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2장 13-17절: 낮은 데로 임하시는 주님

2–3 minutes

음성듣기 (해설):

음성듣기 (묵상 및 기도)

해설:

마가는 예수께서 바닷가(실은 호숫가)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 장면을 간단히 소개한(13절) 다음, 레위를 부르신 이야기를 전한다. “길을 가시다가……보시고”(14절)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그를 우연히 만난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앞의 네 제자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예수께서 그를 찾아가신 것이다. 

레위는 “마태”라고도 불렸는데(마 9:9), 직업으로는 세리였다. 로마 황실은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롯에게 거액의 세금을 걷어 보내라고 명령했고, 헤롯은 자기가 착복할 몫을 더하여 징수하도록 세리들에게 명령했다. 세리들도 자신들이 착복할 몫을 더하여 개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했기 때문에, 갈릴리 주민들 대다수는 과도한 세금에 짓눌려 살았다. 이런 까닭에 세리는 유대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다. 이방 제국에 빌붙어 동족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 중 하나를 찾아내어 제자로 부르신다. 동족들에게 무시와 배척을 당하던 그는 예수님의 초청에 즉시로 따라 나선다.

레위는 예수님의 일행을 자기 집에 모셔서 잔치를 베푼다. 유유상종이라고, 그 자리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들”(15절)이 모여 들었다. “죄인들”은 “범죄자들”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활 형편 상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하층민들”이라고 의역하는 것이 좋다.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우리는 동류다”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엄격한 기준으로 겸상할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을 구분했다. 그랬기에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행동이 이상해 보였다. 그래서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16절)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7절)고 답하신다. 예수께서 그들과 식탁을 같이 하신 까닭은 그들의 죄에 눈 감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을 회개시켜 거룩하게 살게 하려는 뜻이었다.

묵상:

제자를 고르시는 예수님의 기준은 특별합니다. 당시 갈릴리에도 스펙 좋은 사람들이 많았을 터인데, 예수님은 먼저 어부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어부들은 체질적으로 강인한 사람들이었으니 특별히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리를 찾아가 부르신 것은 아주 이상합니다. 그런 사람을 제자로 데리고 다닌다면 애국심과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들로부터 비난 받거나 외면 당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유대의 해방을 위해 싸웠던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에게는 세상적인 스펙도, 신앙적인 열심도, 정치적 이념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오직 그 사람의 내면만을 보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이상해 보이지만, 당시 율법학자들에게는 더욱 이상해 보였습니다. 그들은 상대할 사람과 상대하지 말 사람을 아주 철저하게 구분하고 살았습니다. 상대 못할 사람들(죄인들)과 가까이 하면 자신들이 부정해진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에 괘념치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분을 부정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율법학자들에게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17절)는 말씀으로 당신의 입장을 천명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죄를 병에 비유하십니다. 병든 사람은 혐오하고 배척할 대상이 아니라 돌보고 치료하고 회복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리, 창녀 그리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하층민들을 가까이 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병을 치유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반면 스스로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상관 없습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롬 3:10)고 했는데, 예수님도 같은 생각이셨습니다. 의인은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고 딴지를 건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으로써 예수님은 “너희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나는 너희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메시지를 던지시는 셈입니다. 그들이 세리와 창녀와 하층민들을 혐오하고 배척한 이유는 그들의 자기의 때문이었습니다.

기도:

더 없이 높으신데 낮은 데로 오신 주님, 찬란한 빛 가운데 계시지만 깊은 어둠 속에 오신 주님, 더 없이 거룩하신데 더럽고 추한 곳에 오신 주님, 낮아진 저희 마음에, 어두운 저희 영혼에, 더럽고 추한 저의 인생에 찾아 오시니 감사 드립니다. 주님의 높으심과 광채와 거룩하심으로 저희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저희도 주님처럼 낮고 어둡고 더러운 곳으로 내려가 주님의 높으심과 광채와 거룩하심을 전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6 responses to “마가복음 2장 13-17절: 낮은 데로 임하시는 주님”

