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장 42-50절: 죄 가운데 허비된 인생

3–4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이어서 예수님은 “죄짓게 하는 것”(42절)에 대해 경고하신다. “작은 사람들”(42절)은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존재감이 없는 이들을 가리킨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사람이 절대값으로 동등하게 대접받는 곳이다. 그 나라의 원리와 기준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대하든 진심과 성심으로 대해야 한다. 그들 중 어느 하나라도 “죄짓게”(원어의 의미는 “넘어지게”) 하는 것은 무겁고 무서운 죄다.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42절)는 말은 그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그런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죄짓게 만드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것은 손도, 발도, 눈도 아니다. 마음의 죄성이 손과 발과 눈을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음에 물들어 있는 죄성이며, 그 마음을 조종하는 악한 영이다. 그것을 아시면서도 손과 발과 눈을 “죄 짓게 하는 것”으로 지목하신 이유는 “그것을 찍어 버려라”(43절, 45절) 혹은 “그것을 빼어 버려라”(47절)는 말씀으로 경고하시기 위함이다. (44절과 46절이 없는 이유는 두 절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런 죄를 범하지 않으려면 “죄짓게 만드는”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것은 손도, 발도, 눈도 아니다. 마음의 죄성이 손과 발과 눈을 조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마음에 물들어 있는 죄성이며, 그 마음을 조종하는 악한 영이다. 그것을 아시면서도 손과 발과 눈을 “죄 짓게 하는 것”으로 지목하신 이유는 “그것을 찍어 버려라”(43절, 45절) 혹은 “그것을 빼어 버려라”(47절)는 말씀으로 경고하시기 위함이다. (44절과 46절이 없는 이유는 두 절이 후대에 첨가된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지옥”(43절, 45절, 47절, 48절)은 ‘게헨나’의 번역이다. ‘게헨나’는 예루살렘의 남쪽에 위치한 계곡을 가리킨다. 과거에 이곳에서는 자녀를 불태워 바치는 제사가 행해졌고, 그로 인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역겨운 장소로 여겼다. 그곳은 원래 “도벳” 혹은 “힌놈의 아들 골짜기”로 불렸으나, 예레미야는, 그곳을 “살육의 골짜기”라고 부르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렘 7:32). 후대에 그곳은 쓰레기나 분뇨를 버리는 곳이 되었고, 그로 인해 늘 매캐한 연기가 피어 올랐다. 

이런 까닭에 예수님은 ‘게헨나’를 지옥에 대한 비유로 사용하신다. “그 꺼지지 않는 불”(43절)과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48절)는 비유는 이사야가 전한 예언에서 가져 왔다(사 66:24).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49절)라는 말은 “심판을 피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는 뜻이다. ‘게헨나’의 반대 개념으로서 예수님은 “생명”(43절, 45절)과 “하나님 나라”(47절)라는 표현을 사용하신다. 여기서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 혹은 “초월적 생명”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소금은 원래 좋은 것”(50절)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다른 비유로 사용하신다. 소금이 유용한 이유는 짠 맛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가운데 소금을 쳐 두어서” 라는 말씀은 제자답게 살라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의 정신을 배우고 그 정신대로 사는 것이 제자들이 가져야 할 짠 맛이다. 그들이 길에서 누가 높은지를 두고 다툰 이유는 그들에게 아직 짠 맛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서로 높아지기 위해서 경쟁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 낮아져서 섬기는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곳에는 평화가 임한다.  

묵상: 

예수님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허비된 인생의 마지막 운명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그분은, 죄인이 맞을 최후의 운명에 말씀하시면서 ‘게헨나’를 비유로 사용하십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비유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세는 삼차원 공간과 일차원 시간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의 경험으로 내세의 상황을 묘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헨나’라는 비유를 들었을 때, 예수님의 청중들은 그 골짜기를 상상하며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꺼지지 않는 불”과 “죽지 않는 구더기”도 역시, 죄인들이 맞을 최후의 운명이 얼마나 무서운 지를 실감하게 하기 위한 비유입니다.

‘게헨나’라는 비유 언어를 “지옥”이라는 사실 언어로 번역해 놓은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지옥”이라는 표현은, “귀신”이나 “마귀”처럼, 동화나 민담을 통해 형성된 선입견을 끌어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것은 죽음 이후의 불행한 운명인데, “지옥”이라는 말은 “땅 속에 만들어진 감옥”을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힙니다. 그것은 관심을 엉뚱한 곳에 두게 하고 초점을 놓치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지옥이 어떻게 생겼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묻는 것은 길을 잃은 것입니다. “죄 가운데 허비된 인생은 내세에서 어떤 운명을 맞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죽음 이후에 받을 심판에 대해 가장 자주 언급한 사람은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협이나 비유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심판보다는 구원을, ‘게헨나’보다는 천국을, 영원한 불행보다는 영원한 복락에 대해 더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구원과 천국과 영생에 대해 압도적으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위협하여 믿게 하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경고로 주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고 그 사랑에 감복하여 믿게 하셨습니다. 

기도:

주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저희는 심판이 두렵고 영원한 불행도 두렵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피하려고 주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저희를 향한 주님의 사랑 때문에 주님을 믿고 따릅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곧 천국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8 responses to “마가복음 9장 42-50절: 죄 가운데 허비된 인생”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날씨가 많이 풀렸습니다. 바람이 쌀쌀해도 햇살은 따사한 아침이에요.

