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 7장 1-14절: 무엇이 더 좋은가?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이 장에서 전도자는 짧막한 문장의 지혜 격언들을 나열한다. “A가 B보다 낫다”는 식의 대구적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이 지혜 격언들은 <잠언서>에 나오는 것들과 유사해 보이지만 회의적 정서가 강하다. 

“명예”(1절)는 “좋은 이름”을 의역한 것이다. “값비싼 향유”는 물질적인 풍요를 의미한다. 덕 있는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것이 물질적으로 잘 사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중요하다”는 “죽는 날이 태어나는 날보다 더 낫다”는 문장을 의역한 것이다. 여기에는 전도자의 염세적 인생관이 담겨 있다. 앞에서도 그는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낫고, 태어나지 않은 것이 제일 낫다고 말했다(4:2-3).

“초상집”(2절)은 “애도하는 집”을 의역한 것이다. 본능을 따르자면, 애도하는 자리보다 먹고 즐기는 자리를 더 선호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먹고 즐기는 것은 방탕에 이르게 하고, 애도하는 사람과 같이 하면, 인간의 한계를 기억하고 겸손 해진다. 아픔 당한 사람과 같이 우는 것은 육신적으로 힘든 일이지만, 마음에는 유익을 준다(3절). 지혜로운 사람은 먹고 즐기는 자리에 가기보다 아픔을 나누는 자리에 가기를 더 좋아한다(4절). 

다른 사람의 칭찬을 듣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책망을 듣는 일이다(5절). 칭찬은 눈 멀게 하지만, 책망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가치 없는 것에 마음을 둔다. 좋은 일이 생겼다고 웃고 떠들지만, 알고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6절). 

지혜를 찾는다면 “탐욕”과 “뇌물”(7절)을 경계해야 한다. 탐욕에 사로잡히면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하게 되고, 뇌물을 탐하면 마음이 병든다. 어떤 일을 시작했다면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힘써야 한다(8절). 지혜를 허무는 또 다른 독소는 자만심과 분노다(9절). 과거에 대한 상념에 빠지는 것도 경계할 일이다(10절). 지혜는 돈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11-12절). 

지혜 중의 지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섭리를 따라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것을 인간이 바꿀 수 없다(13절).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14절). 인간으로서는 언제 좋은 때가 오고 언제 나쁜 때가 오는 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주어지는 때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전도자는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고 권고한다.

묵상:

산다는 것은 선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우리는 수 많은, 크고 작은 선택을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기준 없이, 되는 대로 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나름의 기준에 따라 더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매일의 크고 작은 선택들이 쌓여서, 그 사람의 인격이 되고 운명이 됩니다. 지혜란 바른 선택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선택의 기준은 지식으로 배울 수 없습니다. 매일의 선택과 결정을 통해 무엇이 진정으로 유익한 지를 체득해야 합니다.

전도자는 순간적인 만족보다 지속적인 만족을 선택하라고 권합니다. 순간적인 만족은 육체적인 것이고, 지속적인 만족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고급진 음식을 찾는 것은 순간적인 만족을 찾는 것이고, 좋은 인격을 얻도록 힘쓰는 것은 지속적인 만족을 찾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울려 먹고 즐기는 것을 찾고, 지혜 있는 사람은 슬픔 당한 사람을 찾아가 같이 아파하기를 택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이들의 칭찬을 받으려고 애쓰기보다는 책망과 비판을 귀 담아 듣습니다. 감정에 격해질 때, 그것을 표출하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서서 마음을 다스립니다. 지혜자가 가장 조심할 대상은 탐욕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는 사람은 돈 앞에서 늘 긴장합니다. 탐욕에 휘둘리면 이름이 더럽혀지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합니다. 그분이 정해 놓으신 것을 자신의 힘으로 바꾸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미래에 있을 일을 알아보려고 힘쓰지도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선물 꾸러미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담겨 있음을 알기에, 좋은 일이 주어지면 감사와 기쁨으로 응답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합니다. 

기도:

미래에 대해 불안해 하고 염려하는 이유가 주님을 믿고 의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군요? 저희가 순간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을 따라 선택할 때가 많았군요? 그래서 저희의 웃음 소리가 ”가마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6절)와 같았군요? 이제, 마음을 내려 놓고, 주님 앞에 고개 숙입니다. 저희의 마음이 바른 방향을 향하게 하시고, 바른 선택을 하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7 responses to “전도서 7장 1-14절: 무엇이 더 좋은가?”

  1. billkim9707 Avatar

    세상의 지혜가 아니고 하늘의 지혜를 원합니다, 갈림길 앞에 섰을때 어렵고 좁은길을 택하는 지혜입니다. 잠시의 부귀영화 보다 영원한 안식을 기리는 지혜입니다. 부조리와 죄가 만연한 세상을 보며 낙심할것이 아니고 기묘사, 모사, 전능의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아 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빛이신 구원의 예수님을 어두운 세상에 선포하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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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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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먹구름이 잔뜩 깔린 화요일입니다. 영상의 기온이지만 승강장에는 추운 바람이 일렁입니다.

