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장 27-30절: 절반의 고백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예수님은 벳새다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빌립보의 가이사랴라는 마을에 이르신다. 그 도시는 헤롯 대왕의 아들 빌립이 분할 통치하던 지역의 수도였는데, “빌립보가 황제(가이사)를 위해 헌정한 도시”라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로마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이 도시의 지배적인 정신이었다. 그 도시는 예수님이 활동하셨던 갈릴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예수님은, 그분에 대해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곳으로 가셔서 갈릴리에서의 활동을 정리하고 방향 전환을 꾀하려 하신다.   

이 도시에 속한 여러 마을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시던 중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 이 질문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자 제자들은 각기 들은 대로 전한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헤롯 안티파스에게 죽임 당한 세례 요한이 살아 돌아 왔다고도 하고, 죽지 않고 들림 받은 엘리야가 다시 왔다고도 하고, 예언자 가운데 하나가 왔다고도 했다(28절). 마가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전한 바 있다(6:14-16).

제자들의 보고를 다 듣고 나서 예수님은 다시 물으신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절) 이것이, 예수님이 정작 묻고 싶었던 질문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답한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 원문에는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 말의 어법을 따라 “당신”을 “선생님”으로 의역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로 “메시아”를 의미한다. 원래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왕, 제사장, 예언자 등에 사용된 용어였다. 하지만 예수님 당시에 메시아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보내실 영원한 구원자를 의미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30절)하신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아는 것은 마치 벳새다의 눈먼 사람이 희미하게 보는 것과 같이 아직은 불완전한 지식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은 절반만 옳았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구원자로 오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는 했지만, 메시아로서 그분이 어떤 일을 하실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묵상:

예수님이 빌립보의 가이사랴로 가신 이유는 적어도 두 가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첫째,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정리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둘째, 빌립보의 가이사랴의 상징성 때문입니다. 그곳은 로마 황제의 통치권이 매우 강하게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지켜 보면서 “이분이 과연 누구신가?”라는 질문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최종적인 답을 낼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답합니다. 로마 황제의 통치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곳에서 베드로는 매우 위험한 발언을 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침묵한 것은 베드로의 답에 동의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이었던 제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엄청난 지적 도약이었습니다. 이제까지 그들은 예수님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전제하고 그 질문과 씨름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한 인간이었다고 전제하는 한 그분의 하신 말씀과 행적은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조상 때로부터 믿어왔고 기다려 왔던 메시아가 자신들의 눈 앞에 계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미루고 미뤄 왔는데,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그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입 단속을 명령하십니다. 빌립보의 가이사랴 같은 곳에서 그 사실이 알려지면 당장 체포되어 반역자로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위험 때문에 입 단속을 하신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계속 읽어가면서 찾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기도:

주님을 온전히 아는 것이 때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깨닫습니다. 저희의 지식과 경험이 자주 걸림돌이 됩니다. 저희의 생각에 맞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을 외면하려 하고 주님의 이적을 부정하려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저희 각자의 지식과 경험의 크기로 축소하려 합니다. 오, 주님, 저희의 믿음이 주님의 크기로 자라게 해주십시오. 주님 앞에서 저의 지식과 경험의 장벽이 거듭 깨어지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8 responses to “마가복음 8장 27-30절: 절반의 고백”

  1. billkim9707 Avatar

    주님이 선지자, 예언자라고 세상도 인정합니다, 회교 코란에서도 예수님을 한사람의 prophet 이라고 인정합니다. 주님은 구세주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세상의 모든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어린양이시고 부활이시고 생명이시고 창조주 전지전능의 임마누엘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입술로만 고백하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땅에 떨어저 죽어 많은 열매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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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키리에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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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마가는 예수님이 어느 지방에 가셨는데 거기서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전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와 장소는 기억을 촉진하는 장치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만 우리의 기억에는 시간과 공간이 함께 녹아 있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인데, 그 산골의 기억은 여러 꽃이 피어있던 ‘봄’이라는 계절, 때와 시간이 함께 떠오릅니다. 그러니 고향을 기억하면 고향이라는 장소와 그곳에 살던 시절이 같이 기억나는 겁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활동을 정리하면서 특정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합니다. 가이사라 빌립보에 있는 마을에 가셨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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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오늘은 유명한 베드로의 신앙공백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메시아이십니다. 마가는 이 이야기의 서사를 매우 간결하게 다루지요. 천국의 열쇠에 대해 얘기도 교회의 반석에 대한 얘기도 없습니다.

    이 아침 베드로처럼 저도 주를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 그리고 나의 구원자로 고백해
    봅니다.

    그렇지만 주가 어떤 분이신지는 청동거울에 비친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보지요. 저의 신앙고백은 그래서 늘 불완전하고 힘이 약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아빠 아버지.

    주님을 더 알기를 원합니다. 주의 뜻과 사랑 안에, 주시는 그 생명의 숨 안에서 매일, 매시간, 매 순간 머물길 원합니다.

    금요일이라 좀 느지막이 출근하려 합니다. 오늘도 일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를 섬기 듯 성심 껏 일하게 하시고 오늘 만나는 모든 이들을 환대하며 주 안에서 창조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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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가이사라 빌립보라는 도시가 로마의 통치를 드러내놓고 찬양하는 분위기라서 그랬는지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말하는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이어서 제자들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But) who do you say that I am? 베드로가 답합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You are the Christ, the Messiah. 예수님의 질문은 사실 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쓰는 아람어가 그런건지, 저자 마가의 오리지널 기록의 문법이 그런건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 자체가 어색합니다. 누구? 처음 보는 사람한테 ‘누구세요?’ 묻는 것은 이름을 묻는 것일 수도 있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직업을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누구세요 하고 묻는 것은 당신은 내게 무슨 용무가 있는거냐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궁금하고, 더 나아가 제자들은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궁금하셨을 겁니다. 물론, 정말 몰라서 물으셨겠나 하는 의심도 듭니다. 답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생각거리를 주시려고, 스스로 정리해 보라고 하신 질문이겠다 싶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지 않고,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신 것은 너에게 나는 누구냐, 너에게 나는 무슨 의미이냐,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등을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정답’을 말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장면을 좀 더 길게 기록합니다. 앞뒤의 상황도 마가복음과 비슷합니다만 마태는 예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신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렇게 잘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우리는 (독자는) 베드로에게 그만한 실력이 없다는걸 알게 됩니다. 정답을 말하는 것과 정답을 이해하고 소화해서 자기 지식이 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입니다. 절반의 고백이기는 하지만 절반까지 간 것도 기릴 만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질문,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베드로의 답, 그리스도이십니다. 질문과 답이 다 나와 있으니 외우기만 할 것인지, 새로 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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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blissful2a0acacad4 Avatar
    blissful2a0acacad4

    질끈 감은 눈과 반절에도 미치지 못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믿는다고 살아갑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허영의 기쁨들은 소용없이 사라지고 실은 제대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절망하고 맙니다.

    쉽게 스스로를 생각하고 심각하게 남을 훼방하는 옹졸한 마음이 참 어렵습니다.

    언제 주께 온 마음으로 크게 눈을 열어 바라볼 수 있을까요?  어떻게 같은 주의 자녀로 나와 다른 사람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까요?

    주님께 풀썩 주저 앉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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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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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gachi049 Avatar
    gachi049

    인류 구원을 위해 높은 보좌에서 육신이 되어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마지막 심판 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고 고백하게 하심을 감드립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그 믿음 변치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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