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장 16-20절: 제자에로의 부름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묵상, 기도)

해설:

마가는 제자들을 부르는 이야기로 예수님의 공생애 이야기를 시작한다. 앞으로 읽을 이야기들은 연속하여 일어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이야기들만 골라 뽑은 것이다. 따라서 한 이야기와 다음 이야기 사이에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전제하고 읽어야 한다.

“갈릴리 바닷가”(16절)는 엄밀히 말하면 “갈릴리 호숫가”라고 해야 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갈릴리 호수는 바다처럼 커 보였기에 “갈릴리 바다”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보셨다”는 말은 “주목하여 보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우연히 시몬과 안드레를 만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내셨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17절)고 약속하신다. 이것은 사람들이 물 속에 빠져 있다고 전제한다. 성경에서 물은 죽음의 세력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은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사람들을 건져내는 일이다. 그분은 그 생명 사역으로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 것이다. 시몬과 안드레 형제가 그 말뜻을 제대로 알아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즉시로 그분을 따라 나선다(18절). 

예수님은 얼마 더 가시다가 야고보와 요한을 찾아내셨다(19절). 그들은 시몬과 안드레 형제처럼 예수님의 부름을 듣고 즉시로 따라 나섰다.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 세배대와 일꾼들을 배에 남겨두고, 곧 예수를 따라갔다”(20절)는 말은 그들이 모든 것을 버렸다는 뜻이다.

묵상:

마가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며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분이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그분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면 그분이 절대적인 의미로 다가옵니다. 그분이 그저 훌륭한 교사 혹은 위대한 예언자였다면, 그분을 따를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분이 구원자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분을 따르는 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구원자로 오신 분을 거부하는 것은 멸망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몸에 어느 정도 유익한 약은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됩니다. 하지만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약은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먹지 않으면 죽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시몬과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사실을 직감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빛과 태도에서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부름을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즉시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 나섰습니다. 그 결단은 그들을 불편과 결핍과 고난의 삶으로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기쁨과 의미와 보람을 발견했습니다. 그 결단으로 인해 그들은 구원 받았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구원을 전해 주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그들은 죽음의 바다에서 사람들을 건져내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들은 제자로서 훈련 받는 과정을 거쳐야 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번 실패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부활의 증인으로서 수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가복음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어떻게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믿음의 단계에서 어떻게 제자의 단계로 이르렀는지, 제자로서 그들이 어떻게 훈련받고 성장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독자들도 회개하고 믿어 제자로 발돋움 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기도:

예수 그리스도, 나의 주님이시여, 저의 눈을 열어 주셔서 주님이 누구신지를 제대로 알게 하시고 제대로 믿게 해주십시오. 저로 하여금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하시고, 주님을 온전히 믿게 해주십시오. 나 혼자 구원 받는 것에 만족하게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제자로 도약하여 다른 이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도구로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2 responses to “마가복음 1장 16-20절: 제자에로의 부름”

  1. billkim9707 Avatar

    예수님을 바르게 제대로 많이 아주깊게 알기를 원합니다. 머리로 깨닫고 마음으로 감화 감격 감동하며 손발로 순종하는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세상의 잡신과 부귀영화를 넘보는 초라한 존재입니다. Tunnel Vision을 원합니다.주님만 바라보고 자신을 부인하고 허락하신 십자가를 감수하며 주님뒤를 따르는 제자가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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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팔로워 네 명을 얻으십니다. SNS 시대의 팔로워는 컨텐츠가 좋으면 ‘꾹’ 누르고 팔로우를 하겠다는 사람인데, 예수님의 처음 팔로워는 ‘나를 따르시오’ Follow me, 메시지 성경은 Come with me 라는 명령 같은 권유, 초대 같은 명령을 듣고 일어난 사람들입니다. 이들 네 사람이 예수님을 전부터 알았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얼른’ 그물을 놔두고 따랐답니다. 네 사람은 둘씩 둘씩 형제간입니다. 호숫가에서 사람을 찾으셨으니 어업으로 밥벌이하는 사람들일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집안이 다같이 일을 했을 것입니다. 나의 시부모님은 남편이 초등학생일 때 서울로 올라왔지만 고향은 멸치로 유명한 바닷가입니다. 시부모님과 같이 내려가서 보니 살림집은 따로 흩어져 있어도 친척들은 다 바닷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멸치가게에서 일을 했습니다. 타지 사람이 하는 가게도 있지만 대개 그 동네에서 자란 사람들, 촌수를 따지면 이렇게 저렇게 걸쳐지는 친척들이었습니다. 처음 제자들을 부르신 장면을 생각하면 시댁 고향의 멸치 어장과 가게들이 떠오릅니다. 독자로서 가장 궁금한 부분은, 이 네 청년들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니 얼른 따라 나섭니다. 시몬과 안드레 형제는 호수에 그들을 던지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그물을 깁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설 때 과연 알고 그런건지, 잠시 일을 보고 다시 돌아올거라 생각한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들이 제자가 될만한 인물들이었는지, 예수님은 뭘 보고 그리 생각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상상해도 또 갸우뚱 해집니다. 그물을 풀고, 깁고 정리하는게 짜증이 났나? 매일 같은 일을 하자니 지겨웠나? 예수님에게서 거역할 수 없는 어떤 매력/마력/능력이 느껴졌나? 두 형제 네 사람은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 나서고 아버지 세배대는 엉겹결에 일손을 둘씩이나 잃습니다. 성경에서 물과 바다는 죽음을 암시하니 그물로 낚는다-건진다는 말은 구조와 구원을 뜻합니다. 요한의 세례가 물에 잠깐 잠겼다 나오는 방식과도 연결이 됩니다. 예수님의 일이 구원이라는 것을 저자는 이렇게 알려준 것이 아닐까요. 청년 네 사람이 익히 아는 일, 늘 하던 일인데 목적과 의미는 전혀 다른 일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제 혼자가 아니라 커뮤니티가 되었습니다. 1인에서 다섯명이 되었습니다. 마가복음서의 진행이 무척 빠르게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 세례, 광야…이런 부분은 빠르고 과감하게 나가고 제자들과 같이 일하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데 더 큰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그물을 떠올리다 보니 사회의 불의를 한탄하는 글에 나오는 또다른 그물도 생각 났습니다. 하늘의 그물은 성성할지라도 새지 않는다, 하늘의 그물은 성성해서 다 샐 것 같지만 놓치는 법이 없어 그 그물에 다 잡히게 되어 있다는 말을 합니다. 죄를 짓고도 빠져나가는 사람들,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도 뻔뻔한 이들을 보면서 한탄할 때 하는 말입니다. ‘하늘의 그물’은 죄를 걸러내는 그물이고, 예수님의 그물은 사람을 걸러내는 그물이다 싶습니다. 예수님의 그물은 걸리면 안되니 피해야 하는 그물이 아니라 어떻게서든 잡혀야 하는, 그 안에 들어가야 하는 그물이다 싶습니다. 나의 상태와 상황을 바꾼 뒤에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따르는 것이 먼저입니다. 먼저 할 일을 먼저 하는 지혜를 주소서.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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