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장 41-45절: 길 잃은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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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야고보와 요한이 선수를 친 것을 알고 다른 열 제자가 “분개하였다”(41절). 그들에게도 같은 욕망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을 아시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곁으로 부르시고는, 하나님 나라와 땅의 나라를 대조시켜 보이신다. “너희가 아는 대로”(42절)는 세상의 질서를 말한다. “이방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세상의 질서를 두 개의 단어로 정의하신다. 하나는 “내리누르다”인데, 이것은 “위에서 다스리다”(‘카타크리누오’)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세도를 부리다”로서, 이것은 “위에서 권세를 휘두르다”(‘카텍수시아조’)는 의미다. 다른 사람보다 높아져서 군림하고 부리려는 욕망이 세상 돌아가는 기본 원리라는 뜻이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세상 질서와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신다.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43절)는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 질서와는 다르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욕망과 “으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일단 인정해 주신다. 다만, 위대함과 으뜸됨의 의미와 그렇게 되는 방법을 수정해 주신다. 하나님 나라에서 위대함과 으뜸됨을 결정하는 것은 가진 것과 성취한 것의 분량이 아니라 희생하고 헌신한 것의 분량이다. “섬기는 사람”은 ‘디아코노스’ 즉 청지기를 의미하고, “종”은 ‘둘로스’ 즉 노예를 의미한다. 스스로를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큰 사람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45절)고 하신다. 메시아 즉 영원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따라 낮아지고 섬기는 길을 가신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섬김과 희생의 절정이다. “인자”로서 다시 오셔서 가장 높은 왕이 되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다. 이것은 제자들이 메시아에 대해 기대하고 있던 관념을 뒤집어 엎는 말씀이다. 그래서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까지 그분의 고난과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를 직역하면 “많은 사람을 위한 몸값으로”가 된다. 여기에 사용된 전치사 ‘안티’는 “위하여”로 번역할 수도 있고 “대신에”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두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하지만, 일차적인 의미는 “대신에”라고 보아야 한다. 이사야서 53장의 예언처럼, 메시아로서 예수님은 우리 “대신에”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헬라어 표현에서 “많은”(‘폴로이’)는 문맥에 따라서 “모두”라는 의미를 가진다. “몸값”은 ‘뤼트론’의 번역으로서 노예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몸값을 의미한다. 

묵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신 욕망(식욕, 성욕, 성취욕, 명예욕 등)은 원래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잠재성을 마음껏 꽃 피우도록 주어진 도구입니다. 따라서 인간성이 심하게 망가지지 않았다면, 좋은 사람이 되고 그것으로 인정 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문제는 죄성이 세균처럼 모든 욕망에 퍼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은 자주 방향을 잃어, 바라지 말아야 할 것을 바라고, 한계를 망각합니다. 죄성에 물든 식욕은 과식과 폭식을 부르고, 성욕은 간음과 음행으로 나아가고, 성취욕은 온갖 불의를 만들어 냅니다. 그로 인해 세상은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 현장이 되고, 그것이 심화되면 현실은 지옥으로 변합니다.

이 세상을 현실 지옥으로 만든 것이 죄성에 물든 인간의 욕망에 있으므로, 현실 지옥을 현실 낙원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첫 걸음은 인간 존재 안에 퍼져 있는 죄성을 치유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할 때에야 완전히 제거될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죄성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다만 죄성이 우리를 압도하지 않도록 죄성의 세력을 죽여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 몸 안에 다양한 세균이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건강하다는 말은 세균이 완전히 박멸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세균이 우리 몸을 압도하지 않도록 제어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성이 발호하지 않게 하려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방법대로 우리의 욕망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이 세상을 현실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여 할 수 있는대로 많은 사람들을 섬길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평가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주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기도:

주님, 주님의 영으로 저희를 채우고 다스려주십시오. 한 순간이라도, 고삐풀린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고, 사로잡힐 때면 얼른 저희를 깨우쳐 주셔서, 그것이 저희의 습관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님께서 걸으신 섬김의 길, 희생의 길을 저희도 기쁨으로 걸어가게 해주십시오. 저희로 인해 이 세상의 한 구석이라도 밝아지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9 responses to “마가복음 10장 41-45절: 길 잃은 욕망”

