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장 34-38절: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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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자신의 길을 막아서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말씀을 이어가신다. 메시아를 제대로 따르기 위해서는 첫째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34절). 자신의 철학과 신념과 목적과 야망을 내려 놓고 예수님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의 일”을 앞세우는 것을 말한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면 불편과 손해와 오해와 박해를 겪게 되어 있다. 그것이 “자기 십자가”다. 그것은 다른 누가 대신 져주지 않는다. 

여기서 “따라오다”(‘아콜루테오’)라는 동사가 두번 사용 되었는데, 모두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계속되는 행동을 의미한다. 메시아이신 예수를 따르는 것은 숨 다할 때까지 매일 지속되어야 한다. 매일, 지속적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그에 따르는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에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끝까지 따를 수 없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제 목숨을 잃는 것”(35절)과 같은 일이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자아가 부정 당할 때 살해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자아가 죽은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면,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 삶은 영원으로 이어진다.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자아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자아를 따라 헛되고 거짓된 삶을 살다가 영원한 죽음에 이른다. 

“온 세상을 얻는다”(36절)는 말은 현실에서 형통하고 승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현실 세상에서의 유익 때문이다. “제 목숨을 잃는다”는 말은 참된 삶을 살지 못한다는 뜻이며,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육신적인 생명과 맞바꿀 것이 없다면, 참되고 영원한 생명과 맞바꿀 것은 더 더욱 없다(37절).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과 맞바꿀 수 없다. 

예수님은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38절)라고 탄식하신다. 모두가 육신과 물질이 전부라고 여기고 자신의 유익만을 구한 결과로, 이 세상에는 온갖 죄악이 번성하게 되었다. 그런 세상에서 메시아이신 예수를 따라 사는 것은 불편과 손해와 오해와 박해를 각오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런 태도에 대헤 예수님은 엄중한 경고를 던지신다.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어떤 의미로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는지가 드러난다. 그분은 다니엘이 환상에서 보았던 그 모습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그 때 그분은 당신을 믿고 끝까지 견딘 사람들을 높여주실 것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말을 부끄럽게 여긴 사람들은 그 영광에 참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영원한 불행을 의미한다.

묵상:

예수님은 당신의 길을 막아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33절)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십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안전과 현세적인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아에 사로잡히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의 자아는 이기심으로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병든 자아는 자신을 지키고 키우는 일에만 관심을 둡니다. 누구를 만나든 자신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를 따집니다. 무슨 일을 할 때면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한지를 따집니다. 

반면,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행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주 자아의 욕구와 어긋납니다. 병든 자아는 자기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이웃을 위해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아의 욕구를 거듭 부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손해와 불편을 각오하는 일이며, 때로 이웃으로부터 비난과 배척과 박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나라를 믿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목숨보다 큰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어야 하고, 물질 세계를 초월한 영원한 세상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한 나라에서 발견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이 땅에서 손해와 불편과 거부와 박해를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의 제자가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기도:

오늘도 용수철처럼 안으로 단단하게 꼬인 저희의 자아를 봅니다. 매일같이 기도로, 말씀 묵상으로 꼬인 것을 풀어 보지만, 돌아보면 어느 새 다시 꼬여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려 하는데, 입술과 손은 어느 새 사람의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망치로 삼아 저희의 꼬인 마음을 펼쳐 주십시오. 주님처럼 저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완주하도록, 주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7 responses to “마가복음 8장 34-38절: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

  1. gachi049 Avatar
    gachi049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현대그룹 회장이 이세상을 떠나고 남긴 것은 신발 한 켤레뿐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누구나 이 세상 떠날때는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는 동안 나를 부인하고 주어진 십자가를 꼭 부여 잡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사는 훈련을 통해 아름답고 밝은 천국길을 걸어가기를 소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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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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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billkim9707 Avatar

    매일 아침 세상을 버리고 자신을 부인하고 허락하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뒤를 따르려고 결단을 합니다만 모르는사이에 보이는 세상만사만 보고 살아가고 있든지 아니면 주님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교회와 교인들을 멸시 천대하는 풍조의 세상에서 담대히 십자가를 자랑하지 못하는 비천한 신세입니다. 주님안에서 위험과 손해와 희생을 감내하면서 사는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십자가를 자랑하며 주님뒤를 마지막 숨쉴때까지 따르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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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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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현재의 삶이 너무 좋고 애착이 커서 일지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이 오늘 너무 무겁네요.

