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9장 11-22절: 약속에 근거한 믿음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이미 일어난 좋은 일”(11절)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완성한 대속의 사건을 가리킨다. “손으로 만들지 않은 장막” 즉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은 더 크고 더 완전한 장막”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가리킨다.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은 손으로 지은 장막에서 제사 드렸지만,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제사를 드리셨다.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매 년 한 번씩” 반복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었는데, 영원한 대제사장인 예수님은 “단 한 번에” “영원한 구원”(12절)을 이루셨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당신 자신의 피로써 그렇게 하셨다. 

율법에 의하면, 제물로 드려진 짐승의 피와 재가 뿌려지면 무엇이든 깨끗함을 얻는다(13절). 짐승의 피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의 피는 그 효력이 더 커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14절) 하나님께 바치셨다. 그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해 준다. 그리스도를 “새 언약의 중재자”(15절)라고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언약 안에 들어갈 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우리는 “죄 씻음”을 받고 “약속된 영원한 유업”(15절)을 차지하게 된다. 

헬라어 ‘디아테케’를 “언약”이라는 의미로 사용해 온 저자는 16절 이하에서 “유언”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새 언약은 예수께서 죽음으로써 맺으신 것이므로 유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유언은 죽은 후에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16-17절). 모세가 첫 번째 언약을 맺을 때 짐승의 피를 언약책과 장막과 장막 기구와 온 백성에게 뿌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18-21절). 이처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함이었다(22절). 

묵상:

제사 제도는 번거롭고 많은 비용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편리한 면도 있습니다. 자신이 가져 온 짐승의 머리에 제사장이 손을 얹고 “이 사람 대신 이 짐승이 피를 흘리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린 다음 그 사람의 눈 앞에서 도살하여 피를 쏟아내고 몸을 조각내어 제단에 올려 놓고 태워 바치는 광경을 보고 나면, 자신의 죄가 정말 사해진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짐승 한 마리를 희생하여 양심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면, 괜찮은 거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방법으로 정기적으로 양심의 자유를 얻곤 했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도 과거에 드리던 제사에 대해 자주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고 나서 돌아올 때 느꼈던 양심의 개운함이 그리웠을 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영원히 유효하다는 사실은 실감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감정에 기초한 믿음이 위험한 이유를 발견합니다. 감정과 느낌은 인간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감정이 죽어 있으면 살아 있으나 죽은 것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감정과 느낌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것은 늘 변하고 또한 속아 넘어가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감정과 느낌이 아니라 약속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들은 제사 드렸을 때 느꼈던 양심의 개운함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어주신 새 언약의 약속을 믿고 그 위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추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결과로 일어나는 감정 변화를 주목할 것이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실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주목해야 합니다. 느낌이 있거나 없거나, 약속에 근거하여 늘 성령의 인도를 구할 때, 우리는 때로 “진실로 그러하다!”고 고백하며 감사할 것입니다.

기도:

주님, 저희의 감정이 늘 살아있게 해주십시오. 마음의 질병으로 인해 살아 있으나 죽은 것처럼 사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때로 터질 듯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하지만 저희로 하여금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게 해주십시오. 감정의 조화에 놀아나지 않고,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0 responses to “히브리서 9장 11-22절: 약속에 근거한 믿음”

  1. billkim9707 Avatar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대제사장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지으신 지성소에서 완전하시고 거룩거룩하시고 온전한 대속제물이 되셔서 저와 온인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시고 아버지 우편에서 중보자로 계시다가 다시 새하늘과 새땅을 위하여 오신다는것을 고백합니다만 자주넘머지고 죄책감에 짖눌려 살아온 무지한 존재 입니다.

    단한번에 온전한 제물로 속제하신 그토록 귀한 언약을 꼭 붙잡고 감정과 느낌에 끌리지않고 눈이오나 비가오나 항상 감사하며 사는 삶을 살아내도록 도와 주십시오,

    죄책감에서 자유가되고 주님사랑으로 만나는 모든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움이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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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achi049 Avatar
      gachi04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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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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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gachi049 Avatar
    gachi049

    새 언약,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과 고통으로 점철돤 십자가의 의미와 독생자를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바치신 하나님의 고통스런 마음을 피조물의 감정으로 옮겨주셔서 날마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깨달아 기억하고 이웃에게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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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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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구름이 끼고 쌀쌀한 아침입니다. 재의
    수요일로부터 딱 한달이 지났네요.

