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3장 10-16절: 영문 밖으로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한 제단”(10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가리킨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 언약궤 위에 있던 속죄판(시은소)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제단이다. 반면, “우리” 즉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사죄의 은혜를 받는다. “유대교의 성전”은 헬라어 ‘스케네’에 대한 의역으로서, 직역하면 “장막”이 된다. “섬기는 사람들”은 “제사 드리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이 말은 제사장과 레위인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성전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 모두를 가리킨다. “이 제단에 놓은 제물”은 십자가 희생을 통해 얻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킨다. 성전 제사를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유대교의 제사의식”(11절)은 대속죄일의 제사의식을 가리킨다. 율법에 의하면, 일반적인 속죄 제물은 제사를 드린 다음 그 고기를 제사장과 제사 참여자들이 화목제물로 나누어 먹는다. 반면, 대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제물의 피를 지성소에 가지고 들어가 예식을 행하고 나서, 나머지를 “진 바깥으로 끌어내고, 그 가죽과 살코기와 똥을 불태워야 한다”(레 16:27). 예수님은 손으로 짓지 않은 하늘의 지성소에서 피를 흘려 영원한 속죄 제사를 행하시고, 그분의 육신은 “성문 밖에서”(12절) 죽음을 당하셨다.

여기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라고 격려한다. “진영 밖으로 나가자”는 말은 거부와 배척과 고난을 감수하자는 뜻이다. 믿음의 길에서 고난을 겪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다(골 1:24). 믿는 이들은 “장차 올 도시”(14절)에 속했기 때문에 이 땅의 도시에서 배척 당하는 것에 괘념치 않는다. 믿는 이들은 “짐승 제사”가 아니라 “찬미의 제사”(15절)를 드린다. “그의 이름을 고백하는 입술의 열매”라는 말은 그분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을 가리킨다. 찬미의 제사는 “선을 행함과 가진 것을 나눠주기”(16절)로 연장되어야 한다. 입술의 제사는 손과 발의 제사로 이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기뻐하신다.

묵상:

헬라어 ‘파렘볼레’는 “진영” 혹은 “군영”으로 번역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행진하다가 어느 곳에 머물게 되면 진을 쳤습니다. 그 진의 한 가운데 장막(성막)을 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지역마다 한 마을이나 도시를 이루어 살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재앙은 진영(마을 혹은 도시)으로부터 추방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전염병에 감염된 사람을 진영 바깥에 격리하게 했고, 가증스러운 죄를 지은 사람들은 진영 바깥에서 처형하도록 규정한 것을 생각해 보면, 진영 밖으로 나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진영) 밖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분을 따라 성문 밖으로 나가자고 권고합니다. 그것은 지리적인 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성 있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진영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면서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은 진영 밖으로 쫓겨나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합니다. 그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믿음을 따라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므로 이 땅의 나라에서는 이방인이 됩니다. 

이방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차별과 모욕과 배척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차별성은 “찬미의 제사”와 “선을 행함”과 “가진 것을 나눠주기” 같은 일로 드러나야 합니다. 

묵상:

주님, 저희는 “진영 안에서”(이 세상에서) 너무나 안전하게 살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저희를 보고 “저들은 우리와 다르다”고 느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희를 불편하게도, 위험하게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과연 제대로 믿는 사람들인가요? 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아멘.  

7 responses to “히브리서 13장 10-16절: 영문 밖으로”

  1. billkim9707 Avatar

    누명과 배반을 쓰시고 수모와 극심한 고초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중보자로 계시다가 만왕의 왕 만유의 주님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을 하면서도 세상의 안위를 바라는 초라한 신세입니다, 주님의 누명과 배반과 수모와 고난에 동참하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발자취를 걷는 믿음을 원합니다.

