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장 18-22절: 새 것이 왔다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유대인들은 금식을 가장 귀한 경건의 표시로 여겼다. 그들은 회개할 때, 애도할 때 혹은 위기의 때에 금식하며 기도했다. 신심이 깊은 사람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금식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그렇게 했다(18절). 사람들이 금식을 경건의 척도로 간주하다 보니, 금식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표시를 내곤 했다. 예수님은 금식을 할 경우에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가르치셨다(마 6:16-18). 예수님과 제자들도 금식을 했으나 전혀 표시를 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은 늘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이유를 물었다.

예수님은, 당신이 베푸시는 잔치는 결혼식 축하 잔치와 같고 자신은 신랑과 같다고 설명하신다(19절). 레위의 집에서 나눈 잔치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감사하고 축하하는 자리였다. 예수님이 베푸신 식탁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경험하게 하는 자리였다.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20절)라고 덧붙이신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에 대해 처음 암시를 주신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나라를 경험하게 해 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죄를 해결하셔야 했다. 그 날에는 그분을 애도하며 금식하게 될 것이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두 가지의 비유를 드신다. 낡은 옷을 수선하기 위해 새 천을 잘라 사용할 사람은 없다. 그렇게 되면 새 천도 못쓰게 되고 수선한 헌 옷도 사용하지 못한다(21절). 또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다. 새 포도주의 발효력이 너무 강해서 헌 가죽 부대가 터질 수 있기 때문이다(22절). 새것이 왔으면 아깝더라도 헌것은 버려야 한다.

묵상: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생각 있는 사람들에게 고민을 안겨 주었습니다. 유대교에 대한 그들의 사고 방식을 거듭 흔들고 도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중풍병자에게 죄를 용서 해주겠다고 선언하셨고(죄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이 보는 앞에서 세리와 죄인들을 불러 함께 식사를 하십니다(그분이 거룩한 분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에게서는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실천했던 금식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지극히 거룩하고 신실한 분 같은데, 또 어떤 면으로 보면 모든 금기를 깨뜨리시는 이단자와 같았습니다. 그들이 알고 있던 기존의 유대교 신앙의 기준으로 볼 때 혼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더 큰 의문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혼인 잔치에 온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으니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인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인지, 그들은 머리를 쥐어 뜯고 싶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말씀과 행동의 의미가 밝혀진 것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는 새 천과 같고 새로 빚은 포도주와 같습니다. 유대교의 옛 사고 방식에서 보면, 그분의 말씀과 행적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종교, 새로운 믿음, 새로운 영성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드러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그분을 오해하고 왜곡하고 배척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기도:

주님, 주님을 직접 뵈었던 제자들은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과 눈을 마주하고 주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특권을 누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주님을 제대로 믿는 일에는 저희가 제자들보다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음을 알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승천과 다시 오실 약속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보니, 주님이 과연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겠습니다. 주님은 과거의 어떤 것으로도 해석이 되지 않는, 전혀 새로운 분임을 알겠습니다. 오, 주님, 주님의 영광과 위엄을 찬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 responses to “마가복음 2장 18-22절: 새 것이 왔다”

  1. billkim9707 Avatar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습니다, 신자들이 모인 교회를 신부로 인정하시는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치장하는 회칠한 무덤이아니고 가나 혼인잔치같이 물이 포도주가되고 죽은영혼이 다시 태어나는 교회가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새 포대가 되어 변하는 세상을 모두 품는 교회가 되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며 위로가되는 보이지않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을하는 교회가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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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오늘 본문은 어제 주일 예배 때 본문이었습니다. 성경봉독 순서가 저라서 여러번 읽고 갔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22절은 교회 바깥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익숙한 구절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전에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레위 (마태)의 집에서 여러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언짢아 하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오늘은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 그룹은 하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질문을 빙자한 시비로 들립니다. 그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은 혼인 잔치-신랑 친구의 예를 듭니다. 너희들이 몰라서 그렇지 우리도 금식한다라고 답하거나, 내가 있는 동안에는 슬퍼할 일이 없고 또 뭐든 다 이룰 수 있는데 금식이 왜 필요하냐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혼인 잔치가 열리는 중이니 금식이 필요없다, 신랑이 가고 나면 (저절로) 금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먹을 것이 풍족하지 않았던 때 잔치는 ‘잘 먹는 날’의 상징이었습니다. 혼인, 회갑, 돐…잔치를 하는 날이고 그런 날엔 잘 먹었습니다. 엄마가 결혼식에서 받아 오는 케이크는 맛도 맛이지만 특별한 날이라는 표시 같았습니다. 예수님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잘 못 먹고 살았을겁니다. 상대적으로 넉넉한 사람들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말씀을 들었겠지만, 식민지 사회가 먹는 일에 걱정 없이 평화롭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시에 경건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다고 합니다. 금식은 당연한 일, 보통인 일상을 중단하고 특별한 선포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못 먹는 금식이 아니라 안 먹는 금식입니다. 의지가 개입된 일입니다. 예수님은 먹지 않겠다는 의지도 기특하고 갸륵하지만 나와 같이 있는 시간은 특별한 시간, 잔치의 때이니 먹으라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서 먹지 않는 일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어서 둘 다 버리게 하는 일과 같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시는 것이니 옛 생각을 접으라는 뜻 같습니다. 좁게 보면 유대인의 전통이나 역사관과 대치하는 말씀이고, 넓게 보면 우리 삶에 찾아오는 갈등과 고민의 순간을 두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이들이 듣고 보는 일은 무조건 다 기적이고 치유이고 용서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찡그린 표정과 율법교사들의 뾰족한 질문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마가복음의 빠른 전개는 긴장의 수위도 그만큼 빠르게 높아지고 있는 것을 보게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행동은 정말 다릅니다. 자기의 신앙심을 자랑하고 싶어서 금식한다고 표시내는 사람의 눈에는 거리낌 없이 먹고 마시는 예수님이 밉기만 했겠지만, 잘 못 먹는 사람들, 우울하고 힘들고 지친 이들에게 같이 먹자고 청하시는 예수님은 신기하고 고맙게 보이지 않았을까요. 이런 일도 있네! 싶지 않았을까요. 새 술을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 일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술을 관리하는 사람에겐 상식입니다. 오늘 말씀은 새 메시지 새 세상 새 진리가 예수님이라고, 그 새 술을 잘 간직하려면 나라는 술부대도 새로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 새로와지고 싶지만 쉽지 않습니다. 새로와지고 싶다는 마음도 일정하고 꾸준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려면 지혜도 필요하고, 세상과 다르게 사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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