    오늘은 죄의 결과에 대한 경고, 손발이 죄짓게 하거든 잘라버리라는. 그리고 마치 공포영화 같은 죽음의 계곡,
    지옥의 이야기.

    저는 솔직히 지옥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별로 믿고 싶지 않고 잘 이해되지도 않는
    것 같아요.

    빛이 없는 것이 어둠이고 질서가 없는 것이 혼돈이듯, 하나님의 나라가 없어지는 것, 그 나라로 부터 끊어지는 것이 바로 게헨나가 아닐지요?

    주님, 오늘 하루도 죄의 집요한 공격에서 저를 지키게 해주세요. 실족하고 낙심하여 점점 구원에서 끊어지며 우는 사자 같은 시탄에 삼켜지지 않도록 저와 제 사랑하는 이들을 지켜주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죄에 물들곤 하는 이 약하고 추한 마음을 애통의 제물로 주 앞에 놓습니다. 주님 보혈로 씻어 주세요.

    아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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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예수님의 말씀이 단호하고 분명합니다. 남을 악한 길로 인도하는 사람은 스스로 바다에 빠짐으로써 죄값을 치루라고 하십니다. 의도가 있거나 계획한 것이 아닌데 타인의 삶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 사람이 죄의식에 사로잡혀 괴로와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했다고 해석할 수 있겠나요. 손이나 눈이 자꾸 죄를 짓게 하니까 없애 버린다는건 듣기에는 끔찍해도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빚을 못 갚거나 하라는대로 하지 않는다고 신체를 훼손하는 벌을 내리는 일도 영화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의 삶을 비탄에 빠지게 한 죄를 뼈저리게 깨닫고 괴로와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잘못을 고쳐보려고 애쓰겠지만, 애초부터 남을 해치고 망치려 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죄에도 크기가 있어 큰 죄, 작은 죄로 분류할 수 있겠는지 모르겠습니다. 더욱 중한 죄와 덜 나쁜 죄가 있는 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법에서 정하는 벌의 형량은 죄의 위중성과 질을 따져 결정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죄의 무게를 어떻게 재는지요. 미국 드라마 시리즈로 ‘돕식 Dopesick’이 있습니다. 의존증이 높은 오피오이드계 진통제를 만들어 탄광촌처럼 과중한 신체 노동과 사고에 노출되어 있는 커뮤니티에 뿌리는 빅파마 Big Pharmaceuticals 와 그들 일가의 사악한 계획과 방법을 추적하는 마약단속국 DEA 의 싸움을 그린 드라마입니다. 하나님은 빅파마의 주주들과 경영진을 위해 별도의 ‘지옥’을 준비하셨을 것이라고 (말은 되지 않지만) 상상해야 그나마 속이 좀 풀릴 정도로 오피오이드로 인생이 망가지는 사람들의 고통이 너무 큽니다. 예수님의 원칙은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생명의 유지나 연장 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뜻과 섭리를 깨달아 이루어가는 삶의 기반이 되는 생명력입니다. 사지가 온전하지 않은 사람을 고쳐 주시는 것은 활기를 찾아 의미있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신체의 어딘가가 기능하지 않아도 멀쩡한 사람보다 더욱 진하고 알차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치유는 육신의 회복 만이 아니라 존재의 안녕, 평강이 목표가 됩니다. 예수님의 원칙과 기준에서 가장 멀리 있는 행동은 자기를 위해 타인을 이용하는 일일 것입니다. 타인의 안녕을 해치는 일은 사소한 언사에서 부터 의도된 걸림돌까지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여기라는 말씀은 오늘 말씀의 수사와 진의를 간결하게 담고 있습니다. 내게 허락하신 많은 좋은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고, 이것을 타인이 행복해지는 일에 기여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받은 것이 많아 감사한 데서 시작해, 줄 수 있고 더 많이 줄 수 있어 더욱 감사한 데까지 가는 넓은 믿음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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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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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blissful2a0acacad4 Avatar
    blissful2a0acacad4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단순히 격리되어 먹고 살고자 했던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며 도구로 이용하고, 바뀌지 않은 불행에 자신도 놓아 버립니다. 서로 도우며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지옥을 만들어 죽음도 태어나게 합니다. 바깥 세상으로 나오는 것을 잊은 채, 못한 채 그렇게 죽지 못해 살아냅니다. 실제로 살아내려고 만들어 내는 지옥은 세상의 온갖 이름으로 우리에게 올라타고 있습니다. 부자의 거리에도 가난의 거리에도 탐욕의 폭력은 힘없는 모든 이들을 유린 합니다. 불행이 삶이 된 사람들, 그저 숨만 붙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단 말인가요? 누군가는 악을 보고 나서서 저지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이 진짜 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나 자신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을, 그 전능하심을 의지하며 더욱 악에 대해 맞서는 용기를 가지고 싶습니다. 할 수 없는 지옥의 사람도 영원하신 능력의 구원자로 인해 소망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으로 감사를 떨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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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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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billkim9707 Avatar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니 게헨나에 들어가야하는 존재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긍휼외에는 살길이 없는 처지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십자가를 지고 주님뒤를 따르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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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오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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