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장 13-16절: 차별의식이라는 죄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그 때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해 주시기를 청한다. “쓰다듬어 주기”(13절)는 손을 얹어 축복하는 행동을 의미한다. 그것을 보고는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는다. “꾸짖다”로 번역된 ‘에피티마오’는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을 때 사용된 단어로서(8:33) 호되게 질책하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존중하라고 하셨는데(9:36-37),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가는 “예수께서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14절) 라고 적는다. “노하다”로 번역된 ‘아가낙테오’는 심한 분노의 감정을 가리킨다. 제자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여 사람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격분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린아이들처럼 사회에서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더욱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이들이 동등하게 높임 받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15절)라고 덧붙이신다.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그 다스림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말은 모든 소망이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의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거기에 들어간다”는 말은 죽어서 천국 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과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신다(16절).

묵상:

최근에 어느 기관장이 “가난한 집 아이들과 부자집 자제들”이라고 말하여 뉴스에 올랐습니다. 그 사람의 무의식에 깊이 배인 차별의식이 불쑥 튀어 나온 것입니다. 이 언사에 대해 분노감보다는 수치감을 더 강하게 느낀 이유는, 우리 모두의 무의식 안에 그와 같은 차별의식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속에 감추어둔 차별의식을 들킨 것 같은 느낌 때문일 것입니다. 

차별의식에 젖으면, 우리는 인종, 출신지역, 가정배경, 외모, 실력, 직업, 종교, 재산 같은 것들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사람에 대한 처신을 달리합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가까이 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 없이 등을 돌립니다. 그렇게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존재 가치를 부정 당하는 사람들을 “사회적 약자” 혹은 “사회적 소수자”라고 부릅니다. 예수님 당시에 여성, 어린이,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 이방인, 노예 같은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권리는 자주 부정 당했고, 정의는 늘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차별의식은 죄성의 가장 악한 증상이며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들에게 당신의 형상을 주셨고, 모든 이들을 사랑하고 계시며, 모든 이들을 구원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사회적 약자들을 주로 찾으셨고, 식탁을 열어 그런 사람들을 초청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가장 필요했기 때문이며,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가장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땅에 아무 소망이 없기에 하나님을 바라고 갈망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이런 모습을 보아 온 제자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차별의식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과 행동은 차별의식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차별의식의 뿌리가 깊고 그 영향력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기도:

주님, 주님이 차별하지 않는 분이기에 저희가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차별하지 않는 분이기에 저희는 언제든, 어떤 상황에서든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같은 사람”을 받아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저희도 그런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대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차별의식이 아직도 저희 안에 남아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시어, 이 깊은 차별의식을 제거하여 주시고, 누구를 만나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대하게 하여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6 responses to “마가복음 10장 13-16절: 차별의식이라는 죄”

  1. gachi049 Avatar
    gachi049

    주님의 마음을 주셔서 가난한자, 부자, 인종, 피부, 언어가 다르더라도 차별하지 않고 주안에서 형제 자매처럼 살아가는 남은 여정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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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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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어린이들을 축복하신 주님, 오늘의 말씀이네요. 누구든지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경고. 그리고 주님은 아이들을 껴안으시고 쓰다듬으시며 축복하셔요.

    죄와 죽음의 법이 다스리는 세상은 악의와 거짓, 적대적 경쟁, 미래의 불안으로 가득하지요. 그래서 나이 들면서 경계하고 의심하며 확보하고 숨겨두는 법을 배워온 것 같아요. 철이 들고 세상을 알게 된 것이지요.

    철 없는 아이들은 경계하고 대비할 줄을 모르고 예쁨 받고 친구삼고 신나게 놀기를 갈구하죠. 마치 아직 에덴에 머물던 창조 원형의 인간처럼. 오늘 하루 제 삶이 어린이와 같은 천진함을 맛보기를 원해요.

    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이 천국으로 화했다는 찬송시처럼.

    살의와 악독으로 가득찬 세상 가운데에도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처럼 에덴을 맛보는 삶이 되었으면.

    그런 축복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누렸으면. 기도해요, 우리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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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한국에서 산 시간과 미국에서 산 시간이 거의 같습니다. 한국은 태어나 자란 곳이요 아기를 낳아 엄마가 되고 또 몇 군데 직장생활도 했었던 곳입니다. 미국은 가족과 함께 이주해 성인으로 살아온 곳입니다. 남편과 나는 미국 땅에 발을 내디딘 첫날부터 각자의 생존 뿐 아니라 아이들의 안녕과 성장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그러니 두 나라를 나란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의 가치와 의식 형성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문화적인 틀을 표면에 드러난 정도로 비교하는 것은 가능해 보입니다. 한국은 내가 나를 위치하기 전에 사회가 먼저 정해줍니다. 쇼핑몰의 안내도에 ‘현재 위치 you are here’라고 표시해 놓은 것처럼 한국은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나의 위치설정은 성별, 연령, 출생지, 부모, 사는 곳, 집 크기, 학력, 외모, 신체조건, 직업, 종교…여러 데이타가 합쳐져서 만들어집니다. 학교 다닐 때 ‘가정환경조사서’라는게 있었습니다.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를 묻지는 않았지만, 몇 개일지 추정하려면 할 수 있을만큼 세세하게 물었습니다. 미국은 나의 위치를 묻지 않습니다. 피부색과 언어 능력처럼 즉각적인 표지마저도 그의 위치를 단정하지는 않습니다. 한국도 미국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디쯤에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너무 많이 물어봐 탈이라면 (법적 가이드라인이 있어도) 미국은 너무 묻지 않아 탈이라고 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보는 제자들의 모습은 정말 실망스럽습니다. 무례하고 무지합니다. 어린이를 대하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아는데도… 본문을 여러 번 읽는 중에 예수님의 어린이 사랑은 무조건적이었을까 하는 우문이 생기기는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뿐 아니라 그 누구에 대해서 ‘조건적’ 사랑을 하시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묻는 것은, 어린이들은 질서보다 혼란에 가깝고, 이타심보다 이기심이 앞서기 때문이라는 나의 편견이 작동해서 입니다. 또 예수님이 어린이들을 감싸면 ‘어린이=천사’라면서 미화하는 것이 참 피곤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는 프리패스, 익스프레스 라인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닐 것 같습니다. 어린이 뿐 아니라 우리가 생각 없이 무시하고 밀치고 건너 뛰는 사람들을 또렷이 보라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자기의 공으로, 자기 실력으로 간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어린이에 대해 편견이 있듯이 내겐 편견과 선입견이 여전히 있습니다. 편견이 있다는 것은 자기의가 있다는 것이고, 은연 중에 차별한다는 말입니다. 있는 걸 어떡하라구…하는 것은 예수님의 기준에 미달입니다. 있으니 고쳐야지, 있으니 조심해야지 하면서 살기를 원합니다. 내게 남은 모국의 정신이 차별과 편견을 무심하게 여기는 둔감함이 아니기를 원합니다. 어린이를 환영하시고 기뻐하신 예수님의 넓은 품에서 나도 자랍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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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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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billkim9707 Avatar

    온 인류, 온 세상을 위해 오신 주님은 변두리에 소외된자들의 안위에 우선 관심을 두고 계시는것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뒤를따르는 사귐의소리 식구들도 변두리에서 방황하는 소외된자들에게 먼저 위로와 도움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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