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3장 13-15절: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분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제가 누구이기에?”라면서 주저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답하셨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럼,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는다. 

당시 모세도, 히브리 사람들도, 그들이 믿고 있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세상의 여러 신들 중 하나라고 믿었다. 그들이 사백 년 동안 몸붙여 살았던 이집트는 다신교 국가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모세가 그들을 찾아가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13절)고 말하면, 그들은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 분명했다. 모세가 하나님께, 그 질문에 대해 무엇이라고 대답하면 되겠느냐고 여쭌다. 

그 질문에 하나님은 “나는 곧 나다”(14절)라고 답하신다. 이것은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라는 히브리어 표현에 대한 번역이다. 개역개정에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번역했다. 영어 성경들은 I AM WHO I AM 혹은 I WILL BE WHO I WILL BE로 번역한다. 다양한 번역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 표현의 의미는 신비에 싸여 있다. 이 문구에 대해 수 많은 연구 논문이 축적되었지만, 여전히 알듯 말듯한 상태다.  

이 문구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기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계시다. 이름을 알려 달라는 모세의 요청에 대해 하나님은, “나는 이름을 지어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고 답하셨다고 볼 수 있다. 이름 지어 규정할 수 있다면 그 신은 우상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인간의 이해와 서술과 규정과 정의를 넘어 서시는 분이다. 참된 신이라면 당연히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분이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YHWH를 하나님을 가리키는 기호로 사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출 20:7)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YHWH라고 쓰고 “아도나이”(“주님”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로 읽었다. YHWH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합하면 “여호와”(15절, YeHoWa)가 된다. 현대 학자들은 YHWH를 “야훼”로 읽어야 한다는 의견에 일치하고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15절)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하신다. 

묵상:

“에흐예 아셰르 에흐예.”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여쭈었을 때 모세가 들은 답입니다. 앞에서 본 대로,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밝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름 짓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인간이 해명하고 규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을 대할 때 그분에게 덧씌워진 어떤 틀로 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름 지을 수 있는 존재라면 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그분 앞에 벌거벗고 서서 그분이 드러내 주시는 대로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신발을 벗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가리고 있는 모든 것을 벗어 놓고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들어있는 계시 중 최고의 계시입니다. 어떤 종교적 천재도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역사의 한 지점에서 한 인물에게 당신이 어떤 존재이며 당신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계시를 통해 우리는 아브라함을 불러 내셨고 모세를 불러내신 그 하나님은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고, 그 하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 앞에 오늘도 우리도 신발을 벗어 놓고 서서 고개를 숙입니다.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분 앞에 서서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기도: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주님은 전부이시고 저희는 전무입니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나 된 것처럼 떠드는 저희의 입술을 봉해 주시고, 주님 앞에 겸손히 서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주님이 저희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7 responses to “출애굽기 3장 13-15절: “나는 나다”라고 하시는 분”

