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서 34장: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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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34장에 기록된 사건은 32-33장에 기록된 사건보다 먼저 일어난 일이다.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한다(1절). 

주님은 먼저 시드기야 왕의 운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에 의해 점령 당할 것이며,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로 끌려 갈 것이라고 하신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평안하게 죽을 것이며, 사람들로부터 애도를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2-5절). 예레미야는 이 말씀을 시드기야 왕에게 전했는데, 이 즈음에 유다 성읍들은 대부분 바빌로니아의 수중에 들어갔다(6-7절). 

이 일이 있기 전에 시드기야 왕은 예루살렘 주민과 노예 해방을 위한 언약을 맺었다(8절). 율법은 히브리 사람이 동족인 히브리 사람을 노예로 삼지 말도록 금하고 있으며, 빚으로 인해 동족을 노예로 삼았다면 안식년(칠 년 마다 오는 해)에 방면해 주라고 규정한다(레 25장).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그 법을 지키지 않았다. 시드기야는 국가적 위기를 당면하여 노예를 소유한 귀족들에게 안식년 법을 따라 노예를 풀어 주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제안한 데에는 두 가지의 동기가 있었을 것이다. 첫째, 그것은 자신들의 불의를 회개한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풀어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둘째, 노예들이 해방되면 전쟁에 동원할 수 있었다. 노예 소유주들은 바빌로니아로부터의 공격을 막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에 시드기야 왕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9-10절). 그들은 성전에서 송아지를 잡아 절반으로 갈라 놓고 그 사이를 지나가면서, 그 언약을 지키기로 엄중하게 약속한다(18절). 

그로부터 얼마 후, 시드기야 왕의 지원 요청을 받은 이집트 왕이 바빌로니아를 치러 올라 온다.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이집트 군대가 후방에서 공격해 오자,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 공격을 멈추고 이집트 군대를 공격한다. 바빌로니아의 공격이 멈추자,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위험이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풀어준 노예들을 다시 잡아 들인다(11절). 

이 때,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주신다(12절). 주님은 먼저 유다 백성이 노예에 대한 안식년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을 책망하신다(13-14절). 그러다가 위기를 만나자 그들은 성전에서 노예 해방을 위한 언약을 맺고 그대로 실행했다. 거기까지는 잘 했다 할 수 있는데, 변심하여 풀어준 노예들을 다시 잡아 들이는 죄악을 행했다(15-16절). 주님은 그들이 악에 악을 더한 것에 대해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심판에 부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7절). 성전에서 송아지를 두 조각으로 갈라놓고 그 사이를 지나며 엄숙하게 서약한 사람들은 누구나 멸망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8-20절). 왕도, 고관들도 이 심판에서 피할 수 없을 것이다(21-22절). 

묵상:

“위기 앞에서는 모두가 유신론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큰 위기를 만나면 인간은 누구나 초월적인 힘을 찾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호의를 입을 수 있는 길을 찾습니다. 그러는 중에 유다에서 안식년 법과 희년 법이 오래도록 시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시드기야는 그 법을 시행하면 하나님의 호의를 입을 뿐 아니라 해방된 노예들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일석이조의 기막힌 묘수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시드기야 왕의 제안에 호응합니다. 노예를 풀어주는 손실이 전쟁에서 패하는 것보다 훨씬 적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집트 군의 원정으로 인해 당면한 위기가 사라지자, 그들은 손바닥 뒤집듯이 변심하여 풀어준 노예들을 다시 잡아 들입니다. 그들이 행한 일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행한 회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꼼수였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는 중에 “하나님을 만홀이 여기지 말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새번역에서는 “자기를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갈 6:7)라고 번역했습니다. 시드기야 왕과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하나님을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그들의 꼼수에 하나님이 속아 넘어가실 것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삼상 16:7). 무슨 일을 하든지 진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분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만홀히 여긴 것에 대해 예루살렘의 왕과 귀족들을 모두 심판하겠다고 하십니다. 얼마 후, 이집트 군대는 바빌로니아의 반격을 받고 퇴각 했고, 바빌로니아 군대는 기수를 돌려 예루살렘에 대한 공격을 재개하여 결국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기도:

예루살렘의 귀족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저희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저희가 알지 못하는 저희의 속 마음까지 다 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주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되지도 않는 핑계를 들이대면서 저희의 부정한 욕망을 따라 행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을 주님답게 대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5 responses to “예레미야서 34장: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죄”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창밖은 구름이 많고 아직 어둡습니다. 토요일. 몸도 마음도 버거웠던 한 주가 그렇게 흘렀네요.