  1. billkim9707 Avatar

    겉으로는 그럴사하지만 내용은 썩고 냄새나는 병자입니다, 마땅히 죽어야할 병자들을 위해오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온세상이 어둡고 병들었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자주 너머지는 처량한 신세입니다.오직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만이 치유의 처방인것을 믿습니다, 샘물같은 보혈이 계속해서 정결하게 씻지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않는 성도가되기를 원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부인하고 허락하신 십자가를지고 주님뒤를 우직하게 따르는 제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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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주여 불쌍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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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안부를 묻는 문자에 답을 하기가 두려워졌습니다. 안부 전화나 문자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화재 소식이 뉴스에 올라오고, 여기서 제일 먼저 발생한 퍼시픽 펠리세이즈와 이튼 (알타디나) 화재가 지금까지도 진화되지 않고 바람을 타고 도시 안쪽으로 더 깊이 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밤에도 우리 동네를 통과하는 프리웨이의 반대편에 있는 주택단지를 위협해 소방 헬리콥터가 밤새 출동을 했습니다만 아직 안전한 수준까지 진화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소방 트럭과 장비 차량의 진입을 위해 프리웨이를 막았기 때문에 로컬 도로 곳곳이 대피 차량과 일반 이용자들로 인해 가득 차고 혼란스러웠다고 합니다. 엘에이에서 남쪽으로 멀찌감치 떨어진 도시로 피난 가 있는 딸네가 오늘 밤에 돌아올 것 같다고 해서 어제 저녁에 딸네 집에 미리 갔더랬습니다. 딸과 페이스타임을 하면서 집을 돌아보았습니다. 우리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주요 프리웨이의 반대편 산쪽에서 불길이 보였습니다. 손이 닿을 것처럼 가깝고 크게 보여 많이 무서웠습니다. 우리 동네까지 강제 대피령이 난 것은 아니지만 새로 나는 불도 무섭지만 여러날동안 꺼지지 않고 계속 번지기만 하는 산불이 너무 무섭습니다. 엘에이의 코리아타운과 다운타운, 남동쪽 동네들은 비교적 안전합니다. 세찬 바람과 건조한 기후 때문에 화재의 위험은 여전하지만 산불의 직접적인 위험은 없다고 봐도 됩니다. 말리부와 퍼시픽 펠리세이즈 산맥과 연결되어 있는 엘에이 북쪽의 밸리지역이 현재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게티 뮤지엄의 반대편에 있는 UCLA와, UCLA 캠퍼스에 붙어 있는 베벌리힐스, 벨에어 단지 -UCLA 가 엘에이 최고 부자동네 바로 옆에 있다는걸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에도 대피준비령이 발효되었습니다. 뉴스부터 체크하고 성경을 읽는 날이 며칠 더 계속될 지 모르겠습니다. 감사와 걱정이 정확하게 반반인 상태, 불안감과 연민이 동시에 작동되는 이 상태를 얼마나 더 겪을 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레위 (마태)를 부르십니다. 그도 소외된 사람입니다. 문둥병자나 중풍병자처럼 격리되고 소외된 삶을 삽니다. 아픈 사람은 동정이라도 받지만 세리인 레위는 그마저도 못 받고 되려 멸시와 욕을 먹으며 살았을겁니다. 그래도 물질적으로는 넉넉해서 (떳떳하지는 못했지만) 밥 먹을 땐 여러 사람들을 불러 같이 먹었습니다. 레위네 집에서 밥을 먹는 사람 중에 ‘온전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미워하고 피하는 사람들, 경건과 정의를 중요시하는 사람에겐 더더욱 사람 같이 보이지도 않는 그런 사람들이 레위의 손님이었을 겁니다. 여기부터 벌써 도전이 됩니다. 나는 과연 바리새파 사람보다 유연하고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요. 율법학자와 세리 중에서 누구와 친구를 할까요, 어느 집 식사 초대에 응할까요. 예수님이니까, 당신을 의사라고 보니까 건강하지 못한 이들을 찾아 다니는거라고 말씀하는거다, 내 코가 석 자인데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돌아볼 겨를이 어디 있겠나…싶습니다. 이게 현실의 법칙이고 세상 풍습일 겁니다. 그런데 이게 아닌 것 같습니다. 불안감과 연민을 동시에 느끼고, 감사도 했다 걱정도 했다 혼란스럽지만, 매일 예수님을 묵상한다는 사람이 세상의 방식을 넘어서지 못하고 세상 하는대로 따르는 것은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마음의 짐을 지고 괴로와 하던 중에 주께서 짐을 벗겨 주셨다고 기뻐한 게 화요일 새벽이었습니다. 다음날 수요일 새벽에 일상이 비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뒤로 개인의 어려움이 곧 공동체의 어려움인 시간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씩 고쳐 주셨지만 실은 공동체를 고쳐 주신겁니다. 한 사람은 하나가 아니라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구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람을 붙잡아 주시고, 불길을 꺼주소서. 위로와 희망이 필요한 곳에 계시는 주님, 우리도 주님 계시는 곳에 같이 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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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주여 권능의 손으로 주의 자녀들을 위로하시고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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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오늘은 새벽 4시까지 푹 잤습니다. 7시간이나 꿀잠을 잤네요.

    오늘의 본문을 보기 전에 좋아하는 노래를 한 곡 들었습니다. 손경민 곡 은혜: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2절의 가사가 특히 울림을 준 것은 이제는 휠체어로만 운신이 가능하신 어머니를 상주 돌봄이분의 외박으로 제가 하루동안 돌봐드리면서 느낀 간접 장애체험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게 주어진 신체의 자유, 그리고 당연한 듯이 느렸던 일상의 기쁨들이 하나 하나 없어질 때가 모두에게 오겠지요? 만약 육체와 이생 밖에는 세상에 아무 것도 없다면 우리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한심하고 의미없는 것일지요?

    우리를 그의 장막 안으로 부르시고 눈물을 닦아주실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세리 레위를 부르십니다. 그분은 죄인을 차단과 단죄의 대상으로 보지 않으시고 치료와 회복의 대상으로 보셨지요. 죄인의 집에 들어가 같이 맛난 것을 먹으며 즐거움을 함께 나누시기도 합니다.

    그런 주님이시기에 저 같은 죄인도 주님의 자녀로 그 분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손경민님의 노래처럼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임을 고백하는 새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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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아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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