    전도서 7장의 전반 (1-14절). 여러 가지 잠언들을 모아놓은 단락. 웃음보다 슬픔이, 잔칫집보다 장례식이, 바보들의 노래보다는 지혜의 책망이 더 낳다고 하네요. 왜? 살아보니 인생이 그렇더라는 것이 혹 그 답이 아닐지요?

    슬픔을 통해 공감을, 장례식에서 삶의 유한성을, 책망을 받으며 자기 의의 하찮음을 깨닫고 배우기 때문에?

    오랜만에 매트로를 타고 출근합니다. 오늘도 생명을 허락하심을 감사. 또 하루 몫의 기회를 선물로 주심에 감사. 일을 주시고, 가족을 주시고, 삶의 자리를 주셔서. 좋을 때에 기뻐하고 어려울 때에 생각하는 마음. 겸손히 주 앞에 무릅 꿇고 알 수 없는 내일을 소망 중에 기다리는 마음. 믿음의 마음 주시길.

    God. Grant me serenity. To accept things I can’t change. Courage to change things that I can.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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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achi049 Avatar
    gachi049

    인간의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13). 왜냐하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백성들을 위해 베푸시고 인간은 자신들을 위해 행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 날마다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고 영과 육이 강건하여 아직도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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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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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어제 밤에는 합창단 멤버 몇 명과 함께 엘에이 매스터 코랄과 함께 하는 헨델의 메시야 싱얼롱을 갔습니다. 작년에는 빈자리가 많아 보이지 않았는데 올해는 군데군데 빈 좌석들이 많았습니다. 표값이 올라가서 손님이 덜 온 것 같고, 사회 전반적으로 명절 분위기가 영 아니라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메시야 싱얼롱은 보통 음악회와 또 다른 느낌입니다. 전문 음악인들의 연주를 ‘감상’하는 즐거움은 기본이고, 내 목소리도 음악의 일부가 된다는 뿌듯함이 주는 기쁨이 있습니다. 솔로곡들은 전문인의 소양과 노력이 빚어낸 완성미를 드러내고, 싱얼롱으로 함께 부르는 코러스 곡들은 재능이나 테크닉보다 진심이 우선인 대중의 의욕으로 채워집니다. ‘청중’과 ‘연주자’의 옷을 번갈아 입는 셈입니다. 싱얼롱에 처음 간 것은 코로나 전이었는데 디즈니홀이 만석이었습니다. 청중들의 옷차림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했습니다. 손에는 메시야 악보책을 들고 있었습니다. 작년 싱얼롱 때는 히스패닉과 중국인들이 많이 보였었는데 어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관객의 숫자도 많이 줄었고 ‘차려 입고’ 온 사람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악보를 챙겨 들고 자리에 앉은 관객들을 둘러보니 아련한 동지의식이 느껴졌습니다. 커다란 합창단에 들어간 느낌이었습니다. 헨델의 메시야가 사랑받는 이유는 조화로우면서도 각각의 매력이 뚜렷한 선율 때문이지만, 어제는 가사 속에 담긴 불굴의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솔로이스트가 부를 때 귀에 꽂히는 가사가 있었습니다. ‘Every valley shall be exalted, and every mountain and hill made low, the crooked straight and the rough places plain – 모든 골짜기 높아지리, 모든 산과 작은 산 낮아지리라, 곱은 길 곧게 되며 험한 곳 평탄케 되리.’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응답하는 우리의 감사가 ‘메시야’ 입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꺾이지 않는 한, 우리의 고백이 멈추지 않는 한 메시야는 오십니다. 전도서의 지혜자는 메시야를 모릅니다. 지혜가 값진 것이라는건 알아도 지혜의 근원이신 메시야를 깨닫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보며 전도서의 왕은 낙담하고 실망합니다. 권력과 재물, 건강, 명성을 가져도 인간의 불완전함을 메꿔주고 채워주지 못합니다. 골짜기가 높아지고, 높은 산이 평평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홀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건 맞지만, 구불구불한 길이 곧아지고 높은 산이 평평하게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 또한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 할 수 없다 해서 아예 안 한다는건 지혜가 아니라 허무를 선택하는 겁니다. 메시야 싱얼롱 하루 전에는 매스터코랄의 정기 메시야 공연이 있었습니다. 공연에 갔었던 분이 너무 좋았다고, 완벽했다고 말합니다. 전문가들의 연주를 감상하는 동안엔 완벽한 평강과 위로를 받았을겁니다. 싱얼롱에선 긴장도 한 몫을 합니다. ‘잘 따라가야지,’ ‘제 때 나와야 하는데,’ 이런 걱정도 생깁니다. 믿음으로 사는 인생은 싱얼롱의 연장인 것 같습니다. 완벽하신 주님을 따라 불완전한 내가 노래를 부르고, 집을 짓고, 자식을 기릅니다. 감사합니다. 워크얼롱 work-along 에 불러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메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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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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