    예레미야 34장. 아직 예루살렘 포위와 최종 농성전이 시작되기 전. 선지자는 시드기야 왕의 운명을 예언합니다. 비참하게 바벨론으로 끌려가지만 (시드기야에 당하는 고통에 비하면 남한산성에서 당한 인조의 굴욕 쯤은 매우 자비한 것으로 느낄 정도) 죽음의 존엄 (dignity)만은 누리게 해주시겠다는 약속.

    다음은 히브리 노예 문제에 관련한 심판의 예언. 바벨론과의 농성전을 앞두고 시드기야 왕은 희년의 규례대로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범국가적 회개의 제스쳐+병력 충원?) 시킬 것을 명하고 모두가 따르지만 블과 얼마 후 대부분이 그 언약 (covenant)을 깹니다. 전쟁은 짧고 재산은 영원하다는 믿음? 그러므로 피의 언약을 깬 모두가 죽게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 죄라는 오늘의 묵상 말씀에 마음이 무거워지내요.

    아침부터 일정이 있어 마음이 분주합니다. 그래도 삶이라는 악보에 늘상 쉼표를 주셔서 감사. 밤에 따뜻한 잠자리에 눕고 아침에는 다시 일어나게 하셔서. 또 사랑할 사람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 안에 감춰둔 탐욕과 위선, 편법과 속임수를 모두 보시는 주. 그러면서도 정죄하시지 않으시는 분. 오히려 값없이 내 죄를 대신 져주시는 유월절 어린양.