  1. gachi049 Avatar
    gachi049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고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특정한 이름이 없으신 오직 “ 나는 나다”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그분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하오니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오늘도 불꽃 같은 눈으로 행여나 세상 유혹에 빠질까봐 노심초사 하시고 보시고 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의 품격을 지니고 사는 남은 여정되도록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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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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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illkim9707 Avatar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잘 모르는 초라한 신세입니다, 나는 곧 나다라고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르게 제대로 많히 아주 깊게 더 많이 알기를 원 합니다, 전지전능의 창조주 하나님, 십자가 은혜와 구원의 하나님, 영으로 같이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며 만왕의 왕 만유의 주님으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는 주님께 영광을 드려올리는 아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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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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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모세가 처음입니다. 그 누구도 모세처럼 하나님의 설명을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당신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얍복강가에서 두려움에 떨던 야곱은 하나님의 천사와 밤새도록 씨름을 합니다. 야곱이 떨어져 나간 게 아니라 천사가 싸움을 중단합니다.야곱은 천사에게 복을 준 다음에 떠나라고 청합니다. 천사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꿔줍니다. 하나님과 겨룬다 (하나님과 싸운다 그리고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천사의 이름을 묻지만 천사는 답하지 않고 떠나갑니다. 야곱은 천사의 이름은 모르는 채 천사와 싸운 그 장소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짓습니다. ‘엘’이 들어갔으니 하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이고, 야곱이 그렇게 지은 것은 하나님을 보고도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기리기 위해서였습니다. 400년 쯤이 시간이 흐른 뒤에 모세의 시대로 왔습니다. 모세나이 80살이니 야곱이 브니엘을 경험한 지 거의 500년이 흘렀습니다. 인간의 의식이 깨이는 데 드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조선왕조 500년’을 생각하면 야곱 시대의 사고와 모세 시대의 사고는 확실히 다르겠지요. 모세의 버닝 부쉬 경험은 야곱의 브니엘 경험을 뛰어 넘습니다. 모세와 야곱 모두 집을 떠나 복잡하고 어려운 세월을 겪었습니다.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야곱은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고향에 가면 대면해야 할 형 에서가 있습니다. 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야곱은 두려움과 불안을 어쩌지 못해 강가로 나왔습니다. 모세는 이집트로 갈 마음이 없습니다. 이집트는 모세에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야곱도 모세도 두려운 것은 따로 있는데 궁극적인 두려움의 대상인 하나님/하나님의 천사를 마주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의 뜻이 이것일까요. 하나님과 겨루었다=두려움에 맞섰다. 모세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I-AM-WHO-I-AM.’ 야곱의 천사는 자기 이름 대신 야곱의 이름을 새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모세의 천사는 나는 나 일 뿐, 너가 알 수도, 부를 수도 없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름과 정체성은 하나의 줄로 묶여 있어서 이름은 곧 그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체성은 그렇게 단순한 개념이 아닙니다. 문화권마다 이름의 의미와 이해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히스패닉 사람들은 긴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엄마와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름을 중간에 넣습니다. 퍼스트네임과 라스트네임 사이에 서너 명의 조상 이름이 들어갑니다. 아기의 특징을 이름으로 짓는 문화도 있고, 태어나던 때의 별자리를 이름 안에 넣는 문화도 있다고 합니다. 아기의 성별에 따라 이미 정해진 이름들 중에서 고르는 문화도 많고, 성인이나 성자의 이름을 빌려 짓는 종교적 전통도 많습니다. 그러니 이름이 곧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극단적인 경우엔 이름이 없기도 합니다. ‘조선왕조 500년’을 지나 근세로 온 우리의 조상 때에도 이름 없이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요.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말하셨든지 -나는 나다 라는 답 대신에 어떤 이름을 대셨어도- 하나님과 인간 (모세)의 관계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뭐라고 불렀는지 궁금합니다. 아담은 세상 모든 것의 이름을 지었는데, 그는 하나님을 뭐라고 불렀을까요… 이름이 아니라 관계입니다. 이름이 다 같은 정체성이 아니듯 (헤수스와 예수와 예수아, 영자와 영희와 영숙, 제이콥과 제이크와 야곱과 야고프) 정체성은 관계 안에서 설정되고 재설정됩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은 누구일까요. 하나님께 모세는 누구이고, 나는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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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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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YHWH. 아도나이.

    5월 들어 첫번째로 맞는 토요일 아침입니다. 구름과 햇살이 예쁘게 섞여있고 바람은 온화하네요.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던 모세. What is your name?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해 돌아온 것은 I AM WHO I AM이라는 대답. 이게 뭐지요?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응당 이름부터 묻게 되지요. 세상이 이해하고 정의하는 그의 정체(identity)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지요. 또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부터 지어줍니다. 구별하여 부를 이름을 주므로 아기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이름으로 그의 자리를 규정해주지요.

    창조의 주. 누군가가 이름을 지어줬고 그 이름에 의해 이해되고 정의될 수 있는 존재는 당연히 아니시겠죠? 시간과 공간, 우주와 자연 안에 갇힌 이가 아니실테지요? 모든 질서와 규칙 밖에 계신 분. 시간과 공간, 우주와 자연을 그 밖의 영역, 곧 영의 공간에서 창조해 내신 분. 자존하시는 창조의 주. 아도나이(Lord). I AM!

    오늘도 세상은 혼돈과 공허, 흑암의 깊은 바다에 덮여있어요.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고 궁창이 있으라 말씀하시므로 하늘과 바다를 가르셨던 분. 아도나이. 그 분이 지금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고 창조의 스토리를 다시 쓰고 계시고, 오늘도 제게 목적과 사명을 주고계심을 믿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인생이 되기를.

    King of kings! And Lord of lords!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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