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2장 25-29절: 감사와 경외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믿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하나님 나라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강조한 다음, 저자는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25절)라고 권면한다. “말씀하시는 분”은 지금 독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성령을 가리킨다. 저자는 다시 모세 시대로 돌아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사람들이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를 상기시킨다. “경고하는 사람”은 모세를 가리킨다. 사람의 말을 거역했을 때 그런 벌을 받았다면, “하늘로부터 경고하시는 분”을 거역하는 것은 더 엄중한 벌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나타나셨을 때 땅이 뒤흔들렸는데(출 19:18), 마지막에 다시 나타나실 때는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흔들겠다”(26절)고 하셨다. 이것은 예언자 학개를 통해 이미 예고되었다(학 2:6, 21). “흔들리는 것들”(27절)은 물질 세계를 가리키고, “흔들리지 않는 것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킨다. “없애버린다”는 오역에 가깝다. 헬라어 ‘메타테시스’는 “제거”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변화”로 번역할 수도 있다. 마지막 날에 물질 세계는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다. 바울은 그것을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는”(고후 5:4) 것이라고 했고, 요한은 환상을 통해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계 21:5)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믿는 이들은 이 “흔들리지 않는 나라”(28절)에 속해 있다. 미래형으로 “받을 것이니”가 아니라 현재형으로 “받으니”라고 쓴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 믿는 이들이 누리는 구원은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이다. 그것을 안다면 첫번째 반응은 감사드리는 것이다. 그 감사가 진실하다면, 그 은혜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그를 섬깁시다”라고 권고한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번역된 헬라어 명사는 동의어로서, 저자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강조하기 위해 겹쳐 사용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태워 없애는 불”(29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묵상:

히브리서 저자는 “흔들리는 것”과 “흔들리지 않는 것”, “손으로 만든 것”과 “손으로 만들지 않은 것”, “썩어 없어질 것”과 “썩지 않을 것”,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을 자주 대비시킵니다. 이런 까닭에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플라톤 류의 이원론으로 풀어 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허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만이 영원하다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였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오해할 소지가 없지 않습니다. 성경은 “육신”과 “땅”과 “보이는 것”에 더하여, “영혼”과 “하늘”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질 세계는 유한하고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이원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육신과 땅과 보이는 것을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마지막 날에 물리적 세계는 영적 세계에 삼켜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리적 세계는 폐기처분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될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물리적 세계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화되고, 믿는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 영원한 나라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이 땅을 살다가 마지막 날에 물리적 세계와 함께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삼켜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의 상태에 대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알기 때문이며, 그 은혜에서 떠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에게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속하도록 은혜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생각하며 늘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게 해주십시오. 또한 두렵고 떨림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아멘. 

6 responses to “히브리서 12장 25-29절: 감사와 경외”

  1. billkim9707 Avatar

    비록 죄와 유혹이 가득찬 세상에 살고있지만 보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새하늘과 새땅을 생각과 마음으로 보며 기쁨과 감사로 살기를 원합니다.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 하신 약속을 온전히 의지하고 어렵고 힘들고 누명을 쓰는 상황에 있더라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살아 내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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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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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청명하지만 조금 쌀쌀한 아침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와있는 하늘 나라. 그러나 그 나라의 완성은 종말과 심판 후에 이루어지겠지요? 무거운 오늘 말씀처럼.

    세상이 너무 혼란스러워요. 모든 피조물은 유한한 존재이니 우리 인간도 공룡처럼 언젠가는 끝을 맡게될지요? 그 과정은 본문의 말씀처럼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불살라지는 그런 무서운 것일지요?

    모르겠어요. 창조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영역에 속한다면 아직 일어나보지 않은 종말은 더욱 그렇겠지요. 분명한 것은 개인으로의 제 삶에는 확실한 끝이 있다는 것. 하나님이 사시고 믿음의 경주를 완주한 자들에게 완전한 하늘 나라를 상급으로 주신다는 것.

    푯대를 향하여 끝까지 달려가는 인생이 되기를 원해요. 혼돈과 흑암 가운데 작은 등불을 밝히는 그런 삶이 되었으면. 공의를 찾고 인자를 사랑하며 주님과 함께 겸손히 걷는 그런 순례의 여정이 되었으면. 아이들도 이런 소중한 축복을 함께 누렸으면. 간구해요.

