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장 1-3절: 심증을 물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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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으로 유명하다. 저자는 10장에서 모든 박해와 환난과 유혹을 견디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권면한다. 확신과 담대함과 인내로써 믿음을 지켜 “생명을 얻을 사람들”(10:39절)이 되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저자는 그렇게 믿음을 지킨 사람들의 예를 모델로 제시한다. 

저자는 먼저 믿음이 무엇인지를 정의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1절)이다. ‘휘포스타시스’를 “확신”으로 번역하면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으로 오해할 수 있다. 개역개정처럼 “실상”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바라는 것”은 “소망하는 것”을 가리킨다. 믿음은 하나님 안에서 소망하는 것–그분의 언약과 약속–을 현재적 실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같은 생각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증거”로 번역된 ‘엘렝코스’는 법적이고 객관적인 물증을 가리킨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보이지 않는 것들”(하나님, 하나님 나라, 영생 등)이다. 보이지 않는 것에는 증거 혹은 물증이 없다. 그럼에도 존재한다고 믿으니, 믿음이 증거가 된다.  

“선조들”(2절)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을 가리킨다. 4절 이하에서 저자는 구체적으로 몇몇 인물들을 소개할 계획이다.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들이 믿음을 따라 살았다는 사실에 대해 인정해 주셨다.

믿음은 “미래”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게 해 줄 뿐 아니라 “과거”를 그렇게 보게 해준다. “세상”은 ‘투스 아이오나스’의 번역으로 “세상들”이라고 번역해야 한다. 저자는 여기서 땅의 세계만이 아니라 하늘에 보이는 세계까지도 포함하여 말하고 있다. 오늘의 언어로 한다면 “믿음으로 우리는 온 우주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깨닫습니다”(3절)라고 번역할 수 있다. “보이는 것”과 “나타난 것”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무엇인가 존재하기 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어야 한다. 즉 보이는 것/나타난 것은 보이지 않는 것/나타나지 않은 것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무로부터의 창조”(criatio ex nihilo)라는 개념이 나왔다.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은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절대 무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묵상:

앞에서 저자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확신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의 본질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분입니다. 우리는 일차원 시간 안에 갇혀 있지만, 하나님은 영원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는 삼차원 공간 안에서 살지만, 하나님은 신적 차원에서 일하십니다. 

믿는다는 것은 시간 안에서 살면서 영원을 소망하고, 육신을 입고 살지만 영적 존재로 살고, 현실에 발 딛고 살지만 현실 너머의 세계를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과는 세상을 전혀 다르게 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질과 육신을 전부로 여기지만(유물론적 세계관), 믿는 사람들은 그것보다 더 크고 영원한 세상이 있음을 믿습니다(유신론적 세계관).

유물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것들에 대한 물증을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은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확실한 물증이 없는 한 믿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마음을 열고 보면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환히”(롬 1:19) 드러나 있습니다. 물증은 없어도 그분을 알고 믿을 만한 심증은 많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생각이 허망해져서”(롬 1:21) 그 심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심증을 물증처럼 여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것에 대한 확신은 그것을 이미 손에 잡은 것처럼 살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심증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그것은 물증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욕과 환난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의 길에서 완주하는 것입니다.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물질에 갇힌 저희의 마음을 여셔서 주님 나라를 소망하게 하셨고, 시간에 묶인 저희를 풀으셔서 영원을 품게 하셨습니다. 이 걸음으로 저희의 인생길에서 완주하도록, 확신과 담대함과 인내를 더욱 강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아멘.    

8 responses to “히브리서 11장 1-3절: 심증을 물증으로!”

  1. gachi049 Avatar
    gachi049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창 1:1)과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계 21:20)는 말씀을 통해 지금까지 함께하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심과 새하늘과 새땅을 허락하실것을 굳게 믿고  깨닫게하신 은혜 감사합니다. 주님! 믿고 깨달음을 이웃에게도 전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 인도하여 주시고 영혼의 눈과 귀가 흐려지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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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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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ull9707 Avatar
    bull9707

    십자가의 은혜, 성령의 인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천지창조주, 살아계신 삼위일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소망한다고 고백을 합니다만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지못하는 비천한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몸과 영혼이 온전히 주님이 함께하시는것을 깨닫고 실제로 느끼고 주님 사랑으로 이웃을 겸손히 섬기는 믿음을 갖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이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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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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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비가 내리고 구름이 낀 쌀쌀한 아침입니다. 봄이 완전히 열리기까지는 진통과 성찰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겠지요?