    어제에 이어지는 보혈과 대속의 원리 풀이. 죄로 인해 막힌 담, 곧 휘장을 뚫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을 다시 여신 주.

    죄의 삯은 죽음이기에 그 결박에서 풀려나기 위해서는 생명의 몸값 (ransom)이 필요 하지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제물로 드려 그 값을 대신 치뤄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조건없는, 완전한 구원의 약속을 다시 주셨습니다.

    오늘도 여러 고민들과 씨름하고 여러 문제들에 쫓기면서 하루를 보내겠지요? 삶의 무게에 눌려 지치고 낙심할 때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주세요.

    주의 보혈, 그 대속의 능력으로 어두운 세상 가운데 소망의 작은 등불을 밝히는 그런 인생이 되기를. 주여,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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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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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짐승의 피를 뿌리면 부정한 것이 깨끗해진다고 믿으며 제사를 올립니다. 산 짐승을 잡아 제물로 단 위에 올리는 제사는 참가자들이 오감을 통해 경험합니다. 감각은 감정을 건드립니다. 감정이입이 많이 될수록 제사를 잘 드린다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감정은 우리의 이성과 판단을 확인 시켜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 느낌이 없으면 판단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감정이 해석해 주지 않으면 판단이 그만큼 늦어집니다. 신앙은 감정과 이성의 두 영역 중에서 어디에 가까울까요. 사람에게 감정과 이성 두 가지 만 있는게 아니니 똑똑한 질문은 아니겠으나, 살아 있다는 것은 감정과 이성으로 표현되는 것이니 우리의 믿음은 현주소는 이성과 감정의 동네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요즘은 미국도 한국도 감정이 전면에 나선 것처럼 보입니다. 어딜 보아도 격정적이고 감정을 건드리는 일 뿐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은 어른답지도, 지성인답지도 않은 일이라는 사회적 약속 때문에 감정의 표출이 순조롭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느끼는대로 표현할 수도, 하지 않고 담아만 둘 수도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굿을 해주는 무당을 찾고, 점집을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는건 복잡한 감정을 감당할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겠지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점집을 드나든다는 말을 들으면 그 무슨 어리석은 짓인가 싶었는데, 믿음의 주소지가 감정 쪽인 사람이라면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줄 누군가를 찾으려고 하겠구나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오늘 해설에서 지적하듯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자신과 사회, 현실과 역사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성에 안 차는 일일 것입니다. ‘양심의 개운함’도 잘 모르겠고, 회개와 결단도 확실치 않으니 믿는건지, 안 믿는건지 같은 원초적인 질문까지 하게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새 언약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예수님 만 죽는 것으로 -유언을 남긴 사람이 죽는 것 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옛 언약, 옛 제사, 옛 율법, 옛 정신, 옛 감정…모든 옛 것, 유언의 상속자마저도 죽어야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죽지요. 죽는 법이 있을까요. 하루 씩만 살고, 하루 씩만 죽으면 어떨까요. 매일 말씀으로 받은 하루씩 양식으로 사는 법을 주님께 기도해야겠습니다. 세상의 명령도 매일 하나씩 거부하면서 세상에 대해 죽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거룩한 소명을 감당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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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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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blissful2a0acacad4 Avatar
    blissful2a0acacad4

    양심을 위한 잔인한 자유

    기본적인 선을 하나님이 주신 것 같다.
    주님을 모른채로도 양심은 기본이 되어 스스로를, 사회를 바르게 만든다.
    그리고 그 옛날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죄없는 가축을 눈앞에 자기를 대신해서 죽임으로 죄를 모면한다. 피로써 정결케 되는 뜻아래 무능한 악인의 이기적이고 잔인한 자유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점점 더 죄된 자신의 자유를 위해 쉬운 말과 행동으로 생명을 죽이고 잔인한 자유를 얻으며 살아간다.  스스로 괜찮다는 착각의 감정에 머무르며 천지분간을 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이런 나에게 어느 순간 예수님은 그 자리에 다시 와 계셨다.  
    아무런 죄없이 살육을 당하던 그곳에, 끔찍하고 잔인한 고통의 그곳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다.
    아 나는 왜 살아야 하나! 
    피로 점철된 그 자리에 서서 주님을 뵈온다.
    떨리는 손과 움직일 수가 없는 발로, 흔들리는 어깨로 흐르는 눈물로 주님을 뵈온다.
    감당할 수 없는 사랑에 온몸이 저리도록 그렇게 그곳에 서서 주님만이 보이는 주를 뵈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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