    아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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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이원론적 세계관은 자연스럽고 익숙한 사고 방식이라 의도적으로, 지속적으로 체크하지 않으면 경직되고 편향적인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this or that, either/or 라는 선택은 우리의 한계성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차 선택방법입니다. 이원론적인 사고 덕분에 생명을 보존하고 살아 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며칠 전에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서적을 소개하는 글을 읽다가 골이 아픈 명제를 만나 지금까지 끙끙거리고 있습니다. 페미니스트 신학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데서 걸려 진도가 나가지 않는걸 보면 학문의 길로 가지 않은게 다행이다 싶고, 공부 쪽으로 안 간게 아니라 못 간거였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합니다. 그 명제는 이겁니다. 페미니스트 신학은 성서에 있는 성과 인종, 계급, 장애, 식민주의 등이 교차하면서 일으키는 다층적이고 구조적인 억압을 연구하는 일로 시작합니다. 남성 중심적인 서구 언어는 여성을 원칙에 대한 예외나 문제적인 것으로 만들거나 구체적이고 특별한 개인들로 (성서의 여인들을 떠올리면 개별적인 케이스로 기억하는 것이 한 예입니다) 보게 만듭니다. 페미니스트 운동 (신학 뿐 아니라 여성의 자리를 부각 시키는 활동 일체)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시민으로서 누릴 기본 권리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일인데, 여성의 입장에서 (여성을 위해) 이것을 증명하려면 성별 간의 차이를 들어서 설명해야 하니, 없애고자 하는 성차별을 설명하기 위해 성차별을 해야 하는 패러독스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1997년에 출간된 이래 신학과 여성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토론된다는 ‘Only Paradoxes to Offer’ 책을 언급한 글을 읽다가 (책을 읽은 것도 아닌데) 생각의 진도가 멈추었습니다. 패러독스는 풀리지 않습니다. 풀리면 패러독스가 아니겠지요. 신학은 본디 커다란 패러독스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설정은 신비나 모순 같이 ‘풀 수 없는’ 띠로 묶여져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마주한 수많은 고민 속에서 건져낸 나의 ‘답’은 패러독스를 풀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사고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신비를 알아야 하는 대상, 이해해야 하는 연구 과제로 보는 사고를 멈추고 수용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원론적 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Duality -이분법, 이원론- 는 문제와 답을 같이 제시하기 때문에 편안하고 쉽게 느껴지는 장점이 있습니다. 낮과 밤, 위와 아래, 성과 속…등은 구별이 곧 답이며, 차이가 곧 본질인 닫힌 계산법입니다. 이 계산법 하나면 충분한 세상이 있었습니다. 우리 사는 지금 세상은 낮과 밤의 경계가 없습니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위와 아래가 없습니다 (언제 바뀔지 모릅니다), 성과 속의 구별이 깨졌습니다 (예수님이 깨셨습니다 – 구별이 중요한게 아니라 실천이 중요합니다). 우리 세상은 다층적 다원적 전방위적 통전적 통합적인 사고를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가진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 (28절)’라고 말하는 히브리서는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적입니다. 흔들리는 것을 흔들어 없애고 흔들리지 않는 것들만을 남기는 하나님의 혁명 방식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둘 때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쪼개졌으며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다시 살아났다’고 마태복음은 기록합니다. 흔들리는 모든 것이 흔들어졌고, 심지어 잠자던 성도들이 살아났습니다 – 부활이 일어났다는걸까요, 부활신앙의 태동일까요, 쉽게 답할 수 없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바라봐야 할 영원의 표상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것, 없어지거나 소멸되지 않는 것이 필요할 때 우리가 떠올려야 하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 커다란 모순, 풀 수 없는 문제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예수님의 일과 말씀을 떠올리면 됩니다. 예수님은 작은 우리가 작게 이해할 수 있게 작아지셨습니다. 하나님을 품었으나 예수님은 작고 연약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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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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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chi049 Avatar
        gachi049

        이르시기를 “내가 한 번 더,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흔들겠다” 는 경고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어떤 고난과 핍박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영혼을 소유함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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