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 8-12절: 장막에서 살다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네번째 모델로 저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제시하는데, 그에게 제일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8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떠났다. 창세기 12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은,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고 하셨다. 아브라함은 목적지를 알고 고향을 떠난 것이 아니라 부르신 분을 믿고 그의 안전지대를 떠났다.

그는 가나안 땅에 이르러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9절) 하였다. 그의 자손들이 장차 그 땅의 주인이 될 것(“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이었으나, 당장 그는 그 땅에서 이방인으로 취급 받았다.  “장막에서 살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태도로 살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 저곳으로 전전했다.  

이주민 소수자로 유랑하는 삶을 살면서도 아브라함이 끝까지 하나님께 순종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10절)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저자는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장막”(9:11)이라는 표현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묘사했는데, “하나님이 지으실 도시”도 같은 의미다. 이 땅에서 “장막에서” 사는 이유는 그 영원한 도시를 믿고 소망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믿음의 어머니 사라의 이름도 빼놓지 않는다(11절). “약속하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하여 “임신할 능력”을 얻은 사람이 사라를 가리키는지, 아브라함을 가리키는지, 원문 상으로 분명하지 않다.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믿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한 분으로 생각”하고 의지했다. 그 결과, 그 부부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자손”(12절)이 나왔다. 사라도, 아브라함도 생식 기능 면에서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묵상: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우리에게 장막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 중에 우리가 영원히 소유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속한 나라의 법에 따라 땅도 사고 집도 짓지만,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장막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두고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장막에서 살던 노마드(유목민)였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 심장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믿고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속한 것에서 자유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나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고후 5:1)라고 말합니다. 그는 또한 우리의 몸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 장막을 벗을지라도, 벗은 몸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3절)라고 말합니다. 그는 때가 되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땅에 있는 “장막”을 덮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는”(4절) 때가 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고 모든 믿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이른 것이 75세였고 세상을 떠난 것이 175세였으니, 그는 백 년 동안 가나안 땅에 살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가 소유한 땅은 아내의 묘지로 구입한 헤브론의 막벨라 밭뿐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때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구책을 구하는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았습니다. 

기도:

주님, 저희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사라의 “장막 정신”을 본받게 해주십시오. 백 년도 살지 못하면서 영원을 살 것처럼 생각하는 저희의 미몽을 깨우쳐 주십시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고 바라는 사람답게 살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아멘. 

8 responses to “히브리서 11장 8-12절: 장막에서 살다”

