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장 20-30절: 무엇이 정상인가?

2–4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예수님에 관한 소문이 퍼지면서 그분에 관한 중상모략도 점점 심해진다. 그 중 하나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유심히 본 사람이라면 “저 사람이 제 정신으로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제 정신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결론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소문이 나사렛에 살던 가족에게까지 알려 졌고, 그분의 일행이 가버나움에 머물 때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이 그분을 찾아나선다(20-21절). “붙잡으려고”에 사용된 동사 ‘크라테오’는 “체포하다”는 뜻이다.   

그 즈음, 예루살렘의 유대교 권력자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몇몇 율법학자들을 파견한다. 유대교를 위협하는 위험 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바알세불”(22절)은 가나안 토착민들이 섬기던 신들 중 하나의 이름이었는데,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그 이름을 사탄에 대한 별칭으로 사용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어 귀신들을 내어쫓고 있다고 결론 지었다. “귀신”은 사탄의 수하에 있는 “악한 영”을 가리킨다.

이 사실을 꿰뚫어 보시고 예수님은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23절)고 물으시면서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한 나라에 내전이 일어나면 자멸하고(24절) 한 가정에 불화가 일어나면 제대로 살 수 없는 것처럼(25절), 사탄의 진영에 내전이 일어난다면 스스로 자멸할 것이다(26절).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사탄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사탄을 결박한 것이라고 답하신다(27절). “힘센 사람”은 귀신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을 가리킨다. “세간을 털어간다”는 말은 악한 영들을 쫓아내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죄와 용서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다. 28절의 “용서를 받을 것이다”는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죄는 그냥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가 만날 때 용서 받을 수 있다. 진실로 회개할 때, 하나님에게는 용서 못할 큰 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29절)은 용서받을 수 없다. 

앞의 사건과 연결시켜 보면 이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사탄의 일로 비방하는 것을 가리킨다(30절). 새번역은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라고 번역했는데,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라고 번역해야 옳다. 예수님은 “영원히”와 “영원한”이라는 단어를 중복적으로 사용하여 그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신다. 

묵상:

진리는 때로 상식을 넘어섭니다. 영성은 때로 일상을 초월합니다. 땅의 나라의 질서로는 하나님 나라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진리를 따라 영적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은 때로 이 세상에서 미친 사람으로 취급 받습니다. 너무 깊이 신앙에 몰두되어 광신자가 되는 사람도 있지만, 참되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도 가끔 혹은 자주 비정상으로, 사차원으로 혹은 미친 사람으로 취급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눈으로 보면 그것이 정상이고 그것이 제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세상사와 인간사가 비정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관습의 기준에서 예수님은 자주 비정상으로, 사차원으로 혹은 미친 사람처럼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그분이 보고 믿는 것을 이 세상은 보지 못하고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 역시 미쳤다는 모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우리가 미쳤다고 하면 하나님께 미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다고 하면 여러분을 두고 온전한 것입니다”(고후 5:13)라고 썼습니다. 베스도 총독이 재판정에서 바울의 말을 듣고는 “바울아, 네가 비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였구나”(행 26:24)라고 했을 때, 바울은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꼭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빕니다”(29절)라고 답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고 행동한 것은 그가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고후 5:7) 했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들이 이미 일어난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히 11:1).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 세상적인 기준에서 철저히 상식적이고 철저히 정상적이라면 잠잠히 자신을 돌아 볼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고 알고 믿는 사람다운 면이 자신의 말과 행동에 있는지를 물어 보아야 합니다. 

기도:

주님,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저의 말과 행동이 너무나 상식적이고 너무나 과학적이며 너무나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 받는 것이 저의 매일의 목표였음을 깨닫습니다. 오, 주님, 저를 이 인정욕구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켜 주십시오.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의 인정이 저의 목표가 되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뜻을 따라 상식과 합리의 경계선을 뛰어 넘어 진리와 신비의 차원으로 도약하는 용기를 내려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5 responses to “마가복음 3장 20-30절: 무엇이 정상인가?”

