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 23-31절: 믿음의 길에서 만나는 두 가지 저항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저자는 이어서 모세 이야기를 꺼낸다. 그의 부모가 바로의 명령을 어겨가면서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겨 둔 것은 “믿음으로”(23절) 행한 일이었다. 출애굽기 2장 2절에서는 “그 아이가 하도 잘 생겨서, 남이 모르게 석 달 동안이나 길렀다”고 되어 있다. “잘 생겼다”는 말은 그 아이가 “특별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다”(24절)는 말은 왕자로서의 안락하고 호화로운 삶을 버렸다는 뜻이다. 저자는 그것을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25절)으로 정의한다.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도 왕자로서의 삶을 버리지 않는 것도 죄이고, 궁궐에서 살아가는 것도 매일 죄를 쌓는 일이었다. 모세는 궁궐에서의 화려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기서 저자는, 모세가 당한 고난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26절)이라고 정의한다. 그리스도 즉 메시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고 하나님이셨다(요 1:1). 그분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나사렛 예수이시다. 모세의 고난은 착취와 학대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맥을 같이 한다. 모세는 모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헌신과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해 주실 것을 믿고 있었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그는 왕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27절)라는 말이, 살인을 저지르고 미디안 광야로 도피한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바로와의 대결 후에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떠난 사건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냈습니다”라는 말이 이어지는 것을 본다면, 후자의 해석이 옳아 보인다.

이집트를 떠나던 날 밤에 양의 피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집의 문설주에 바른 것도 믿음 없이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28절). “마른 땅을 지나가듯이”(29절) 홍해를 건넌 것도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자신들도 할 수 있다고 따라 하다가 모두 빠져 죽었다. 

저자는 출애굽 이후 사십 년 동안의 광야 유랑의 사건에 대해서는 건너 뛴다. 앞에서 장막과 관련하여 길게 논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나안 정착 과정에서 일어난 일 중에서 저자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야기(30절)와 라합의 이야기를 언급한다(31절).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이야기는 여호수아 6장 1-21절에 나오고, 라합의 이야기는 같은 책 6장 22-25절에 나온다.

묵상: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부름은 자주 우리 자신의 상식과 판단을 뛰어 넘습니다. 또한 우리가 속한 세상의 질서와 규범을 거슬러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즐기던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고, 고생을 자초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살려면 두 가지의 저항과 싸워야 합니다. 하나는 내적 저항으로서 “두려움”의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 저항으로서 세상의 반대입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흔들릴 때 생겨납니다. 그래서 저자는 앞에서 하나님이 1) 계시다는 사실과 2) 반드시 보상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6절)고 했습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할 수 있고, 그럴 때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을 세상은 그냥 두고 보지 않습니다. “세상”은 사랑하는 가족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일 수도 있으며, 권세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그들에게 불편을 주고 손해를 입힐 때면, 그들은 반대하기도 하고 박해하기도 합니다. 외부적으로 이런 저항을 받을 때면 내면적인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 

이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길에 들어섰다가 중도에 탈락합니다. 어떤 사람은 두려움에 질려 스스로 물러나고, 어떤 사람은 외부적인 저항에 부딪혀 포기합니다. 그러면 두려움과 번민과 갈등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은 보지 못합니다. 믿음 없이 사는 길은 안전하지만 권태로운 삶이고, 믿음으로 사는 길은 위태롭지만 신나는 삶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의 타락한 본성은 안전하고 편안한 길로 향합니다. 하지만 그 길은 권태롭고 무의미한 길이요, 허무한 결말로 향하는 길입니다. 저희로 하여금 좁고 험한 길을 택하게 하시고, 그 길 위에서 주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보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아멘.  

7 responses to “히브리서 11장 23-31절: 믿음의 길에서 만나는 두 가지 저항”

  1. billkim9707 Avatar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권면(시험에 들지않게 깨어 기도하라신)이 생각납니다만 너무나 연약해서 잠자고있는 형편입니다.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믿고 상황이 어렵더라도 담대히 십자가의 길을 택하는 하늘의 지혜를 원합니다. 누명쓰시고 배반당하시고 그토록 심한 수모와 고초를 당하신 그리스도 예수님 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간구합니다.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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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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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오늘도 구름이 끼고 바람이 을씨년스러운 아침입니다. 교회마당에 나무가 쓰러져 일찍부터 많은 카톡이 오고가 좀 정신이 없어요.