  1. billkim9707 Avatar

    세상에서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은것을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탐욕으로 채워진 세상의 풍조에 따라사는 허약한 인생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영원한 본향만을 바라보고 순례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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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chi049 Avatar
      gachi049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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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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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나그네, 떠돌이, 변방인, 장막, 유랑, 유목민…공통점은 고정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지속성이 없고, 시한부입니다. ‘영원히 변치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태입니다. 코로나 팬더믹 기간에 철학 수업을 몇 개 들었습니다. 계기가 있었습니다. 팬더믹이 오기 전에 우연히 강남순 교수가 한국에서 한 공개강연을 유튜브로 들었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식자들, 시사평론가들이 쓴 사회 진단과 미래 전망성 글이 많이 실렸는데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 글도 맞는 것 같고, 저 글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글 전체가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고, 같은 사람이라도 다른 글에서는 또 좀 다른 말을 하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오락가락 하는건지, 사회의 지식인들이 왔다갔다 하는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신문사의 주문에 따라 자기 상품(글)을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를 보면서 나도 같이 혼란스러워지는데, 우연히 강 교수의 철학강좌를 보게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강연이었습니다. 철학에 대해 무지했던 (지금도 무지하지만) 나의 눈과 귀를 열어 준 강연들이었습니다. 사변적이지 않아서 좋았고, 차분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습니다. 결론을 내리거나, 정답을 제시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강 교수의 예전 강연들을 찾아 듣고 있는 중에 줌으로 철학강좌를 연다는 안내문을 보았습니다. 주제와 책을 정해 5주간씩 하는 강좌였습니다. 코로나 3년 동안 연속으로 몇 학기 참여했습니다. ‘눈이 열리는,’ 아하 a-ha moment 첫 순간은 삶은 고정적이지 않다는 주장과 함께 왔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 주장은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하는 커다랗고 일정한 틀이나 방식은 없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의 만능 해석장치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니체가 사실이란 없다, 해석 만 있을 뿐이다 (There are no facts, only interpretations) 라는 말을 했는데 이 말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열렸다고들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적입니다. 확신, 확증, 고정, 안정, 뿌리, 소유 등을 버리라고 합니다. 삶의 양면성을 품으라고 합니다. 단순하면서 복잡하고, 미래적이되 기억해야 하고, 없어도 있고 가졌어도 놓아야 하는 이중적인 상태를 받아 들이라고 합니다. 이래야 한다, 이럴 것이다, 이렇게 해 주소서…등은 고정 시킬 수 없는 것을 고정 시키려는 옛 습관에서 나오는 언어입니다. 어디로 갈 지 모르는 채로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은 그런 의미에서 영원한 현대인입니다. 그는 아는 것, 아는 곳, 익숙한 사고, 친숙한 얼굴들을 떠났습니다. 사실이란 없고 해석 만 있다는 파격적인 선언은 기억과 언어의 한계를 정직하게 보게 만들어줍니다. 말씀이 왜 없느냐, 성서가 어째 사실이 아니냐, 저마다 좋을대로 해석하면 질서가 없어서 어떻게 사냐…충분히 있을 수 있는 고민입니다. 고정된 답, 반석 위에 지은 집을 꿈꾼다면 니체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불가능한 상태 (불임의 세월)를 약속의 담보로 받았습니다. 아들이라는 페이먼트를 하나님으로부터 꼭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이미 부모가 된 것입니다. 바라는 것 (아들)에 대한 믿음이 보이지 않는 이스라엘 나라,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녀의 아버지가 되리라는 약속 또한 믿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처음 믿은 쪽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먼저 믿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에 응답했습니다. 응답할 줄로 믿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나의 응답이 주님의 마음에 들기를 소원합니다. 도와주세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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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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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achi049 Avatar
    gachi049

    믿음의 조상들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 삶의 거울에 나를 비춰 봅니다. 그들의 일만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하였으니 부끄럽고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인생은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 아무리 수고 한들 인생의 싸이클은 변함없이 진행되어가고 있습니다(전1:2~4)라는 전도서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마지막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주신 장막이라도 감사하며 자족하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남은 여정이 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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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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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내일이 종려주일. 그리고 다음주면 고난주간 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오늘은 그에 대한 묵상.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며 오직 말씀에 의지하며 결국은 가나안으로 들어간 사람. 그 약속의 땅에서 부족과 나라가 될 것을 꿈꿨겠지요?

    그러나 현실은 자기 땅 한뼘도 없이 유목하며 장막에서 일생을 살아야 하는고단함과 소외,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의 불임이었지요. 가장 힘든 것은 실망과 낙심의 세월을 견디며, 버티는 일, 약속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일이 아니었을지.

    그는 장막에 살면서 하나님이 직접 건축하신 도시, 거룩한 성을 소망하였고, 기대하였죠.

    아브라함의 인내를 닮는 인생이 되었으면. 하나님의 시간이 내 시간과 달라 낙심되고 그 약속이 그저 내 wishful thinking 아닐까 이런 회의로 넘어질 때도 많아요.

    그럴 때마다 보혈의 능력과 은혜로 다시 일어나며 약속의 증인이 되는 그런 인생이 되었으면.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이 되기를.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끊임이 없이. 구주를 바라고 찬송할 수 있기를. 아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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