  1. billkim9707 Avatar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징(미친사람 치유, 중풍환자 고침, 물이 포도주됨, 죽은자를 살리심. 그외 수많은 이적)을 보면서도 믿지않는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 모든 표징들이 하나님 아버지가 보내셨다는 증거인데도 반신 반의 하는 어리석은 저희들입니다, 가짜뉴스를 가지고 가정에서 나라에서 심지어는 교회에서 갈라지고 서로 싸우고 있는 형편입니다, 적어도 가정과 교회에서만이라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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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미제레레 도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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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지난 12월 한국에 계엄이 선포되었을 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명령을 내릴까 정신 상태가 의심되었습니다. 국회에서 계엄을 해제하고 배경을 추적 조사하는 과정에서 무속에 깊이 몰입해 산 일도 드러났고, 비상식적이라는 말로 뭉뚱그리어 덮어 버리기조차 유치하고 조악한 인식 수준을 가진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상식이 상식인 척 포장하는 것을 넘어, 욕심과 무지를 신탁인양 꾸며 혹세무민하는 지경까지 간 것이 21세기 선진국 한국의 모습입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은 그 후에도 계속 일어났습니다. 엄동설한에도 불구하고 시위를 이어가는 시민들이 믿을 수 없어 보였습니다. 시위란 우울한 세태에 맞서는 비장한 행위라고 알았는데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이어지는 축제 같은 시위를 한다는 것도 믿을 수 없어 보였습니다. 그것도 비상식적, 비정상적인 일이었습니다. 키세스 쵸콜렛의 모습을 하고 눈 속에 앉아있는 ‘은박시민’의 사진이 내겐 비상식의 결정체였습니다. 이 때의 비상식은 상식을 짓밟아 자기의 뜻을 이루려는 가진 자의 횡포가 아니라, 상식과 정상의 박스에서 나와야만 볼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의연함이었습니다. 그 사진에서 믿음을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부르고, 주여 주여 외치고, 찬송가를 부르다가 원색적인 비난과 저주를 쏟아내는 설교로 군중을 요리하는 목사님들의 비상식적인 모습은 믿음일 수 없습니다. 그곳이 믿음의 현장이라면 지금까지 나는 헛살았고 헛믿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식구들마저도 예수님의 정신이 어떻게 된 줄로 생각했습니다. 귀신이 들렸나보다, 머리가 돌았나보다 염려했습니다. 그런 의심이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겁니다. 비상식과 비정상은 그만큼 무서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상의 박스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은 크게 잘못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성령을 부인해서가 아니라 성령과 상식을 맞바꾸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일은 상식으로 사는 일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팔아’ 상식과 이성을 마비 시키는 사기꾼들은 믿음과 상식이 다른 부분을 교묘하게 이용해 성공을 거둡니다. 성령을 믿는 일, 예수를 인정하는 일은 상식이 비상식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예단하거나 포기해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건 뭐지, 이 사람은 누구지, 하는 단계를 넘어 비상식이 드러내는 진리의 뒷모습, 진실의 다른 얼굴을 찾아보는 노력을 기울일 때 상식으로는 볼 수 없는 세계를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 믿기지 않는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데도 우리는 믿는다고, 믿겠노라고 매일 기도합니다. 믿어야 하는 성령의 능력은 믿지 않으면서 믿으면 안되는 상식과 정상의 기준은 꼭 붙잡고 사는 것은 아닌지 찬찬이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가자지구에 한시적이나마 휴전 동의가 일어났으니 감사합니다. 한국에 안정이 찾아 오기를 희망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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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악한 영은 혐오와 선동을 뛰어넘는 극단적 증오의 정치를 통해 우리나라를 유사 내전상황으로 내몰았습니다. 불법계암이라는 망상으로 정치적 자살을 선택한 사람이 내가 뽑은 대통령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의 여론조사는 권력을 사법방패로 삼고자 하는 인물이 대통령이 되어 169석의 거대여당을 이끌며 대통령의 불소추 특권 뒤에 숨고자할 때 생기는 최악의 정치질서에 대한 국민들의 각성을 보여주는 듯 하군요. 주님, 우리나라가 이렇게 허물어지지 않도록 능력의 오른손으로 도와주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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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사탄의 권세를 묶으신 주, 오늘도 내 마음을 다스리셔서 이익과 합리의 모습으로 나를 조정하고 지배하려는 세상의 악한 영을 성령의 권능으로 묶어주세요.

    세상의 눈으로 보면 무능하고 비합리적이며 이상주의 적인 것 같아도 주가 택하신 길, 십자가의 길, 자기를 버리는 길을 걷게 도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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