  1. gachi049 Avatar
    gachi049

    점점 세상은 이방인들이 득세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욕망을 나라와 이웃을 외면하고 끝없이 채우고 있습니다. 인간의 원죄로 인하여 기회만 있으면 사기와 기만과 폭력으로 상대를 밟고 일어서고 있습니다. 그중에 나자신도 포함되어 있음을 고백합니다. 시시때때로 다가오는 욕망의 늪에 빠지지 않도록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새하늘과 새땅을 기다리며, 십자가를 바라보며며 살아 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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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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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현대 심리학에서 인간은 상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볼 때 반응한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있는 어떤 점이 상대에게서 보이면 그에 대해 반응을 하는데 미러링 mirroring 이라는 용어를 씁니다. 무의식적 상호작용 매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나의 어떤 모습을 상대에게서 볼 때 반응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미러링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친절하거나 용감한 사람을 볼 때 내 안의 친절함과 용기가 반사되어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집니다. 부정적인 미러링의 경우는 내 안에 해결되지 않은 미진함이나 약점이 있는데 상대방에게서 그런 것을 보면 그를 지적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감추고 싶고 고치고 싶은 점이 드러나면 내재해 있던 갈등과 불안이 분노로 변합니다. 자녀와 갈등할 때 무엇 때문에 화가 나는지를 들여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특별히 아뢴 내용이 무엇인지 알게된 제자들이 화를 내는 것은 자기들도 같은 것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없었으면 화가 나지 않았을겁니다. 예수님은 이런 갈등의 순간을 교육의 기회로 쓰십니다. Teacheable moment 로 삼으십니다. 타인을 조종하려는 근본적인 욕망을 다스리라고 하십니다. 성격적으로 지배욕이 과한 사람이 있고 덜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격이 그래도 환경에 따라 성격이 꽃 필 수가 있고 사그라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겐 태생적으로 가진 것을 사회순응적으로 만들어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교육과 종교, 문화를 통해 긍정적인 -나와 타인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발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와 세계를 보는 시각을 새롭게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 사회는 나와 타인에게 공통으로 좋은 길 만을 택하여 발전해 오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좋은 것을 우선적으로 취하려면 약육강식의 논리를 써야 합니다. 흔히들 야생의 세계는 약육강식이 통한다고 말합니다. 그럴까요. 사자는 배고프지 않으면 사냥에 나서지 않는데 사람은 배가 고프지 않아도 지배욕과 과시욕에 시달립니다. 사람이 야생 동물에 못 미치나 싶습니다. 예수님의 사회는 약육강식을 핑계대지 않는 사회입니다. 자발적인 약자를 칭찬하는 사회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지배의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배와 과시의 신이 아니라 자비와 은혜의 신입니다. 이집트의 신과 라이프 스타일은 광야로 나오면서 다 버렸습니다. 다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나의 일상이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배우고 닮는 자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높아지려고 공부하고 노력하는게 아니라 선해지려고 애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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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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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오늘부터 사순절이 시작인 것을 새벽 묵상 때 깜빡했습니다. 무엇을 ‘포기’하는가가 편의나 취향을 출발로 삼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감당하는 능동적인 변화를 향해 갔으면 좋겠습니다. 강자에 대한 선망과 자기의의 합리화를 거두어 들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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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nderlya0860fa4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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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재의 수요일, 사순절이 시작되는 아침이에요. 오랜만에 새벽 예배에 다녀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고보와 요한의 청탁이 가져온 파장에 대한 이야기. 더 높은 책임과 더 큰 권한을 맡은 사람이 오히려 종이 되어 모두를 섬긴다는 이상한 나라, 천국.

    죄와 악의가 가득찬 이 세상에서 경쟁에 밀려나지 않으려 바둥거리며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듯 해요. 그래도 우리 인생에 허락하신 각자의 자그만 동산들을 에덴으로 가꿔나갈 지혜와 능력을 주시길.

    지배하고 휘두르고 싶어하는 숨은 욕망을 내려놓습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자녀들 부터 진심으로 공감하고 그 존재 자체를 기뻐하여, 믿음으로 기다려 주는 그런 가장이 되기를 원해요.

    도와주세요,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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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ull9707 Avatar
      bull970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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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bull9707 Avatar
    bull9707

    섬김을 받을려고 오신것이아니고 섬기려고 많은사람을 살릴려고 대속물로 오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다짐은합니다만 자신이없는 비겁한 존재입니다, 성령님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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