    필생즉사 필사즉생, 이순신 장군이 그의 전사들에게 목숨을 던지는 결단을 요구했듯이, 예수님도 우리의 전 존재, 그리고 생명까지 내던지는 용기를 요청하시네요.

    저 자신의 목적, 이익, 인식과 이해, 그리고 감정까지 다 내려놓고 주의 뜻, 주신 사명, 그의 능력과 선하심에 대한 믿음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입으라는 초청이겠지요?

    어떻게 하지요? 제자로 거듭나기 위해선 우선 지금의 내가 죽어야만 하네요.

    청명하지만 찬 바람이 환하게 부는 아침입니다.

    좁은 길을 선택할 용기를 주세요. 이기심과 나르시시즘의 감옥에서 벗어나 가족과 이웃에게 내 생명을 선물로 주는 인생이 되길.

    지각을 뛰어넘는 주의 섭리와 계획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며 걱정의 짐을 십자가 그늘 아래 내려놓는 하루가 되기를.

    아빠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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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뜻을 곰곰 생각해 봅니다. 무슨 말일까요. 자기 몫의 고난을 감당한다는 뜻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저마다 자기가 짊어지고 가는 인생의 무게가 있다는 뜻이겠지요. 십자가=고난이라는 공식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할 때 드는 생각입니다. 한국의 교회가 세상의 돌팔매를 맞고 있습니다. 교회가 돌에 맞는 이유는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메신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의 메시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과 용서, 구원과 정의라는 것을 압니다. 누군가의 전도를 받아서 가든, 자발적으로 가든, 교회에 가는 사람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아뢰고 싶어서 입니다. 예수님 앞에 모여든 무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다 자기 사정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가 성장과 부흥의 영광스러운 단계를 지나면서 권력이 되었습니다. 기득권이 되었고, 유행이 되었습니다. 메시지를 더욱 돋보이게 하겠다며 포장에 엄청난 돈과 정성을 썼습니다. 메시지가 중하니 당연히 메신저도 중요하다면서 메신저를 광내고 번쩍거리게 하는데 앞다투어 열심을 냈습니다. 어느새 말씀은 전하는 사람의 그릇에 갇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전하는 사람의 스토리텔링이 메시지의 전부가 되어 버렸습니다. 메신저가 선택하면 메시지가 되고, 메신저가 중요하지 않다고 넘어가면 그 메시지는 삭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메신저들이 지는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일까요. 십자가를 지기는 지는걸까요. ‘십자가를 진다’는 말 자체가 희생과 연단을 뜻하니까 그렇게 말만 해도 이미 존경을 받게 된다는 계산부터 하는걸까요. 교회 일=하나님 일 이라는 생각도 다를 게 없습니다. ‘교회’만 붙이면 다 거룩하고 고상하고 귀한 일이라는 통념이 된 것 같으니까 좋은 일 같은데 반대로 안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체크하지 않고, 점검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누가 거룩하다는 것인지, 누구에게 고상하고 귀한 일을 하는 교회라는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들만 메신저가 아닙니다. 교인들도 메신저입니다. 교회에서 아멘 아멘했지만 교회 밖에서는 어떻게 살았기에 교회가 이 지경으로 돌팔매를 맞게 되었는지요.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나 사는 모습을 보고 교회에 가고 싶어지고, 예수를 믿고 싶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어쩌면 좋습니까. 예수 믿어 저 만큼이지 안 믿었으면 더 형편 없었을거라는 말을 위안 삼아야할까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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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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