    보혈을 지나. 보혈을 지나. 한걸음씩,앞으로 나가는 인생이 되길. 하나님 품으로. 아버지의 품으로. 소망이 낙심을 이기고 믿음이 불안을 꺾는 하루가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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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눈을 뜨는 것과 일어나는 것이 따로 가는 토요일 아침입니다. 남편이 한국에 일을 보러 간 지 일주일이 되었습니다. 자기 근무일 시간표에 맞춰 일하러 나오는 파트 타이머 종업원들이 고맙습니다. 아침부터 초저녁까지는 나 혼자 일하다 저녁부터 밤까지는 종업원이 일하는데 내가 가게 클로징을 하러 밤에 다시 가게로 나옵니다. 어제부터 오늘 내일 계속 비가 올 것으로 예상되어 문을 열어도 손님은 없는 주말이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남편은 열흘도 채 안되는 짧은 일정안에 볼 일을 보고 다음 주 초에 돌아옵니다. 같이 있어도 말을 안하는 것과 곁에 없어서 못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걸 이번에도 느낍니다. 결혼해서 내내 한 직장을 다녔으니 출퇴근하는 -퇴근은 늘 각각 했지만- 시간에 많은 말을 나눴습니다. 아마 시부모님과 함께 살아 집에서 편히 못하는 대화를 그렇게 풀었던 것 같습니다. 미국에 와서는 ‘출퇴근 동료’가 아니었지만 요거트 가게를 하면서 다시 출퇴근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가게를 해도 종업원을 여러명 쓸 수 있는 여건 (경제적)이 된다면 한국에 같이 갈 수 있겠습니다만, 코로나 팬데믹 때부터 꺾인 경기 환경은 여전히 불투명하고 불안합니다. 기술이 발전해서 원할 때마다 화상통화를 할 수 있으니 다행이고 좋습니다. 페북에 누가 쓰기를, 사람은 현재보다과거를 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정서적 퇴색 편향 (학자들은 따로 명명해서 정리하는 것이 일이므로) Fading Affect Bias 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나와 시간이 멀수록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으로 느낀다고 합니다. ‘라떼 (나 때는 말이야)’ 도 이런 편향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그 때가 좋았을리 없는데 그 때는 더 좋았고 더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기억하면 그런거가 되는지 모르지만, 옛날이 좋았는데…하는 말을 너무 쉽게 합니다. 남편하고 자주 나누는 이야기 중에 학교 다닐 때 얘기가 있습니다. 딱히 ‘부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 많지도 않고, 그저 다 그만그만하게 살던 때니 선생님들도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학교에 엄마가 자주 오는 아이들은 담임한테서 받는 대우가 달랐던 걸로 기억합니다. 남편은 집이 넉넉하지 않아서 공납금을 제 때 못내는 일이 다반사였답니다. 미납인 아이들을 앞으로 불러내 창피를 주고 때리기도 하고 집에 돌려 보내기도 했답니다. 나는 학교에 엄마가 자주 오는 친구가 엄청 부러웠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친구는 공부도 엄청 잘했습니다. 1등이고, 반장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1시간이면 만나러 갈 수 있는 곳에 사는 그 친구와 바로 며칠 전에도 통화를 했는데 학교 다닐 때 받은 ‘상처’의 일부가 그 친구의 엄마와 관계 있다는걸 친구 본인은 모를겁니다. 옛날이 더 좋았을리 없는데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굴절됩니다. 지금 여기서 느끼는 고통을 면해보려는 일종의 자기보호 장치일까요. 예레미야서를 읽는 동안 내내 드는 생각은,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정직하게 산다는 것은 완벽함이나 완전함을 추구하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럴 수가 없는게 인간입니다. ‘To err is human, to forgive is divine 실수하는 것은 인간의 일이고, 용서하는 것은 신의 일이다.’ 의도성을 가진 실수와 죄까지 포함한다는 뜻은 아닐겁니다. 실수를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신의 능력은 그런 잘못을 용서하는 것이니 인간과 신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뜻도 됩니다. 용서하기가 그만큼 어려운데 용서를 한다면 인간의 한계를 넘는 것이라는 격려도 담겨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시드기야와 지도층이 한 일은 실로 치사하고 저급한 행동입니다. 본문에서 시드기야가 노예를 풀어준 일은 두 가지 면에서 도드라집니다. 히브리 동족을 노예로 삼는 일은 율법을 거스리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또 한가지는 노예의 해방은 희년법과 관계가 있습니다. 희년범은 고대나 지금이나 지키기 어려운 율법입니다. 빚을 탕감하는 일, 땅의 경작을 멈추는 일, 경제 활동을 리셋 하는 일은 희년의 정신이 요구하는 일입니다. 시드기야가 노예를 풀어주자 하나님은 ‘너희가 비로소 잘못을 뉘우치고 내가 보기에 올바른 일을 했다 (15절)’고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시드기야 왕은 마음을 바꾸어 없었던 일로 합니다. 노예는 다시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당연합니다. 마땅합니다. 사람의 눈에도 악한데 하나님께서 그냥 두실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약함이 악함으로 넘어가는 순간입니다. 마음을 바꾸는 변덕은 인간이기에 일어날 수 있지만, 변덕의 결과가 타인의 고통으로 이어지면 그건 악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하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서 시작하지만, 아는 순간 그만 두는 것은 우리의 자유에 달린 일입니다. 우리에겐 회개할 자유가 있고, 돌아서는 결심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산다는건 매순간 단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산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인간됨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 그대로 내려놓는다는 뜻이겠습니다. 나의 모자람, 교만함, 완고함, 어리석음, 무식과 무지, 약함, 악함을 주님 앞에 시인한다는 뜻이겠습니다. 회개의 영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잘못된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가던 길에서 돌아서는 발도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을 의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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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오 키리에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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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bull9707 Avatar

    모든것을 정확하게 아시는 전지전능 창조주 하나님 앞에 사는것을 항상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변절하지않는 실천의 믿음을 바라지만 환경에 따라 요동하는 존재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마땅히 멸망할 죄인을 은혜와 구원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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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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