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0장 26-31절: 떠날 수 없는 사랑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앞에서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25절)에 대해 언급한 후, 저자는 믿음을 배반한 사람의 구원 문제를 다룬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은 뒤”(26절)라는 말은 “복음을 받아들인 후”를 뜻한다. “짐짓”으로 번역된 헬라어 ‘헤시쿠시오스’는 스스로의 선택과 결단을 가리킨다. 율법 규정에 의하면, 실수 혹은 무지로 인해 범한 죄만 제사를 통해 용서받을 수 있고, 고의적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민 15:30; 신 17:12). 그렇다면, 복음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알았으면서도 고의적으로 믿음을 버린다면, 그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속죄의 제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은 “무서운 심판과 반역자들을 삼킬 맹렬한 불”(27절)이다.

저자는 믿음을 져버린 사람에게 이토록 무서운 벌이 내리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대속 사건을 비교한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행위도 두세 증인의 증언이 있으면 사형으로 다스려진다(28절). 율법을 어기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다가 고의적으로 등을 돌리는 것은 더욱 무서운 형벌로 다스려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해 준 언약의 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모욕한”(29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율법보다 더 크신 분이니, 그에 대한 형벌도 더 무겁다. 

여기서 저자는 신명기 32장 35-36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심판자이심을 강조한다(30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거부한다면, 그에게 남는 것은 그분의 심판 뿐이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다(31절). 

묵상:

사람들은 흔히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죄 짓는 이야기와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르지 않습니다. 구약성경도, 신약성경도 모두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 이야기의 절정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인간을 그토록 뜨겁게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내어 주신 분이므로 그 사랑을 알고도 배반하는 것은 무서운 진노를 불러오는 일이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미워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죄 된 인간의 상태를 생각한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더욱 귀합니다. 그 귀한 사랑을 알고도 거부한다면, 그 사람에게 남는 것은 그분의 진노밖에 없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큰 만큼, 그것을 거부한 대가는 더 커지는 법입니다.

히브리서 독자들 중에는 복음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성전 제사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 사람들에게, 그들의 선택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기억하라고,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처음에는 성전 종교로부터 해방된 것을 감사하고 기뻐했던 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진 결과입니다. 

영적 생활에서 가장 조심할 것이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귀한 것을 하찮게 여기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는 결과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안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은혜와 사랑에서 떠나면 진노와 심판의 땅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결과에 이르지 않으려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하고 귀한 것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매일 새로워져야 합니다.

기도:

주님, 오늘도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새벽 공기처럼 저희의 영혼을 맑고 순결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예민해지게 하시고 그 안에 머물러 살게 해주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숨이 다하는 날까지, 주님의 사랑에서 떠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구합니다. 아멘.     

7 responses to “히브리서 10장 26-31절: 떠날 수 없는 사랑”

  1. bull9707 Avatar
    bull9707

    영원히 완전하신 대 제사장, 예수그리스도께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휘장을 찢으신 사랑과 은혜가 없었다면 저희들이 치가 떨리는 영원한 무서움과 심판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십자가를 꼭 붙잡고 지성소에 들어갈수있는 특권에 감사와 영광을 성삼위일체 임마누엘 하나님께 드려올립니다. 한시적인 세상의 쾌락과 탐욕에는 멀리하고 생명이 다할때까지 주님과 동행하며 거룩한삶을 살아내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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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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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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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꽃 샘 추위가 매섭게 쌀쌀한 아침입니다. 언약의 보혈을 짓밟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과 보응. 정신이 확들게 만드는 매서운 말들.

    Those who deliberately keep on sinning…이런 이들을 다시 대속할 십자가는 없다는 것이 요점. 그런데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과연 나는 안전할까?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는 탕자의 비유. 그 후로 둘째아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죄의 습성을 교정하고 성품을 바꾸는 일은 계속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하나의 과정이었을 거에요. 그리고 거기에는 그와 동거하시며 일을 저질를 때마다 중재해주시고 눈 높이에서 늘 길을 알려주시는 분이 함께 계시지요.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해요. 돌아온 탕자는 또 다시 집을 떠나면 안됩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 후 무한 영광일세.

    십자가에 시선을 맞추며 넘어져도, 실패해도, 낙심해도 저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는 능력의 인생 되기를. 그런 은혜와 축복이 사랑하는 이들, 그리고 특히 아이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해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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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믿음의 반대가 불신이 아니라 확신인 것처럼 믿음의 여정에서 경계해야 할 넘버원은 익숙함인지 모릅니다. 익숙함은 일종의 캔디입니다. 달콤한 사탕 같아서 신경을 누그러뜨리고 행복감을 줍니다. 동기 부여나 집중력, 기쁨과 쾌락과 관련된 신경물질인 도파민은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도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익숙하면 일단 안정감을 줍니다. 치열한 생존 환경에서 인류는 낯선 것은 두려운 것이요 익숙한 것은 안전한 것이라는 공식을 발견해내고 유지해 온 건지도 모릅니다. 공식화된 경험은 편견을 만듭니다. 개인적으로 일일이 경험하지 않았어도 공식화되면 편견으로 자리 잡습니다. 편견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았어도 그렇대더라, …..라더라, …..이겠지 같은 ‘카더라’ 통신이 곧 진실이 되어 버립니다. 익숙함과 편견은 서로를 먹여 주고 키워줍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복음 10:34)고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익숙함이나 확신에 안주할 때 얻는 평화를 진정한 평화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이해합니다. 나의 시각과 인식을 의심하고 도전하는 수고를 피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해석입니다. 최근에 미국 국방장관의 몸에 새긴 태투가 뉴스에 나온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칼이 꽂혀있는 문신은 마태복음 10:34 구절을 뜻하는 것이며 라틴어 문구 ‘Deus Vult (하나님의 뜻)’ 문신은 십자군 전쟁의 슬로건이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를 따르지 않는 ‘이교도’는 칼로써 벌하고 멸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하고 있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요즘 미국의 불법이민자 추방의 기준이 갱단 소속 ‘문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니 이는 아이러니 (모순)일까요, 부조리한 비극일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그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믿는 이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십자가의 사건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유대인 (히브리인)의 역사와 전통의 레프런스 안에서 정리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익숙한 용어들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무 크고, 옛 레프런스는 너무 작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의 궁극적인 상징으로서 예수라는 존재는 익숙함과 불편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익숙하기에 그저 감사하고 편안하며 따뜻하면서도, 종종 불편한 그 무엇 때문에 새로운 시선과 반응을 끄집어 내는 분입니다.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며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이들은 ‘더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29절 말씀은 익숙하고 편안한 상태에 머무를 때 생기는 게으름과 교만을 경고하는 말씀이라고 이해합니다. 처음 믿던 때의 떨림과 낯 섬의 상태를 다시 주소서. 새 봄에 새로 봄 (seeing)의 경험을 하게 하소서. 이미 나를 다 아시되 오늘 처음 만나는 것 같은 호기심으로 미소 지으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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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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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gachi049 Avatar
    gachi049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께서 구원의 반열에 오르도록 인도 하셔서 그 은혜에 감사 드린 백성이 받은 은혜를 잊고 사탄의 꼬임에 빠져 등을 돌린 배신행위는 성령을 근심케한 죄로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마 12:32). 주님! 어떠한 고난과 핍박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성령을 근심케하는 배신행위를 하지 않으므로 새하늘과 새땅을 당당하게 맞이 할 수 있도록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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