    오늘은 모세, 여호수아, 그리고 라합의 이야기. 오늘 묵상말씀처럼 그들은 넓고 평탄한 길 대신 좁고 협착한 길, 의의 길, 생명의 길, 자유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 그 길을 끝까지 걷는데는 두려움을 이길 용기와 세상의 반대를 견딜 버팀(endurance)이 필요했죠.

    사순절이 끝나갑니다. 제게도 두려움을 이길 확신과 용기, 그리고 인내를 주세요. 오라 하시는 그 길을 주와 함께 걷기 원해요. 부족한 것의 인생을 주님 도구로 사용해 주시길. 장차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며 어둡고 괴로운 세상에서 소망의, 위로의, 평화의 작은 등불로 살았으면. 아이들도 그런 축복을 누리며 그들의 에덴을 살기를.

    소망해요. 아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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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지난 주일은 종려주일이었고 오는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그 사이 한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고난주간은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몸을 내려 무덤에 매장하면서 끝이 납니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고, 세상이 깜짝 놀라는 부활이 일어납니다. 고난주간의 끝에는 부활절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올해 고난주간에는 지금 이 때가 믿는 사람의 인생을 축소해서 카피한 그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어 성 안으로 들어갈 때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세 복음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때 제자들에게명해서 구해 온 나귀를 타고 들어가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성전 뜰이 시장처럼 시끄럽고 복잡한 것을 보시고 화를 내십니다. 예루살렘 성이 무너질 것을 내다 보시며 슬퍼하셨다는 기록도 있고, 말라 비틀어진 무화과나무를 꾸짖었다는 이야기도 들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간 뒤에 예수님은 여러 번 대중들을 가르치십니다. 고난주간 동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세 복음서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적인 활동 기간에 예루살렘을 한 번 가셨다고 보는게 공관복음서의 입장이라면, 요한복음은 네 번 정도 가셨다고 봅니다. 몇 번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겠습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 가시는 예수님을 군중이 열렬히 환영했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는걸 말합니다. 말씀의 감동이나 병고침의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 돌고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보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심기가 불편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일주일이 환영에서 비난으로 바뀌게 된 계기는 종교지도자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불안함과 불의함이 군중을 선동하는 계략으로 이어지고, 환영 인파는 십자가형을 외치는 무자비한 인파로 바뀝니다. 고난주간에 군중의 심리는 손바닥을 뒤집듯이 요동칩니다. ‘군중’을 이루는 개개인들은 믿음이 있었는데 일주일 사이에 없어진 걸까요, 믿음이 없는데도 믿는다고 착각한 것이었을까요, 처음부터 잘못된 믿음이었을까요, 아니면 믿음과는 상관 없는 백퍼센트 군중심리였을까요. 고난주간에는 제자들마저 흔들립니다. 가롯 유다의 배반이 불러온 위기기는 하지만 제자들도 운명적인 어떤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당신의 죽음을 여러번 예고하셨기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의 일주일은 보통 시간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의 삶도 고난주간의 군중처럼, 제자들처럼 앞뒤가 맞지 않고, 의지와 상관 없이 세상 물결에 휩쓸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샘플로 말하는 모세를 결코 따라갈 수도, 흉내낼 수도 없는 때가 거의 다 입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라합의 용기나 선택도 나는 그저 구경만 할 뿐입니다. 예루살렘의 고위층과 리더들이 백성을 이용해 예수님을 제거하는 고난주간의 스토리는 지금 이 시대에도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아닐지라도 권력은 지금도 군중이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고난주간은 권력의 그런 시도가 화려한 성공을 거두는 것을 보는 때이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군중이라서 권력의 엘리트들이 요리하는 대로 당하고 사는 것이 고난주간의 그림이라면 예수님의 부활은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살리셨다는 고백은 예수님을 환영하던 군중으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예수께로 향한 나의 중심을 이리저리 옮기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내 안의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묵상하는 아침입니다. 주님의 지혜로 나 자신을 잘 살피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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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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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gachi049 Avatar
    gachi049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 가는 넓고 화려하고, 평탄하고, 세상 사람들과 희희낙락거리며 걸어가는 길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찾지 않는 좁고, 험하고 굴곡이 많고 어두운 길을 저멀리 반짝이는 별빛 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외롭고 좁디좁은 길을 걸어갈지라도 안내자가 되시고 친구가 되어주시고 구원해주신 주님! 숨이 멎을 때까지 새하늘과 새땅을 기다리며 걸어가는 남은 여정이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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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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