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하나님은 모세에게 돌판 두 개를 깎아서 산으로 올라 오라고 하신다. 그가 격분하여 내던져 깨뜨린 십계명 돌판과 같은 모양으로 깍아가지고 오면 그 글을 다시 새겨 주겠다는 것이다(1절). 다음 날 아침 일찍 올라와 정상에서 하나님을 기다리되, 아무도 따라 올라오지 않게 하라고 하신다(2-3절).
모세가 새 돌판을 준비하여 산에 오르자(4절), 하나님이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그와 함께 거기에 서서, 거룩한 이름 ‘주’를 선포하셨다”(5절). 주님께서는 “모세의 앞을 지나가시면서”(6절)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셨다. 앞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청했다(33:18).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보고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고 답하시면서, 그가 바위 틈에 숨어 있을 때 당신의 영광이 그 곁을 지나가게 하겠다고 약속 하셨다(33:19-23). 그 약속을 지키신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본성을 계시하신다. 그분은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6절)이시다. 그분은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고,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7절).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그 화가 이르게 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분의 진노가 삼사라면, 그분의 은혜는 천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진노와 심판은 예외적인 사건이다.
이 말씀을 듣고 모세는 땅에 업드려 경배하며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으로 올라가 주시기를 다시 청한다(8절).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집이 센 백성”(9절)인 것은 사실이나, 그 부족함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신다(10절).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면 그들을 위해 이방 민족들을 몰아내겠다는 약속이다(11절).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는 말은 오직 그분만을 의지한다는 뜻이므로, 다른 민족과는 언약을 맺지 말아야 한다(12절). 그 언약으로 인해 그들의 우상숭배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이방 민족들이 섬기던 신상과 제단을 허물라고 하신다(13절).
여기서 하나님은 당신을 “질투하는 하나님”(14절)이라고 소개하신다.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같은 말로 당신을 소개한 적이 있다(20:5). 이 말은 “뜨겁게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를 뒤집어 표현한 말이다. 인간을 참되게 사랑하고 복되게 하는 신은 하나님 밖에 없다. 다른 신들은 악한 영이거나 우상일 따름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이토록 강조하시는 이유는 다른 신들을 찾는 것이 곧 파멸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방 민족과 언약을 맺는 일은 그들의 우상숭배에 문을 여는 행위다. 그들의 우상 숭배는 항상 음행과 연루되어 있다(15-16절).
이어서 하나님은 이미 주신 율법 규정 중에서 중요한 것들을 다시 강조하신다(17-26절). 그분은 모세에게 이 모든 명령을 기록하라고 하신다. 그것이 언약의 조건이기 때문이다(27절). 모세는 그곳에서 “사십 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28절) 지냈다. 이것은 의도적인 금식이라기 보다 먹고 마시는 것을 잊을 정도로 깊은 사귐에 머물렀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세가 준비한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 주셨고, 모세는 나머지 율법들을 돌판에 새겼다.
묵상: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조심할 것이 하나님에 대한 “의인화 된 표현들”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뜻은 사람의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모습과 활동을 묘사하기에 인간의 언어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언어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물리적인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시공간적 경험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황홀한 저녁 노을을 열 사람이 보았다면, 열 사람의 표현이 전부 다를 것입니다. 그 표현을 들은 사람들이 상상한 것은 또 다를 것입니다. 이토록 제한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그분의 활동에 대해, 그분이 하신 말씀에 대해 인간의 언어는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성서의 저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든 표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상대하실 때에는 인간의 차원으로 스스로를 낮추어 말씀하셔야 했습니다. 인공 위성을 만드는 과학자가 초등학교 교실에서 인공 위성에 대해 설명하려면, 초등학교 학생들의 수준으로 낮아져서 표현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인화 된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나의 얼굴은 보이지 않겠다”(33:20),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너를 나의 손바닥으로 가리워 주겠다”(33:22), “네가 나의 등을 보게 될 것이다”(33:23), ”내가 새 돌판에 다시 새겨 주겠다“(34:1), “주님께서 모세의 앞으로 지나가셨다”(34:6),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34:14) 같은 표현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표현들을 만날 때,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동을 사람의 행동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의 성품에 비유하며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표현들을 만날 때면, 문자 너머에 있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더듬어 닿을 수 있는 그 너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영이신 하나님, 세 분이면서 한 분이신 하나님, 저희가 주님에 대해 “안다”는 교만에도 빠지지 않게 하시고, “모른다”는 불신에도 빠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님의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저희가 어떻게 주님을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온 우주의 창조주요 구원자이며 통치자이신 주님을 저희가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알지만 다 모르는 분, 모르지만 알만한 분,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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