    마음과 입술로만 떠드는 죽은 믿음이 아니라 손과 발로 이어진 살아있는 믿음으로 생명이 다 할때까지 살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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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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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기독교인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나도 믿고 싶다, 저들은 뭔가 다르다, 예수를 믿으면 사는게 다른가보다…이런 기대가 생길 거라는 것은 ‘이론’과 이상일 뿐인가 봅니다. 사람을 끌어당기기 보다 밀어내는걸 더 잘하는 것 같고, 모여서 하는 일이 자기들 손해 안보는 일, 자기들 원하는거 받아 내는 일 뿐인 것 같아 민망하고 창피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이 워낙 그런 시대라서, 자기 권리를 자기가 챙기지 않으면 안되고 큰 소리로 외치지 않으면 듣는 이가 없어서 그런다고 해도 조직된 집단으로서 교회가 하는 행동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없겠습니다. 한국은 4월 20일을 ‘장애인의 날’로 지킵니다. 전국 장애인 차별철폐연대 (전장연)의 지하철역 시위와 전국탈시설장애인연대 (탈시설연대) 소속 장애인들의 고공농성 (성당종탑 점거농성)이 연일 뉴스에 올라오고 있습니다. 뉴스로 보는 사진이나 기사는 보통 시민들이 지하철 이용하는 데 막대한 지장과 불편을 주는 시위대의 모습을 담습니다. 특별히 출퇴근 바쁜 시간대에 지하철역에 떼지어 모여 누워 있는 장애인들을 보면 권리 주장을 넘어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땡깡’ 부리는 무모한 사람들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겠습니다. 탈시설연대는 뭔가 싶어 찾아 보았더니 (주로)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시설에 거주하는 발달장애인들이 그런 시설에서 살지 않을 권리, 시설에서 나와 자립해 살고 싶다는 운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장애인이 자립 지원을 받아 지역 사회 안에 거주하는 것은 권리로서, 유엔의 장애인 권리위원회는 장애인 수용시설이 차별적인 관행, 폭력의 한 형태라고 규정했습니다. 시위하는 장애인과 이를 좋게 여기지 않는 사람의 입장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중증장애인들을 수용해 돌보는 사회시설이 장애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시민으로서의 삶을 막는 것이니 시설에서 나갈 권리를 인정하라는 것이 시위자의 입장이고, 장애인 가족을 직접 돌볼 수 없어 시설에 위탁하는 가족들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중증장애인이 과연 자립해 사회의 구성원으로 함께 살 수 있겠는가, 장애인의 권리가 일반 시민의 불편과 고통보다 중요한가 하는 것이 시위 반대자의 입장입니다. 장애인들의 지하철 시위와 관련된 기사로 새롭게 알게된 것은, 지하철 안에 엘리베이터나 에스칼레이터 등이 설치된 배경엔 장애인들이 39일 동안 단식 농성을 해서 얻은 것이요, 흔하던 육교가 사라지고 건널목의 턱이 깎아져 평평해진 것도 장애우들이 비난을 받으며 ‘데모’한 덕분이라는 것… 등등 모르고 지나갔던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지하철 바닥에 누워 농성을 하면서까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일 겁니다. 장애인이 아니면 모르고 지나간 수많은 것들, 장애인이 아닌 사람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 부분들이 장애인에겐 얼마나 큰 목마름인지를 알리고, 함께 해 달라고, 조금만 마음을 얹어달라는 것일 겁니다. 어떤 사람이 최근에 챗GPT한테 ‘장애인 시위’의 배경과 현황을 정리해보라고 주문했더니 조리있게 설득력을 갖춘 글을 써내더랍니다. 그 사람이 글에서 한 문장을 보고 깜짝 놀라 페북에 올려 나눴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불편의 역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깜짝 놀랄만한 문장은 아닙니다. 불편하니까 바꾸는 것이고, 불편함이 없으면 혁신 또한 없을 것이니까요. 장애인의 시위가 -내 눈에 유달스럽게 보이는 모든 시위가- 모르고 지나간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모르고 지나갔다는 것은 진영 안에서 편안히 살았다는 뜻입니다. 성문 밖에서 수치를 당하신 주님께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을 용기를 구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일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것을 서로 나누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제사입니다 (16절) God takes pleasure in acts of worship, a different kind of “sacrifice” that take place in kitchen and workplace and on the streets (16절 메세지 성경). 거룩과 구별의 의미를 사는 모습으로 보이신 주님. 세상이 멀리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구별된 거룩한 삶이라고 보여 주신 주님. 잔치에 가면 가장 좋은 자리로 걸어가 앉는 습관이 든 것은 아닌지요.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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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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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금요일 아침입니다. 평소보다 바뻤던 이번 주도 거의 끝나갑니다. 오늘은 아침에 화상미팅이 있어 늦게 출근하려 합니다.

    오늘 묵상의 주제는 ‘영문 밖으로“. 우리 이민자들이 늘 소망하고 꿈꾸는 것은 주류사회에 끼게 되는 것, 즉 영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 아닌지요? 오늘 아침 히브리서는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주님에게 나아가서 그가 겪으신 치욕을 함께 짊어지자고 권면하네요.

    어린양의 피로 구원을 입은 우리. 그런데 구원 이후의 이야기는 “ happily ever after”가 아닌가봐요. 주께서 물으시네요.자기를 부인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수 있겠니? 내 남은 고난을 네가 담당해줄 수 있겠니? 영문 밖으로 나아가서? 글쎄요. 주님의 초청은 늘 어렵습니다.

    출근 준비를 마쳤습니다. 오늘도 제게 허락해주신 삶의 자리가 부르신 자리, 소명의 자리임을 기억하게 도와주세요.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좁은 길을 걸을 용기를 주시기를. 고통의 파도와 실망의 바람에 부대낄 때 십자가를 기억하며 제자도의 댓가를 감당할 용기를 허락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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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gachi049 Avatar
    gachi049

    이 세상에서 온갖 인간이 누릴 있는 모든 것을 누리면서 지금까지 살아 왔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당시는 좋았지만 세월가면 기억속에서 사라지는 헛되고 헛된 것뿐임을 고백합니다. 이제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투자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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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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