    오늘은 히브리서라는 굴곡진 길에서 마침내 얼굴을 드러내는 Scenic Point, 믿음 장.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가장 심오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그냥 궤변 같이 느껴져 멀리있는 높은 산처럼 마냥 올려보게 되는 본문이에요.

    분명히 공감되는 것 하나. 보통 아는 만큼 믿게 되는 세상의 것들과 달리, 하나님은 믿는 만큼 알게된다는 것이지요. 마치 아기가 엄마를 아는 것처럼.

    아기는 엄마가 자기를 낳는 걸 본적이 없어요. 유전자 검사를 요구한 적도…엄마의 촉감, 젖, 따뜻함, 도움, 안전함을 느끼고, 그 모든 것을 엄마라는 이름의 신비한 약속으로 믿게되요. 믿으니까 엄마를 더 알게되고 더 아니까 끝내는 확신이 의심을 이기게 되지요.

    간절히 바라는 것들이 있어요. 제 보잘 것 없는 믿음 위에 주께서 축사하셔서 그를 알고 그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는 하루가 되길. 믿음이 확신이 되고, 소망이 실상으로, 약속이 현실로 변모되는 그런 인생이 되길. 이런 능력과 은혜가 아이들의 인생과 그 가정 위에도 임하시길.

    간절히 기도해요.아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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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chi049 Avatar
      gachi049

      아멘~~~

      할렐루야!!!!!!! 오직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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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히브리서를 여기까지 읽어 오면서 우리의 것 (한국적인 것)이 아닌 개념과 표현을 받아 들이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고 느낀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제는 미래에 받을 상급을 기대하며 현재를 인내하고 사는 것에 대해 하루 내내 묵상을 하다가, 우리가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이 미래가 없다거나 미래에 어떻게 될 지 몰라 그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고 기다리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은 오늘 만 살고 마는 사람처럼 오늘을 열심히 잘 사는 사람이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오늘 만 살고 마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단편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처럼 가지에 붙은 이파리를 자기라고 여기어 잎이 떨어지면 자기 생명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매일 오늘이 생의 마지막이려나…우울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내일은 오지 않을 수 있으니 오늘 최선을 다해 멋지게 살겠다는 각오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시련과 괴로움을 이겨낸다는 말은 시련과 괴로움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괴롭고 힘이 드는 현재를 산다는 것 자체가 미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미래를 적극적으로 받아 들인다는 뜻입니다. 현재와 현재를 만든 과거 둘 다 끌어안고 씨름하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품는 것이니 신비 -하나님의 약속, 완전한 뜻, 보이지 않는 현실-를 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미래에 받을 상급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나한테 이미 주신 상급이라고 깨닫습니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연서 기가 막히게 연기하는 배우를 보며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인물의 감정이 시청자에게 전달되고 그의 말과 행동에 크게 공감할 때 우리는 그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배우는 그 연기로 상을 타기 위해 열심히 연기한게 아닐겁니다. 물론 트로피나 상금을 받는 상 뿐 아니라 인기나 부수입 (명성과 인지도가 끌어오는 광고수입)도 상급이라서 그걸 바라고 열심히 하는 것이 상급을 바래서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만, 연기자의 일차 상급은 연기일 것입니다. 연기를 하는 것, 무대에 서는 것이 상급일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사는 동안 고민 없는 순간보다 고민하는 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믿음이 ‘답’이 아니라 질문인 적이 더 많았습니다. 그것이 다 나의 상급이라는걸 몰랐습니다. 그런 시간 속에 녹아든 나의 눈물과 웃음, 아픔과 기쁨이 이 땅에서 받는 상이요 명예란 것을 잘 몰랐습니다. 마치 나의 자녀가 그의 존재 만으로 이미 내겐 보석인데, 그가 성공하기를, 유명해지기를, 내 마음에 백퍼센트 들기를, 내가 바라는 대로 살기를…기다리느라 그를 지나쳐 버린다고 할까요. 이런 생각으로 어제 하루를 보내고 오늘 새벽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확신하는 것,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 Now faith is confidence in what we hope for and assurance about what we do not see…’ 이 구절을 읽으니 믿음이 오늘을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요. 나의 믿음을 받아 주십시요. 나의 오늘을 축복해 주십시요. 나의 오늘 만 책임져 주십시요. 주님께 나갈 수 있도록 ‘휘장’을 열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과 함께 경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감사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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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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