 고센 지역을 받아 그곳에 정착했습니다. 야곱의 자손은 (다른 히브리 사람들도 차차 이집트로 들어 왔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이집트에 살았습니다. 처음부터 노예로 살지는 않았어도 대접 받는 ‘손님’의 위치는 아니었습니다. 사회 계층을 나누어 보면 -이집트의 유명한 피라밋 도표가 떠오르는데, 그 피라밋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인력이 피라밋의 바닥을 이룹니다- 맨 위에는 왕과 왕족, 귀족, 왕의 측근이 있고, 그 밑으로는 상위층의 필요에 따라 사회가 돌아가게 하는 일반인들, 또 그 일반인들을 위한 노동력이 되는 하위 계급과 노예들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종교적인 의미에서 구분된 그룹이기 이전에 언어와 관습, 전통의 이질성을 바탕으로 그들 만의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노예나 노동자 그리고 이교도 (일반 종교와 많이 다른) 의 모습이 혼합된 집단의 모습이었으리라 상상이 됩니다. 이집트의 상류층에게 히브리인들은 싸고 흔한 노동력이었겠지요. 그런데 이제 나가겠다고 하니 -절기를 지킨 뒤 다시 온다는 말 없이- 호락호락 넘어갈 리 없습니다. 파라오는 모세에게 나는 그 (너가 말하는) 주님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네 말만 듣고 그저 오냐 할 수가 없다고 답합니다. 파라오의 입장에선 황당한 요구입니다. 그런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뭔가를 요청할 수 있는 집단이 못되는 사람들이 파라오 앞에서 특이한 청을 하니 파라오와 신하들은 당황했을 법 합니다. 파라오의 답은 무조건 안돼, NO 입니다. 재고의 여지도 없습니다. 파라오는 히브리 노예들이 뭘 믿고 저런 소리를 하나 싶었을겁니다. 일이 쉬워서 딴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을겁니다. 더 많은 일을 시키라는 명을 내립니다. 파라오에게 상상력이나 호기심이 있었다면, 도대체 히브리인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갑자기 저런 청을 하는가, 그들의 신은 또 어떤 신인가, (우리가 모르는 신인가?) 히브리인들이 나가면 대체인력은 있는가 등등을 생각해 봤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리면서 왕은 고집을 피울 것이다, 내가 왕의 마음을 강퍅하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사’라는 구절은 이 옛날부터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구절이라고 이해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파라오는 NO 라고 답합니다. 모세의 예스가 어려웠던만큼, 파라오의 노우는 쉽습니다. 예스라고 못하고 쩔쩔매던 모세와 매번 노우 밖에 모르는 파라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모세이기도 하고, 파라오이기도 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성경을 통해 나를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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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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